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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장도 과잉도 아닌 적정대응 체계 갖춰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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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염태정 기자 중앙일보
염태정 정책부디렉터

염태정 정책부디렉터

군대에 있는 아들을 주말에 만나러 가곤 했는데 이번 달엔 면회금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이란다. 면회 삼아 나들이하는 것도 괜찮았는데 어쩔 수 없었다. 대신 대전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갔다. 고속버스를 탔다. 버스 안 승객 거의 모두 마스크를 했다. 현실이 아닌 영화 장면 같았다.

코로나 조만간 종식 말하지만 #많은 사람들 여전히 두려워해 #메르스 때처럼 여러 문제 노출

유성 고속버스터미널 대합실 의자에 앉아 친구를 기다리는데 부부로 보이는 중국인이 내 옆에 앉았다.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집에 가만히 있으라는 걸 ‘코로나 별로 신경 안 쓴다’며 큰소리치고 나왔는데 신경 안 쓴 게 아니었나 보다. 그 중국인이 버스를 타려 자리를 뜬 후에야 께름칙한 마음이 가라앉았다.

친구와는 술 한잔했다. 음식점엔 손님이 별로 없었다. 종업원은 친절했다. 먹기 좋게 삼겹살을 잘라주고 말하지 않아도 반찬이 떨어지면 바로 내왔다. 요즘 손님이 없어 힘들다고 했다. 우린 반가운 손님이었나 보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 승객들 역시 다들 마스크를 했다. 답답해서 하고 싶지 않았으나 눈치가 보여 얼른 마스크를 썼다.

신종 코로나가 생활 곳곳을 지배하고 있다. 졸업·입학식을 비롯해 각종 행사는 줄줄이 취소다. 회식은 확 줄었다. 집 밖을 나가지 않는다. 상인·유통업체 피해는 크다. 직원 채용도 미룬다. 여행사를 하는 지인은 “중국·동남아는 물론 유럽도 안 간다. 이런 상태가 4월까지 가면 정말 망할 거 같다”고 했다.

서소문 포럼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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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충남 아산 경찰인재개발원과 충북 진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에서 격리 생활을 했던 우한 교민들이 보름간 격리 생활을 끝내고 15~16일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 지역민들은 이들을 따뜻하게 환송했다. 도로변에는 ‘건강하고 밝은 일상으로 복귀하시길 기원합니다’는 현수막이 걸렸다. 지난달 말 이곳에서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은 계란을 맞고 김강립 보건복지부 차관은 멱살을 잡혔다. 주민들은 초기엔 격리 수용을 반대하며 트랙터로 길을 막았다. 당시 반대 시위는 무리한 거라 보지만, 지역민을 비난할 수만은 없다. 반대 시위의 바탕엔 전염 두려움과 불신이 깔렸다. 정부는 격리장소 발표 이전에 두려움과 불신을 해소했어야 했다. 안전은 가장 기본적인 욕구다. 더욱이 한국은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트러스트』에서 말한 저신뢰 사회 아닌가.

마스크 사재기에서 행사 취소까지 코로나 불안은 여전하다. 그런데 요즘 정부 인사 발언에는 자신감이 배어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3일 경제계 간담회에서 “코로나19는 머지않아 종식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세균 국무총리는 15일 “코로나19 전쟁서 승리하지 않을까 기대감을 갖게 한다”고 말했다. 앞서 박원순 서울시장은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MERS) 때보다 훨씬 더 잘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보건 당국은 아직 소강 국면으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정부는 잘하고 있다지만, 메르스 사태와 마찬가지로 이번 신종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다양한 문제점이 나왔다. 중국 등 국제사회와의 외교 문제(외교부), 격리대상자 지원(지자체), 학교의 휴교(교육부), 국내 소비 위축과 소상공인·영세업자 피해(기획재정부·중소벤처기업부), 서비스업 활동 둔화(문화체육관광부) 등이다. 신종 감염병 방역은 부처 단독으로는 힘든 만큼 국무총리를 책임자로 하는 통합적 국가재난관리 및 단일 지휘체계의 구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대응 체계 현황과 향후 과제’, 국회입법조사처).

늑장 대응보다 낫다지만 과잉 대응도 일종의 책임 회피다. ‘나는, 우리 부서는 이만큼이나 했으니 문제가 생기면 내 잘못은 아니다’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과잉이 아니라 적정 대응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메르스 사태 이후 지속해서 언급된 전문 인력 확보, 신속한 정보 수집과 정책 공조 등은 별로 나아진 게 없다. 오죽했으면 광주광역시 21세기 병원에 격리된 환자가 창밖으로 생필품이 필요하다는 쪽지를 흔들었을까. ‘실효성 있는 감염병 대응체계 구축으로 제2의 메르스 사태 방지’는 문재인 정부 100대 과제 중 45번째 ‘의료공공성 확보 및 환자 중심 의료서비스 제공’의 주요 목표 아니었던가.

염태정 정책부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