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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 졸업생에게 사진 대신 '만지는 앨범' 선물한 학교

중앙일보

입력

전북맹아학교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본인들의 얼굴을 본떠 만든 모형이 담긴 '3D 촉각 졸업 앨범'을 만져 보고 있다. [사진 전북맹아학교]

전북맹아학교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본인들의 얼굴을 본떠 만든 모형이 담긴 '3D 촉각 졸업 앨범'을 만져 보고 있다. [사진 전북맹아학교]

"(얼굴 모형을) 딱 만졌을 때 헤어스타일만 만져봐도 누군지 알 수 있어서 좋아요."

전북맹아학교, 특별한 졸업식 열려 #박소영양 등 7명 '3D 촉각 앨범' 받아 #각각 얼굴 본떠 만든 얼굴 모형 담아 #美 머서대·탈북인 학교 공동 프로젝트 #학교 측 "'사진 무의미' 고민서 착안"

지난 11일 전북 익산시 석암동 전북맹아학교 강당. 이 학교 고등학교 3학년 시각장애 학생 7명의 졸업식이 열렸다. 전북맹아학교는 시각장애나 지적장애를 가진 유·초·중·고교 재학생 70여 명이 다니는 특수학교다.

이날 졸업식에 참석한 박소영(19·시각장애 3급)양은 "저는 저시력이어서 학급 친구들의 얼굴을 간직하는 데 의미를 둘 수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학교 측이 준비한 '특별한 선물'을 받고 나서다. 박양 등 졸업생 7명은 자신과 급우들의 얼굴을 본떠 만든 '3D(3차원) 촉각 앨범'을 품에 안았다.

자작나무로 만든 액자 안에 졸업생 7명 모두의 얼굴 모형이 담긴 앨범이다. 얼굴 모형마다 그 밑에 졸업생의 한글 이름이 적혀 있고, 점자가 새겨졌다. "손바닥 크기의 얼굴 모형은 하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고, 촉감은 부드럽다"는 게 학교 측 설명이다.

전북맹아학교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지난 11일 이 학교 강당에서 열린 졸업식에서 정문수 교장 직무대리로부터 '3D 촉각 졸업 앨범'을 받고 있다. [사진 전북맹아학교]

전북맹아학교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지난 11일 이 학교 강당에서 열린 졸업식에서 정문수 교장 직무대리로부터 '3D 촉각 졸업 앨범'을 받고 있다. [사진 전북맹아학교]

이 앨범은 전북맹아학교가 지난해 5월부터 미국 머서대학교 스쿨엔지니어링팀(지도 현신재 교수)과 충남 천안에 있는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인 드림학교와 공동으로 진행한 '3D 촉각 졸업 앨범 제작 프로젝트'의 산물이다. 머서대 팀은 지난해 한국에서 드림학교 학생들에게 3D 프린팅 기술을 전수하다가 이를 알게 된 전북맹아학교 측의 제안으로 프로젝트에 동참하게 됐다. 3D 프린팅은 프린터로 종이를 인쇄하듯 3차원 공간 안에 실제 사물을 입체적으로 찍어내는 것을 말한다.

머서대 팀으로부터 3D 프린팅 기술을 배운 드림학교 고등학생들은 지난해 5월과 10월 전북맹아학교를 찾았다. 졸업반 학생들을 만나 스캔 작업을 하고 1차 결과물에 대한 의견을 듣기 위해서다. 스캐너를 이용해 각자의 얼굴을 360도 돌면서 사진을 찍은 뒤 컴퓨터로 '가상 얼굴'을 편집해 3D 프린터로 얼굴 모형을 찍어내는 방식이다. 두상(頭像) 하나를 완성하는 데 평균 10시간가량 걸렸다고 한다.

올해 졸업식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감염증 여파로 가족과 외부인 초청 없이 재학생과 교직원만 모인 가운데 단출하게 치러졌다. 그런데도 '만지는 앨범'을 선물로 받은 졸업생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밝았다.

전북맹아학교 고등학교 3학년 학생 7명이 지난 11일 졸업식을 마친 뒤 이 학교 정문수 교장 직무대리와 함께 '3D 촉각 졸업 앨범'을 들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전북맹아학교]

전북맹아학교 고등학교 3학년 학생 7명이 지난 11일 졸업식을 마친 뒤 이 학교 정문수 교장 직무대리와 함께 '3D 촉각 졸업 앨범'을 들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전북맹아학교]

학생들은 저마다 졸업 앨범을 손으로 만지면서 '이건 누구 얼굴이다' '실물보다 낫네' 등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좋아했다. 김명찬(20·시각장애 1급)군은 "(내 얼굴 모형이) 잘생기게 나온 것 같아 너무 좋다"며 "사진으로 기록돼 있는 것은 (볼 수 없는) 한계가 있는데, (앨범을) 만지면서 3년 동안 함께한 학우들을 기억할 수 있어서 신기하다"고 말했다.

전북맹아학교 김운기(35) 미술 교사는 "미국 대학생과 남과 북의 청소년들이 함께 진행한 프로젝트여서 의미가 더욱 남다르다"고 평가했다. 박소영양은 "드림학교 친구들이 (촉각 앨범을) 만들어준 거라서 의미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이런 프로젝트가 많이 생겨서 전국에 있는 시각장애 학생들이 친구들의 얼굴을 만져볼 수 있고, 특별한 졸업 앨범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대학 합격 소식만큼 감사하다"고 했다.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인 드림학교 고등학생들이 3D 프린팅 기술을 이용해 얼굴 모형을 완성하기 위해 전북맹아학교 졸업반 학생의 얼굴을 스캔하고 있다. [사진 전북맹아학교]

미국 머서대 학생들과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인 드림학교 고등학생들이 '3D 촉각 졸업 앨범'을 만들기 위해 전북맹아학교 졸업반 학생의 얼굴을 스캔하고 있다. [사진 전북맹아학교]
미국 머서대 학생들과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인 드림학교 고등학생들이 '3D 촉각 졸업 앨범'을 만들기 위해 전북맹아학교 졸업반 학생의 얼굴을 스캔하고 있다. [사진 전북맹아학교]

40~50대 '늦깎이 학생' 4명을 제외한 졸업생 대부분이 원하는 대학에 진학해 학교로서도 겹경사를 맞았다. 전북맹아학교에 따르면 박소영양은 전남대 특수교육학과, 김명찬군은 단국대 사학과, 이윤호(19·시각장애 1급)군은 국립대인 한국복지대에 각각 합격했다. "여러 대학에 합격했지만, 각자 꿈과 가정 형편 등을 고려해 대학을 골랐다"고 한다.

정문수(50) 전북맹아학교 교장 직무대리는 "'사진으로만 제작된 졸업 앨범이 우리 (시각장애) 학생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이번 프로젝트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이 학교가 10년 넘게 사진첩으로 된 졸업 앨범을 만들지 않은 이유다. 정 교장은 "시각장애 학생들에게 만질 수 있는 졸업 앨범은 평생 잊지 못할 기념물이 될 것"이라며 "내년부터는 학교에 있는 3D 프린터를 이용해 자체적으로 '3D 촉각 앨범'을 제작해 졸업생들에게 선물할 계획"이라고 했다.

익산=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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