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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 대기자의 퍼스펙티브

은퇴 시기 늦출수록 더 받는 구조로 확 바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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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배명복
배명복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마크롱의 연금 개혁 드라이브

프랑스 정부의 연금 개혁에 반대하는 각종 노조 단체 조합원들이 지난달 16일 파리 시내에서 의 시위를 벌이고 있다. 지난해 12월 5일 총파업으로 시작된 이번 사태는 1968년 이후 최장기 시위로 기록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프랑스 정부의 연금 개혁에 반대하는 각종 노조 단체 조합원들이 지난달 16일 파리 시내에서 의 시위를 벌이고 있다. 지난해 12월 5일 총파업으로 시작된 이번 사태는 1968년 이후 최장기 시위로 기록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인 시시포스는 신들을 속인 죄로 무거운 바윗돌을 산 정상까지 밀어 올리는 벌을 받는다. 정상이 가까워지면 바윗돌은 어김없이 산 아래로 다시 굴러떨어진다. 아무리 애써봐도 끝내 완성에 이르지 못하는 무한한 헛수고가 ‘시시포스의 바위’다.

복잡하고 불평등한 연금 체계 #국가연금 체계로 일원화 #지출은 줄이고 수입은 늘려 #연금 재정 안정과 지속성 도모

프랑스의 연금 개혁은 시시포스의 바위다. 1990년대 이후 모든 정권이 연금 개혁을 시도했지만, 근로자들의 거센 반발과 저항에 밀려 하나같이 성공하지 못했다. 1993년 프랑수아 미테랑에서 2003년 자크 시라크, 2010년 니콜라 사르코지, 2013년 프랑수아 올랑드까지 좌우를 막론하고 역대 대통령 모두 연금 개혁의 칼을 빼 들었지만, 다 용두사미(龍頭蛇尾)로 끝나고 말았다. 땜질 처방에 그쳤을 뿐 근본적 개혁에는 실패했다.

42세의 젊은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이 다섯 번째 도전에 나섰다. 지난해 12월 5일부터 시작된 총파업으로 전국의 열차와 지하철이 멈춰 서고 도시마다 격렬한 반대 시위로 몸살을 앓았지만, 그는 되레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지난달 24일 국무회의에서 연금 개혁법안을 의결해 국회에 넘겼고, 다음 주부터 하원 심의가 시작된다. 마크롱은 시시포스의 운명을 깨고 연금 개혁에 성공한 첫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악화하는 프랑스 연금 재정

프랑스의 공적 연금은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세대 간 연대’에 기초한 부과 방식으로 재정을 운영한다. 프랑스 근로자들은 매년 소득의 28%(본인 부담 17%, 사용자 부담 9%)를 은퇴 세대 부양비(분담금)로 내고, 그 돈으로 그해 연금 재원을 충당한다. 이에 비해 한국의 국민연금은 가입자가 은퇴 후 받을 연금을 보험료로 미리 쌓는 적립 방식이다.

경제 상황이 좋고, 인구 구조가 안정적이라면 부과 방식은 이상적인 연금 제도다. 하지만 프랑스처럼 저성장·고실업 구조가 고착하고, 인구 노령화 현상이 심화하면 연금 재정이 불안정해지고, 지속성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갑자기 분담금을 올리거나 연금 지급액을 줄일 수 없기 때문에 모자란 돈은 정부가 세금으로 메꿔야 한다.

은퇴자 1명당 현역 근로자 수가 2002년 2.1명에서 1.7명으로 줄어들면서 2018년 프랑스는 29억 유로(약 3조7600억원)의 연금 재정 적자를 기록했다. 이대로 가면 2025년에는 적자가 최대 172억 유로(약 22조2900억원)까지 불어나 국내총생산(GDP)의 0.7%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서둘러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재정이 파탄 나거나 연금 제도 자체가 붕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연금개혁

프랑스 연금개혁

42가지 복잡다단한 연금 체계

프랑스의 공적 연금 체계는 복잡하기 짝이 없다. 직종과 직군별로 별도의 연금 계정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간 기업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한 일반 연금 외에 농민 연금, 자영업자 연금이 있고, 공무원이나 공기업 종사자들을 위한 분야별 특수 연금 체계가 있다. 변호사 같은 자유전문직도 마찬가지다. 같은 공기업이라도 국영철도공사(SNCF), 파리교통공사(RATP), 전기·가스공사(EDF·GDF)는 또 별도다. 광원, 어민, 선원, 간호사 등도 제각각 연금 제도를 갖고 있다. 프랑스에 있는 연금 체계를 다 합하면 42종에 달한다.

연금마다 재정 상황은 천차만별이다. 정년도 다르다. 보통 62세로 되어 있지만, 고위험 직군으로 분류된 RATP 경우 기술직은 57세, 운전직은 52세다. 실제 은퇴 연령이나 연금 수준은 연금 체계마다 다르다. 실제 은퇴 연령이 63세인 일반 연금 가입자의 월평균 연금액은 1260~1410유로지만, 공무원은 61.3세에 은퇴해 2206유로를 받는다. 55.7세에 은퇴하는 RATP 직원들은 3705유로를 받는다.

프랑스 전체 연금수급자 1700만 명 중 약 400만 명이 공공 분야 은퇴자들이다. 연금 재정 적자의 상당 부분이 은퇴는 일찍 하고, 연금은 많이 받는 공공 부문에서 발생하고 있다. 복잡하고 차별적인 연금 체계는 직종 간 자유로운 이동을 제약하고, 공공 부문의 비대화와 철밥통 구조를 존속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게 마크롱의 판단이다.

연금 개혁의 세 가지 축

마크롱은 복잡한 연금 체계를 하나로 통합해 국가연금 체계로 단일화할 방침이다. 또 직종이나 직군과 관계없이 평생 적립한 포인트를 은퇴 시점에 돈으로 환산해 연금액을 정하는 포인트제를 도입할 계획이다. 분담금을 많이 낼수록 적립된 포인트가 많아져 연금액도 늘어난다. 은퇴할 때까지 적립한 포인트에 은퇴 시점의 포인트 가치(예컨대 1포인트=1.3유로)를 곱해 연간 연금액을 산출하고, 이를 12개월로 나눠 매달 사망할 때까지 지급한다는 것이다. 포인트의 가치는 매년 연금 재정 상황과 인구 구조, 경제 상황 등을 고려해 연금관리위원회가 결정한다.

현재 일반 연금은 생애 소득 중 가장 많은 25년 치 평균임금을 기준으로 연금액을 산정하지만, 공공 부문 종사자들은 은퇴 전 6개월간 평균 소득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 결과 일반 연금 가입자는 은퇴 직전 소득의 약 50%를 연금으로 받지만, 공공 부문 종사자는 75%를 받는다. 포인트제 도입을 통해 이런 차별성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은퇴 기준 연령(일단 64세)의 도입이다. 법정 정년(62세)에 도달했더라도 기준 연령 이전에 은퇴하면 1년 당 연금액을 5%를 감액하지만, 기준 연령 이후에 은퇴하면 1년 당 5%를 증액한다. 은퇴 시기를 늦출수록 유리한 구조로 바꾼다는 것이다. 그러면 연금 지출은 줄어들고, 재원은 늘어나기 때문에 연금 재정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는 얘기다.

공공 부문 근로자들의 반발

연금 개혁으로 손해를 볼 것으로 예상되는 공공 부문과 특수직 종사자들의 반발이 가장 심하다. 특히 포인트제와 은퇴 기준 연령 도입에 대한 우려가 크다. 사실상 정부가 포인트의 가치를 결정하기 때문에 재정 형편이 어려워지면 연금액이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손해를 안 보고, 제 연금을 받기 위해서는 기준 연령까지 일해야 하므로 실질적으로 정년이 62세에서 64세로 늦춰지는 거나 마찬가지란 불만도 크다. 마크롱 정부는 노사정 합의와 국회 동의를 포인트 가치 결정과 기준 연령 도입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했지만, 반발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임금 수준이 높지 않은 교사나 연구소 종사자들은 물론이고 고위험 직군 종사자들의 불만도 크다. 연금 재정 형편이 좋아 적립금을 많이 쌓아놓고 있는 변호사, 공증인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은 마크롱의 개혁안은 ‘강탈 행위’라고 반발하고 있다. 마크롱 정부는 경찰, 항공기 승무원, 철도 기관사, 소방관, 교도관, 트럭운전사, 어민, 교사 등 8개 직종에 대해서는 별도 기준을 마련해 손해가 없도록 하겠다며 한발 물러섰지만, 연금 제도 단일화 원칙을 훼손하면서까지 그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2037년 전면 시행이 목표

마크롱 정부는 2025년부터 새로운 제도를 시행하되 1975년 이전에 태어난 사람에 대해서는 현행 제도를 그대로 적용할 방침이다. 75년생 근로자가 62세 정년에 이르는 2037년에 가서야 단일 연금 제도로 100% 전환된다는 것이다. 그사이에 은퇴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과도기적으로 2025년 이전까지는 현행 방식, 2025년 이후부터는 새로운 방식을 적용한 이중 연금 제도를 운용할 계획이다. 중장기적 관점에서 부작용과 혼란을 최소화해 연착륙을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연금 개혁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발등의 불이다. 당장 어렵다고 미루는 것은 현세대가 후세대에 짐을 떠안기는 꼴이다. 저출산·고령화, 저성장·고실업, 4차 산업시대 진입 등으로 연금 재정의 악화는 불가피하다. 좀 더 내고, 좀 덜 받는 쪽으로 제도를 바꿔 연금 재정의 안정과 지속성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 프랑스와 방식은 다르지만 한국의 연금 제도도 결국은 재정 고갈 문제를 피하기 어렵다. 제도의 변경 가능성까지 포함해 마크롱의 연금 개혁 드라이브를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다.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