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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륙을 넘어…오스카, 계획이 있었구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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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3호 19면

‘기생충’ 선택한 아카데미의 정치학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린 지난 9일(현지시간) 밤 미국 LA 돌비<br>극장. 영화 ‘기생충’ 관계자들이 작품상 수상 축하를 위해 함께 무대에 올랐다. [EPA=연합뉴스]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린 지난 9일(현지시간) 밤 미국 LA 돌비<br>극장. 영화 ‘기생충’ 관계자들이 작품상 수상 축하를 위해 함께 무대에 올랐다. [EPA=연합뉴스]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석권은 어떤 맥락에서 볼 수 있을까. ‘트럼프=트럼프 시대’가 내세운 가치에 반발하는 ‘아카데미=할리우드 영화인=미국 진보층’이 트럼프식 이데올로기의 대척점에 있는 작품을 선택하면서 ‘영화적으로나마’ 반기를 든 것은 아닐까.

트럼프 체제와 맞선 할리우드 #지역적 문호 넘어설 필요성 느껴 #“아카데미는 미국 국내 행사일 뿐” #봉준호 감독 인터뷰도 기름 부어 #양극화 쉽게 풀어쓴 작품 손들어줘

최근 몇 년간 아카데미의 선택을 살펴 보면 그게 꼭 허황된 분석만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2017년 작품상 수상작은 ‘문라이트’였다. 트럼프는 2017년 대통령이 되자마자 공공연하게 인종적, 민족적 분리 차별 정책을 내놨다. 무슬림에 대한 반(反)이민 행정명령이 대표적이다. 3114Km에 달하는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라는 행정명령에도 서명을 했다. 트럼프는 후보 시절 여성 성추행 논란은 물론이고 성소수자에 대한 미국 백인 보수층의 경멸적 시선을 의도적으로 대변하곤 했다.

‘문라이트’는 흑인 무슬림 남자 두 명의 동성애를 그린 작품이다. 당시 아카데미 시상식 때에도 이 작품보다는 ‘라라랜드’가 감독상과 작품상을 모두 탈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문라이트’는 거기에 비하면 너무나 변방의 작품이었다. 메이저급도 아닌, 독립영화에 속하는 작품이었다. 실제로 작품상 시상자로 나선 워렌 비티는 ‘문라이트’ 대신 ‘라라랜드’를 호명한 후 이를 번복하는, 아카데미 사상 최대의 촌극을 일으켰다.

2019년의 오스카도 예전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모두들 ‘그린 북’의 작품상 수상을 보다 손쉽게 예측해 냈다. 1960년대 한 흑인 재즈 피아니스트가 차별이 가장 심하다는 미국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순회 공연을 다니고 또 이 뮤지션을 백인 하층의 운전기사가 동행한다는 얘기다. 트럼프 시대의 흑백 갈등은 더욱 고조됐고(이건 사실 오바마 시대 때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이런 애기는 현 시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얘기였지만, 그것을 있을 수 있는 얘기로 전환시키고 싶어하는 할리우드와 아카데미의 선한 욕망이 결국 수상으로 맞아 떨어질 것이라고 사람들은 전망했다. ‘문라이트’든 ‘그린 북’이든 역설적으로 트럼프 시대였기 때문에 더욱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는 얘기는 이쯤 되면 매우 정확한 분석이 된다. ‘기생충’의 아카데미 성취는 그 연장선상에 있으며 일종의 화룡점정이었던 셈이다.

CNN은 시상식 당일 “영어가 아닌 외국어로 제작된 외국 영화가 한 번도 작품상을 탄 적이 없었던 기록을 ‘기생충’이 깰 수도 있다”고 전망했고,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하던 분위기를 급반전시켰다. 더불어 오스카 수상을 예측하는 언론의 기사 중 가장 눈에 띈 대목은 “‘기생충’이 아카데미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카데미가 ‘기생충’을 원하고 있다”라는 부분이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질문이 숨겨져 있다. 아카데미가 ‘기생충’ 같은 작품을 왜 기다렸는가 라는 것과 ‘기생충’ 같은 작품은 도대체 어떤 작품인가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질문과 답에는 전세계적인 문제를 아우르는 함의가 담겨 있다.

흑인·무슬림·독립영화에 문호 개방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일러스트=이정권 gaga@joongang.co.kr

첫 번째 질문의 답에는 아카데미 내부에 트럼프 시대에 맞설 강력한 ‘한방’이 필요하다는 정서가 팽배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카데미는 흑인에게, 무슬림에게, 여성에게, 또 동성애자들에게, 더 나아가 큰 자본의 영화만이 아닌 독립영화에 차례로 문호를 열어 왔다. 하지만 지역까지는 확장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지난 92년간 미국의 아카데미는 미국 대륙을 넘어 서지 못했다.

그런데 그건 상징적으로 트럼프가 오로지 미국만을, 미국인을 위한 미국만을 주창하는 정치적 구호에 갇혀 있는 것과 흡사해 보였다. 상당수의 미국인들은 미국이 세계적 가치를 대변해 왔다고 믿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트럼프의 보수적 장벽’에 갇혀 사는 것에 대해 불안증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여기에 봉준호의 인터뷰가 기름을 부었다. 그는 지난해 10월 미국의 인터넷 영화 매체 ‘벌처’와의 인터뷰에서 아카데미를 가르켜 “국제영화제가 아닌 로컬(미국의 국내 행사)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아카데미는 보다 광범위한 지역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아카데미가 주목한 것은 아시아였으며 아시아 중에서도 영화적으로 가장 뛰어난 한국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는데, 무엇보다 지난해 5월 칸에서 이미 황금종려상을 탄 작품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의 정치적 이해 관계와 ‘기생충’의 요건이 착착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스페인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페인 앤 글로리’ 역시 뛰어난 작품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국제영화상과 남우주연상 후보 정도에 오른 것, 그리고 ‘기생충’에 비해 턱없이 낮은 관심을 모은 이유 역시 그런 까닭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1917’이 감독상은 유력하지만 작품상까지는 아닐 것이라고 내다 봤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아카데미든 봉준호든.

할리우드 보듬은 ‘스피치 봉’

두 번째 질문, ‘기생충’같은 영화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계속되는 질문도 결국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영화의 어떤 점이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았느냐는 것이다.

작품이 성공하는 것은, 그것이 흥행 면이든 평가 면이든, 얼마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동일화’의 시점을 얻어 내느냐에 달려 있다. 저건 내 얘기야, 우리 얘기야 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공감대는 확장되는 셈인데, ‘기생충’은 자본주의의 양극화 문제를 다루되 그것을 대중 장르영화의 기법으로 풀어냈다. 그건 어쩌면 봉준호의 특성이기도 한데, 어려운 사회과학적 이슈나 담론을 장르영화의 대중적 다이얼로그로 전치(轉置)시킴으로써 중학생 정도의 교양을 가진 사람들에게조차 동의와 동조를 끌어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미국 관객들은 외국어 자막을 잘 읽지 않고, 뉴욕이나 LA 등 연안의 국제도시를 제외하고는 매우 보수적이라는 면에서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의 젊은층이 ‘기생충’에 열광하고 있는 것은 그들 역시 2011년 ‘월 스트리트 시위’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지금의 세습 자본주의 체제로서는 미래가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아카데미와 봉준호의 뛰어난 ‘케미’는 ‘쇼 머스트 고우 온(Show must go on)’을 연출해 내며 세상을 향해 희망과 낙관을 보여 줬다는 점에서도 찾아진다. 트로피를 수상할 때마다의 수상 소감은 여전히 회자되고 있을 정도다. 특히 마틴 스콜시즈 옹(翁)의 감격 어린 그 표정이란.

봉준호의 파트너였던 미국 배급사 네온의 대표 톰 퀸의 활약도 주목거리다. 오랫동안 봉준호와 인연을 맺어온 그는 ‘괴물’과 ‘설국열차’ 등 거의 전작품을 미국에 배급한 인물로, 원래는 와인스타인 컴퍼니 출신이다(하비 와인스타인은 굴지의 미국 배급사 대표였으나 여성에 대한 성폭력 등 미투로 몰락했다). 그는 ‘기생충’의 아카데미 마케팅을 위해 4개월 전인 지난해 10월부터 텔루로이드 영화제 등을 순회시키며 봉준호를 혹사시켰다. 미국의 3대 토크쇼로 전국에 방송되는 지미 펠런 쇼에 봉준호를 내보낸 것도 마케팅 전략 중 하나였고, 이는 영화에 대한 인지도를 높이는 매우 중요한 자산이 됐다.

국내 투자배급사인 CJ E&M이 선보인 조직력과 자금력도 평가받을 대목이다. 아카데미 수상 여부는 미국의 대통령 선거 유세와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누가 ‘돈=광고비=마케팅 비’를 가장 많이, 또 효율적으로 썼느냐가 당락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톰 퀸의 ‘귀신 같은’ 전략과 CJ의 ‘백업’이 효과를 발휘했다는 분석이다. 그런 측면에서 CJ의 부회장 미키 리(이미경)의 작품상 수상 스피치는 충분한 자격을 가진 셈이다. 그녀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 누구도 필적하기 어려울 만큼의 영화광으로서 봉준호와 박찬욱 등 국내 작가주의 감독들을 일찌감치 후원해 온 인물이기 때문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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