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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떼러가면 혹 붙이는 규제귀신…정권 세번 바뀌어도 그대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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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규제 샌드박스 처리 기간이 2~3개월이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일 년도 더 걸립니다.”

약사 상담 뒤 약 주는 ‘화상투약기’ #특허 출원했지만 8년간 규제 묶여 #작년 샌드박스 신청, 심의도 안돼 #“규제와 전쟁? 공무원은 안 변해”

6일 서울 금천구 가산동의 사무실에서 만난 박인술(58) 쓰리알코리아 대표(약사)는 “심의위원회 상정을 놓고 9월에는 국감을 앞둬서 안 되고, 연말에는 총선을 앞둬 어렵다고 하더라”며 “올해 상반기는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8년 전 화상투약기를개발했지만 대한약사회의 반대와 정부 규제에 가로막혀 사업을 철회한 쓰리알코리아는 지난해 1월 규제 샌드박스의 문을 두드렸다. 국회에 계류 중인 ‘약사법 개정안’ 통과를 바라느니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2년간 ‘규제 특례’를 받는 게 빠르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5월에 정식 접수된 안건은 현재까지 심의에도 오르지 못하고 있다. 개발 당시 중국 수출까지 노린 ‘신상 아이템’이었던 화상 투약기는 5~6년 전에 벌써 중국에 기술력이 역전됐다. 중국의 투약기는 인공지능(AI)이 약품 선택을 도와주는 수준이다.

심야·공휴일에도 의약품 구입 가능

서울 가산동 사무실에서 박인술 쓰리알코리아 대표약사(왼쪽)가 화상투약기를 소개하고 있다. 화상투약기는 심야나 공휴일에도 약사와 화상 통화를 통해 약을 구입할 수 있는 기기다. 김경진 기자

서울 가산동 사무실에서 박인술 쓰리알코리아 대표약사(왼쪽)가 화상투약기를 소개하고 있다. 화상투약기는 심야나 공휴일에도 약사와 화상 통화를 통해 약을 구입할 수 있는 기기다. 김경진 기자

쓰리알코리아의 화상투약기는 자판기 형태지만 소비자가 약을 직접 선택할 수는 없다. 소비자가 약사와의 화상 통화로 증상을 말하면 약사가 원격으로 소비자에게 필요한 약을 자판기를 통해 떨어뜨려 주는 시스템이다. 심야 시간이나 공휴일에도 일반 의약품을 살 수 있다. 박 대표는 2011년 해당 제품에 대한 특허를 출원했다. 하지만 대한약사회의 반대에 보건복지부가 ‘위법하다’는 유권해석을 내리면서 사업을 접어야 했다.

정부는 화상 투약기 판매를 허용하는 약사법 개정안을 발의하면서 되려 ‘독소조항’을 넣었다. 약국 개설자(약국 주인)만 화상 투약기를 통해 약을 판매할 수 있다는 조항이다. 이에 대해 박 대표는 “화상 투약기는 약국이 심야나 공휴일에 문을 닫는 동안 관리 약사가 화상을 통해 약을 판매하게 하자는 취지인데 이를 전면 부인하는 조항”이라며 “정부는 풀어주는 것처럼 하면서 새 규제 하나를 끼워 넣어 기존의 모든 것을 무력하게 만드는 그야말로 규제의 귀신”이라고 말했다.

규제 샌드박스서도 당국 ‘갑 of 갑’

화상 투약기 내부에 카메라와 온도 조절 시스템을 설치해 안전성을 높였다. 김경진 기자

화상 투약기 내부에 카메라와 온도 조절 시스템을 설치해 안전성을 높였다. 김경진 기자

규제 샌드박스의 처리 과정은 규제 당국이 사사건건 개입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현재 정보통신기술(ICT) 규제샌드박스 운영 절차에 따르면 전 과정의 주체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관계기관, 심의위원회로만 돼 있다. 박 대표는 “심의 전 단계인 논의 과정에서 주무 부처인 과기부와 관계 부처인 복지부만 참여하고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사업자는 배제돼 있다”며 “뒤늦게 사안을 들여다본 과기부의 논리가 몇 년 동안 반대 입장을 고수하며 반대 논리로 무장한 복지부에 먹힐 리가 있느냐”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쓰리알코리아는 심의도 오르기 전에 규제부터 받았다. 복지부가 화상투약기에서 판매할 수 있는 효능품목군을 10여 개로 제한한 것. 박 대표는 “기업 입장에서도 당장 시작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규제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쓰리알코리아가 화상투약기를 개발한 이후 정권이 세 번 바뀌었다. 세 정부 모두 규제와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일선 공무원의 일하는 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박 대표는 “공무원 입장에선 적극 행정을 했을 때 보호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없는 문제도 끄집어내 해결한 뒤 사업을 승인하려고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스타트업은 빠른 출시, 빠른 시장 점유율 확보가 생명”이라며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 나중에 규제가 풀려 대기업이 들어오면 우리의 노력이 ‘희생 플라이’가 되는 게 아닐까 두렵다”고 말했다.

김경진 기자 kjin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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