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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서 일본 간 입춘 전날 콩뿌리기, 두 나라의 차이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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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양은심의 도쿄에서 맨땅에 헤딩(40)

TV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보면 요정에 게이샤로 잠입한 의병 소아가 조선인임이 발각되는 장면이 나온다. 대화 중에 ‘입춘’이라는 말이 나오고 일본군은 문득 궁금하다는 듯 소아에게 묻는다. “너는 올해 콩을 몇 개 먹을 거냐?”라고. 은근히 마음에 든 소아의 나이를 떠보는 것이었다.

일본의 풍습을 몰랐던 소아는 “콩을 좋아하니 배불리 먹어야 할까요? 한 백 개?”라고 대답한다. 일본군은 이를 이상히 여기게 되고 조선인임을 확신한다. 요즘처럼 평화로운 시대였으면 나이를 불려서 말하는 여자도 있느냐고 웃어넘길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시대가 시대다.

일본에는 입춘 전날에 볶은 콩을 뿌려 잡귀를 쫓은 후, 나이 숫자만큼 콩을 먹는 풍습이 있다. 중국에서 시작한 것으로 아스카(飛鳥) 시대 문무 천황(文武, 683~707) 때 전해졌다고 한다. 배 이외에는 교통수단도 없었고 정보통신 수단도 없었던 시대라 한반도를 통해 전해졌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한반도에도 입춘을 맞이하는 세시 풍습이 있었다. 입춘을 한 해의 시작으로 여겼던 농경사회. 입춘 전날 밤, 볶은 콩을 방이나 문에 뿌리며 잡귀를 쫓아내고 새해를 맞이했다. 이를 ‘해넘이’라 했다고 한다. 얼마나 이쁜 말인가. 자꾸만 중얼거리고 싶어진다.“내일이 입춘이다. 오늘 밤은 해넘이 해야지.” 이런 대화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빨간 도깨비 파란 도깨비. '입춘대길'. 굳이 붓글씨가 아니어도, 한자가 아니어도 크리스마스 리스처럼 장식할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진 양은심]

빨간 도깨비 파란 도깨비. '입춘대길'. 굳이 붓글씨가 아니어도, 한자가 아니어도 크리스마스 리스처럼 장식할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진 양은심]

해넘이 풍습은 사라지고 없으나 입춘을 맞이하는 풍습은 남아있다. 지금도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고 써서 붙인 집을 종종 볼 수 있다. 다시 콩을 뿌리는 해넘이풍습을 되살릴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입춘을 맞이하는 풍습만큼은 소중히 이어가고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입춘대길’. 굳이 붓글씨가 아니어도, 한자가 아니어도 좋지 싶다.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장식할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꽃구경과 단풍놀이 이외에도 사계절이 있는 나라에서 태어난 재미를 톡톡하게 봤으면 좋겠다. 모든 절기를 즐기지는 못하더라도 이 시대 나름의 방법으로 선조의 세시 풍속을 이어갈 수 있었으면 한다.

옛 모습을 고집하자는 것이 아니다.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도 될 것이고, 캘리그래피로 멋스러운 ‘입춘대길’을 써도 좋겠다. 톡톡 튀는 색으로 봄맞이 말을 쓰거나, 장식품을 만들면 어떨까. 수를 놓아도 좋다. 공방 등에서 팔아도 좋겠다. 내가 만들 수 없다면 파는 것을 하나 마련해 매해 입춘 때마다 꺼내어 장식하면 되지 않을까?

점점 길어지는 평균수명. 100세 시대이다. 놀거리를 찾아야 한다. 소소한 일상을 즐기는 데 절기만큼 좋은 게 없음을 나이 들면서 알아가고 있다. 깜박하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절기다. 이런 말을 하는 나도 하루하루 해야 할 일에 쫓기며 사는지라 잊고 산다. 정신 차려보니 벌써 2월이다. 그래도 다짐해 본다. 사계절이 있는 나라에 살면서 절기라는 것을 깡그리 잊고 살지는 말자고.

서양에서 들어온 풍습을 성대하게 즐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동안 익숙해져서인지 서양 풍습으로 노는 것이 왁자지껄 신이 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조상이 남긴 풍습처럼 소중한 것도 없다. 문화가 재산이 되는 시대. 오리지널이 평가받는 시대. 우리의 풍습을 더 잃어버리기 전에 남의 나라 것을 흉내 내는 열정의 반만이라도 쏟았으면 한다. 유치원에서 초등학교에서. 어버이날 카네이션 만들 듯 봄맞이 굿즈를 만들어 보자. 개인으로든 단체로든, 우선 시작해보자.

제주도에는 ‘탐라국 입춘굿’이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라진 입춘굿을 1999년 제주민예총이 중심이 되어 오늘에 맞게 복원하여 이어가고 있는 행사이다. 사물놀이패의 의상은 보기만 해도 어깨를 들썩이고 싶어진다. 사물놀이패 의상을 만들어 입고 참가해도 좋겠다. 덩더쿵 얼쑤! 따닥!!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콩을 몇 개 먹을 거냐'를 물어서 나이를 짐작하는 장면이 나온다. 콩을 뿌린 후 나이 숫자만큼 콩을 주워 먹는데, 잡귀를 쫓아낸 콩을 먹어버림으로써 완벽하게 잡는다는 의미가 있다. 사진은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속 한 장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콩을 몇 개 먹을 거냐'를 물어서 나이를 짐작하는 장면이 나온다. 콩을 뿌린 후 나이 숫자만큼 콩을 주워 먹는데, 잡귀를 쫓아낸 콩을 먹어버림으로써 완벽하게 잡는다는 의미가 있다. 사진은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속 한 장면.

다시 ‘미스터 션샤인’에 등장한 콩 뿌리기로 돌아가 보자. ‘콩을 몇 개 먹을 거냐’라고 물어 나이를 짐작하려 했다. 한반도에서는 콩을 뿌린 후 먹었다는 이야기는 없는데, 일본에서는 콩을 뿌린 후 나이 숫자만큼 콩을 주워서 먹는다. 이는 잡귀를 쫓아낸 콩을 먹어버림으로써 완벽하게 잡는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일본식으로 변화했다. 그 옛날 중국에서 시작됐다는 ‘콩 뿌리기’는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와 2020년 현재에도 각 가정의 세시풍속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제 일본의 것이 되었다. ‘중국에서 시작한 것’이라고,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이라고 말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버린 자’와 ‘품은 자’의 차이는 확연하다.

풍습이라는 것은 변해간다. 모두가 다 콩을 먹지는 않는다. 20년 전쯤부터 도쿄에도 김밥처럼 생긴 두툼한 ‘에호마키’가 등장했다. 오사카에서 시작되었다는 이것은 상업전략을 통해 도쿄에 떡하니 정착했다. 어린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콩 뿌리기를, 어른들만 있는 집에서는 에호마키를 사다 먹으며 저녁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을 간단히 살 수 있다. 일본의 장사꾼들은 풍습을 유지하는 데에 단단히 공헌하고 있다.

한일출판번역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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