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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하는 말 中 다 듣는다"···스파이 소굴된 '유럽의 심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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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지RG'는 '알차고 지혜롭게 담아낸 진짜 국제뉴스(Real Global news)'라는 의미를 담은 중앙일보 국제외교안보팀의 온라인 연재물입니다.

영국의 정보기관 MI5 소속 첩보요원 이브(왼쪽, 샌드라 오)와 킬러 빌라넬(조디 코머) 주연의 영국 드라마 '킬링 이브'의 포스터. [사진 IMDb]

영국의 정보기관 MI5 소속 첩보요원 이브(왼쪽, 샌드라 오)와 킬러 빌라넬(조디 코머) 주연의 영국 드라마 '킬링 이브'의 포스터. [사진 IMDb]

지난 10일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제 92회 미국 아카데미시상식 작품상을 수상할 때 '물개박수'를 치며 기뻐하던 이 배우를 기억하시죠? 바로 한국계 헐리우드 배우 샌드라 오(49)입니다. 샌드라 오는 비록 이날 시상자로만 참석했지만, 이미 지난 2018년 BBC아메리카가 제작한 드라마 '킬링 이브(Killing Eve)'로 아시아인 최초 골든글로브 텔레비전 부문 드라마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알지RG]

킬링 이브는 영국정보국(MI5) 요원 샌드라 오(이브 역)가 사이코패스 킬러 조디 코머(빌라넬 역)를 쫓는 추격스릴러입니다. 유럽 스파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킬링 이브'를 꺼내든 이유는 이 드라마가 영국·프랑스·독일·루마니아 등 유럽 전역이 전세계 첩보원들의 체스판이 되고 있는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동 이란-사우디 첩보전이 '덴마크'에서

부국강병과 평화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유럽이 첩보 전쟁의 운동장이 되고 있다니, 조금은 생뚱맞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3일(현지시간) 이를 잘 보여주는 뉴스가 나옵니다. 바로 중동의 숙적인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첩보전이 북유럽의 평화로운 복지국가 덴마크에서 펼쳐졌다는 소식이죠.

앤더스 사무엘슨 덴마크 외교장관이 지난 2018년 10월 30일 코펜하겐에서 기자회견을 "이란이 덴마크 내 민간인에 대한 암살을 계획하고 있는 것을 포착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1년 반 뒤 이 민간인들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해온 ASMLA 소속 조직원으로 드러났다. [로이터=연합뉴스]

앤더스 사무엘슨 덴마크 외교장관이 지난 2018년 10월 30일 코펜하겐에서 기자회견을 "이란이 덴마크 내 민간인에 대한 암살을 계획하고 있는 것을 포착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1년 반 뒤 이 민간인들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해온 ASMLA 소속 조직원으로 드러났다. [로이터=연합뉴스]

이야기인 즉슨, 덴마크 보안정보국(PET)이 자국 내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위해 간첩 행위를 한 혐의로 이란 분리주의단체(ASMLA)의 조직원 3명을 체포했다는 것입니다. 덴마크 보안정보국은 이들이 2012∼2018년 사우디 정보기관을 위해 간첩 행위를 했으며, 덴마크 내외에 있는 개인·회사·단체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이를 사우디 정보기관에 전달했다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이들 셋은 지난 2018년 이란 정보 당국이 암살계획을 세웠던 인물로 추정되는데요. 당시 덴마크 정보당국이 이런 움직임을 사전에 포착, "이란 정보기관이 민간인을 공격하려 한다"며 암살을 막았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들 3명이 진짜 사우디를 위해 활동하던 스파이였던 것이죠.

덴마크는 이렇게 중동의 국가 간 갈등이 유럽까지 번져오는 것에 대해 대놓고 유감을 표했습니다. 핀 보치 앤더슨 PET 국장은 "중동 지역 두 나라 사이의 분쟁을 스칸디나비아까지 끌고 온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며 강경한 입장을 내비쳤습니다. 아랍계 뉴스웹사이트인 '더뉴아랍'은 이 소식을 전하며 "덴마크가 테헤란과 리야드 사이에 펼쳐지고 있는 '냉전(Cold war)'의 최전선이 됐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美· 獨 '전지구적 감시망'은 '스위스' 업체 통해

지난 11일 미국의 유력일간지 워싱턴포스트(WP)에 의해 폭로돼 세계를 경악케했던 사건도 있었죠.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독일 연방정보국(BND)이 1970년부터 2018년까지 50년 가까이 세계 각국에 암호장비를 보급, 이를 통해 국가 기밀을 빼내왔다고 합니다. CIA와 BND가 구축한 이 '전지구적 감시망'도 실은 유럽 스위스의 보안장비업체를 통해 이뤄졌습니다.

스위스의 크립토AG 본사. [로이터=연합뉴스]

스위스의 크립토AG 본사. [로이터=연합뉴스]

미 CIA가 스위스 보안장비업체 '크립토AG'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120여 개국을 상대로 첩보작전을 펼쳐 온 것이죠. 크립토AG의 고객 국가 중엔 한국은 물론 이란, 라틴 아메리카 군부 정권, 심지어 교황이 다스리는 작은 국가인 바티칸까지 포함돼 있었습니다.

무려 50년이란 시간동안 120여 개국에 암호장비를 보급, 이 장비를 통해 각국의 기밀을 빼냈다고 하니 보통 심각한 사안이 아니었죠. 이로 인해 스위스는 매우 난처한 입장이 됐습니다. 스위스 정부는 크립토가 CIA와 BND와 연계됐다는 의혹에 대해 이미 지난해 11월부터 조사에 착수한 상태였는데요. 스위스 정부는 이달 초 이 회사의 수출 면허를 취소하는 조치도 취했습니다.

하지만 스위스를 보는 시각은 따갑습니다. WP는 "스위스 정부가 이제와 몰랐던 것처럼 움직이는 것은 이상하다"고 합니다. WP가 입수한 CIA와 BND 문건들에 따르면, 스위스 관료들은 수십년전부터 크립토가 미국과 독일의 정보기관들과 연계된 것을 알고 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즉 스위스 정부는 크립토가 매각된 후 설립된 새로운 회사에서 관련 사실을 폭로하려는 것을 알고 난 뒤에야 개입하고 나섰다는 것이죠.

또 스위스는 CIA가 조작 프로그램을 심지 않은 암호장비를 공급받은 유일한 정부라고 합니다. BBC방송은 "크립토 작전이 폭로되면서 중립국으로서의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는 스위스 내부의 탄식이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유럽 심장 '브뤼셀'은 '스파이의 도시'

사실 유럽 많은 국가 가운데 단연 '스파이의 도시'로 불리는 곳은 바로 벨기에의 브뤼셀입니다. 과거 냉전시대에 독일의 베를린과 오스트리아 빈이 스파이 활동의 핵심 거점이었다면, 이제는 세계 스파이들이 브뤼셀로 모여들고 있다는 의미죠.

 지난 2015년 한국에 부임했던 게르하르트 사바틸 전 주한 유럽연합 대사. [중앙포토]

지난 2015년 한국에 부임했던 게르하르트 사바틸 전 주한 유럽연합 대사. [중앙포토]

브뤼셀이 첩보원들의 소굴이 되다보니 은퇴한 유럽연합(EU) 외교관이 중국 스파이가 돼 논란이 됐던 사건도 있었죠. 헝가리계 독일인 게르하르트 사바틸 전 대사인데요. 그는 1984∼2017년 아이슬란드·노르웨이 등의 EU 대사, EU 대외관계청(EEAS)의 동아시아·태평양국장 등을 지내고 퇴임했습니다. 직후 로비업체에 바로 취업한 뒤 EU의 핵심 경제 정보를 중국에 넘긴 협의를 받고 있습니다.

현재 독일과 벨기에 검찰이 수사를 하고 있는데, 혐의가 확정되면 최대 15년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사바틸 전 대사는 EU대사로 2016년 한국에서 근무하기도 했죠.

"이 도시(브뤼셀)에서 하는 모든 이야기를 중국과 러시아가 듣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하워드 구트먼 전 주EU 미국대사

이미 '유럽의 심장부'인 벨기에 브뤼셀에서 활동하고 있는 러시아와 중국의 첩보요원은 450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는 냉전 시기보다도 많은 수준이라고 하네요. 블룸버그통신은 최근 기사를 통해 "브뤼셀이 스파이 소굴(Den of spies)이 돼가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지난 12일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나토(븍대서양조약기구·NATO) 본부 건물. 이날 이곳에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 이사회 회의가 열렸다. [AP=연합뉴스]

지난 12일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나토(븍대서양조약기구·NATO) 본부 건물. 이날 이곳에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 이사회 회의가 열렸다. [AP=연합뉴스]

그렇다면 전세계 스파이들이 유럽, 특히 브뤼셀이 몰려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브뤼셀을 통해 유럽 국가는 물론, 미국까지 다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브뤼셀에는 EU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본부 등 주요 국제기구가 모여있습니다. 때문에 EU 외 다른 많은 국가들도 외교 및 경제 관련 국제 협상을 진행하기 위해 브뤼셀을 방문해야 합니다.

한 전직 외교관은 "아무리 작은 기관이라도 이 곳에 직원 한 명쯤은 반드시 둬야 한다"며 "정치·군사·안보·에너지를 비롯해 이민까지 거의 모든 이슈가 이곳에서 논의되고 관련 정보가 밀집해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벨기에는 다른 국가에 비해 출·입국에 대한 제한이 크지 않아 브뤼셀을 통해 다른 유럽 국가로 향하는 것이 수월하다 하네요.

김다영 기자 kim.da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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