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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관범의 독사신론(讀史新論)

20세기 초 한국·중국 연결한 ‘혁명의 아이콘’ 임경업 장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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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300년 만에 부활한 조선의 명장

조선 후기 임경업 장군은 바다의 신으로 불렸다. 서해 연평도에 그를 모시는 사당 충민사가 있다. 풍어제가 열린 충민사. [사진 옹진군청]

조선 후기 임경업 장군은 바다의 신으로 불렸다. 서해 연평도에 그를 모시는 사당 충민사가 있다. 풍어제가 열린 충민사. [사진 옹진군청]

1928년 8월 2일 새벽, 젊은 기자 하나가 황해도 해주 용당포를 떠나는 작은 기선에 올라탔다. 기자의 이름은 김동진. 그는 유년기에 러시아 항구 도시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 그곳에서 성장했다. 러시아 극동대학에서 수학했고 조선에 돌아와 신문사에 입사했다. 어느 날 신문사는 ‘섬에서 발견한 조선’이라는 테마로 도서 순례 연재를 기획했다. 이윽고 김동진의 차례가 왔다. 고군산도·거제도·거문도·진도·완도·하의도 방면은 이미 다녀왔다. 그가 갈 곳은 연평도·대청도·백령도 같은 황해도 앞바다의 섬. 그다음 차례 울릉도와 독도에 이르러 연재는 끝나고 만다.

청나라와 맞선 지조와 충절 상징 #서간도 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둥 #중국 혁명세력도 한국지사 도와 #양국의 미래 관계를 비추는 거울

연평도는 조기잡이로 유명한 섬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보면 봄과 여름에 여러 곳에서 고기잡이배들이 연평도에 몰려와 조기를 잡는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일까? 김동진은 연평도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임경업(1594~1646) 장군을 모신 사당 충민사를 찾았다.

조기잡이와 임경업? 사연은 이렇다. 연평도에 전해오는 전설에 따르면 임경업은 만주족 청나라와 맞싸우기 위해 비밀리에 바다를 건너 명나라를 향하는 뱃길에 연평도에 와서 섬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조기 잡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후 연평도 어민은 임경업 장군을 위해 치성을 다 하게 됐는데, ‘연평 삼일’이란 말처럼 조기 철에도 조기가 사흘밖에 잘 잡히지 않는 예측하기 어려운 불운을 회피하려는 신앙이었다. 지금은 조기잡이가 사라지고 꽃게잡이가 성행하면서 풍어굿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한·중 공동매체 ‘향강잡지’ 창간한 김규흥

사당 내부. [사진 옹진군청]

사당 내부. [사진 옹진군청]

바다의 신 임경업. 어업의 신 임경업. 연평도의 임경업 신앙은 점차 여러 섬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황해·경기·충청도의 서해안 일대에 전해지는 임경업 설화는 조선 후기의 새로운 해양 문화로 생성된 임경업 신앙의 확산을 뜻하는 것이었다.

사실 임경업은 청나라의 요구로 금주(錦州)의 명나라 군대를 치러 조선군이 파견될 때 조선 수군의 장수였으니 생전에 수군의 장수가 사후에 바다의 신이 된 것이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전직 조선 수군 장수가 서해를 건너 명나라로 탈출해 청나라와 항전했던 일, 청나라와 맞서다 체포되고 귀국 후 옥사했으나 사후 충절을 인정받은 일, 그는 서해의 영웅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임경업 장군 초상. [사진 옹진군청]

임경업 장군 초상. [사진 옹진군청]

그런데 임경업 신앙은 바다가 아니라 육지에도 있었다. 1913년 12월 홍콩에서 발행된 잡지 『향강잡지』에는 박은식이 지은 ‘한국 교포의 임 장군 제사에 관한 기문(韓僑祭林將軍記)’이라는 흥미로운 글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글에 따르면 서간도의 조선 농민 사회에는 매년 봄·가을 중달이 되면 임경업에 관한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있었다. 임경업에 관한 자세한 역사 지식이 없는 소박한 농민이지만 임경업의 충의로운 큰 절개를 알기 때문에 성심껏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일찍이 조선 후기 정조 임금은 국난기 조선의 충신·열사에 대한 보훈의 차원에서 임경업의 실기(實記)를 간행하도록 했고, 민간 사회에서는 방각본 소설 『임장군전』이 읽혔으니 조선 농민 사회에 임경업이 그리 낯설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압록강 남쪽 조선에서의 임경업이 아니라 압록강 북쪽 서간도에서의 임경업이었다. 조선 농민이 서간도에 흘러들어와 이곳에서 임경업이 부활한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을까.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만주족인 청나라가 쓰러지고 이민족의 지배에 신음하던 중국이 광복을 맞이한 이때, 명나라가 멸망하는 그 날까지 중국에서 명나라를 돕고 청나라와 싸웠던 조선의 임경업이 서간도에서 부활했다니…. 신해혁명에 따른 중국의 광복은 어쩌면 조선 임경업 장군의 오랜 의지와 소원이 이뤄진 결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한·중 양국의 지사가 서로가 서로에게 임경업이 될 수만 있다면 중국의 광복에 이어 한국의 광복도 머지않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김규흥이 1913 년 창간한 ‘향강잡지’

김규흥이 1913 년 창간한 ‘향강잡지’

중국 혁명가들과 교류한 김규흥

중국 혁명가들과 교류한 김규흥

『향강잡지』를 창간한 김규흥은 그러한 마음으로 중국의 광복을 위한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대한제국기에 중국에 건너가 상하이(上海)와 난징(南京)에서 중국의 혁명파 세력과 폭넓게 교유했다. 신해혁명 당시에는 광둥(廣東)에서 혁명파가 세운 군 정부에 있었다. 그는 재중 한국 독립운동의 큰 그림으로 한중 합작의 언론기관 설립에 뜻을 두었는데, 자신은 인쇄기를 구입하고 광둥 혁명파는 언론사 재정을 분담하는 방식으로 일을 추진하면서 미국의 안창호에게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한·중 합작 매체 『향강잡지』는 그러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향강잡지』 창간호에 실린 서간도 임경업 이야기는 홍콩에서 발신한 한·중 미래에 관한 기대감의 표현이었다.

독립운동가 박은식

독립운동가 박은식

두 나라의 미래를 연대한다는 것. 신해혁명 직후 중국의 혁명파는 한인 독립지사를 환대했고 한인 독립지사는 여기에 고무돼 있었다. 신규식은 혁명파로부터 영원히 휴척(休戚·편안함과 근심됨)을 함께하자는 말을 들었고, 박은식은 혁명파를 만나 즐거워 잠이 오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신규식과 박은식이 설립한 동제사(同濟社)의 말뜻은 한 배를 타고 함께 물을 건넌다는 것인데, 한인 지사끼리 서로 돕고 지낸다는 의미도 있지만 한인 지사와 중국 지사가 서로 돕고 지낸다는 의미도 있었다.

한국 독립운동가를 도운 중국 혁명가 천치메이. [중앙포토]

한국 독립운동가를 도운 중국 혁명가 천치메이. [중앙포토]

이때 중국 혁명파 천치메이(陳其美)를 맞는 동제사의 환영사를 짓느라 정인보와 홍명희가 끙끙대자 정인보가 형님이라 부르는 박은식이 보다 못해 그것을 가로채 일필휘지로 명문을 작성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천치메이는 한국·월남·인도의 혁명 지사를 돕고 한인 유학생 학비도 보조한 인물이었다. 신규식을 만나 한국 독립을 선전할 역사책이나 전기물, 그리고 잡지를 발간하도록 인쇄 기계를 대여해 주겠다는 제의를 한 적도 있었다.

한국의 미래와 중국의 미래가 함께 가고 있다고 믿었기에 신생 중화민국의 앞날은 『향강잡지』의 지대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혁명 이후의 중국은 어떤 상황인가. 혁명의 기쁨에 취해 있다가 깨어나면서 자각된 중국의 현실은 낙관적이지 않았다.

중국인 움직인 박은식은 ‘20세기 임경업’

잡지의 논조는 다소 격앙돼 있었다. 민국 초기가 청나라 말기보다 더 열악한 상황임을 아는가 모르는가. 왕정이냐 공화정이냐보다 성공한 공화국이냐 실패한 공화국이냐가 더 중요한 물음임을 아는가 모르는가. 공화시대에는 주권이 만민에게 있으니 민국의 정치적 주체로서 민의 기운(民氣)과 민의 도덕(民德)을 제고해야 하지 않겠는가. 혁명 이후의 진정한 새 나라 만들기는 정권 다툼이 아니라 사람 교육에 있지 아니한가.

어려운 시기였다. 1911년 후베이성(湖北省) 무창(武昌·지금의 우한)에서 시작한 혁명의 불길은 중화민국 총통 위안스카이(袁世凱)에 의해 꺼져가고 있었다. 1913년 남북전쟁으로 혁명파를 진압한 그는 이듬해 중화민국 국회를 해산시켰다.

그러나 박은식은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그는 “이 나라가 발달하는 날이 곧 우리들의 목적이 도달하는 때”라 굳게 믿었지만 중화민국의 단기적인 발전을 전망하지는 않았다. 그는 여전히 중국보다 가까운 이웃은 없으며 혁명 후 시련을 겪고 있는 이때야말로 중국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중국의 위기가 가파르게 상승했다. 독일에 선전포고한 일본은 독일의 중국 조차지를 점령하고, 이를 지렛대로 삼아 중국에 굴욕적인 이권 침탈을 자행하는 조약을 강제했다. 이렇게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던 때에 박은식의 『한국통사』가 상하이에서 출판돼 많은 중국인의 마음을 얻었다.

일본에 병탄된 대한제국의 국망은 중화민국의 위기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그는 중국인을 만나면 필담을 나누고 이 거울을 선물했다. 이민족의 고국 침략에 순응하지 않고 중국 대륙에 건너와 이민족의 중국 침략에 맞싸우고 있는 그는 어느 의미에서 20세기 임경업이었다.

요즈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방역 때문에 걱정이 많다. 폐렴 바이러스도 문제지만 혐오 바이러스도 문제다. 지난 세기 한·중 양국의 역사에서 선린의 추억을 되새기며 재난을 당한 이웃을 돕는 방안을 강구해 본다.

노관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