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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하나' 불안함, '휴먼 SF' 열풍 부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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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문단의 SF(공상과학소설) 장르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지난해 출간된 김초엽(27) 작품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지금까지 13쇄, 총 6만부를 발행했다. 그동안 국내 작가의 SF물은 보통 1만권 넘게 팔리기 쉽지 않았던 점을 고려하면 이변에 가까운 성적이다.

출간과 판매 모두에서 SF의 실적은 상당하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지난해 SF는 총 105권이 출간돼 2005년 30권에 비해 3배가 됐다. 지난해 대비 판매 신장률은 2018년 117%, 지난해 36%로 판매량은 지난해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는 지난해 11월부터 3개월 동안 SF 판매량이 1년 전 같은 기간의 1.7배로 늘었다.

SF 써서 먹고 살 수 있는 시대

인간과 과학 기술의 만남을 표현한 이미지. [사진 허블]

인간과 과학 기술의 만남을 표현한 이미지. [사진 허블]

중·단편 모음집『진화 신화』, 장편 소설 『7인의 집행관』등을 쓴 ' 김보영(45) 작가는 영어권 최대 출판사 중 하나인 하퍼 콜린스와 지난해 계약해 내년 중ㆍ단편 3편( '저 이승의 선지자''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2') 을 영어 번역 출간한다. 김초엽이 “존경하는 작가”로 꼽은 김보영 작가는 10년 넘게 SF 문학을 써온 작가다.

김보영 작가는 “독자는 계속 있었다. 상과 출판사의 역할이 컸다”고 했다. “10여년 전만해도 SF 관련 상은 있었다가도 없어졌고, 상을 받아도 책으로 낼 수 없었다.” 실제로 김 작가가 당시 가지고 있던 한권 분량의 원고는 SF 문학 관련 상을 받고 6년 후에나 정식 출간할 수 있었고, 그 상은 3년 진행된 후 사라졌다.

하지만 최근 SF 문학상이 다시 자리를 잡고, 출판사들 출간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올해로 4회째인 한국과학문학상, 2014년 시작한 SF어워드, 같은 해에 어린이ㆍ청소년 과학소설을 대상으로 시작한 한낙원 문학상 등이 대표적이다. 장르소설을 중심으로 스토리를 모으는 온라인 커뮤니티 ‘안전가옥’에는 SF소설 창작자들이 모여들고 있고 동아시아출판사는 SF소설만 전문으로 내는 출판 브랜드 ‘허블’을 2017년 설립했다. 김보영 작가는 “SF 작가들이 SF를 써서 먹고 살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했다.

오랫동안 외국 SF 소설을 찾아 읽었던 독자 입장에서는 이제 양질의 한국 SF소설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됐다. 서울SF아카이브 대표이자 한국SF협회장인 박상준은 “미지의 것에 끌리는 사람들은 늘 있었다. 내 경우에도 1980년대 초까지는 완역본 SF를 찾아 읽을 수 있었지만 90년대부터는 새로운 출판이 거의 안 됐다. 그 시절 매니어들은 원서를 찾아봐야했다”고 했다.

이제는 수작을 내는 SF소설 작가들이 늘어났다. PC통신 시절부터 SF를 쓰던 듀나로 시작해 정세랑, 배명훈, 정소연, 박성환, 김창규 외에도 늘어난 공모전을 통해 신진 작가들이 데뷔하고 있다. 박상준 대표는 “최근 SF 공모전 심사를 했는데 예심 단계에서 탈락한 작품 중에도 아까운 수작이 많다”고 했다. 김보영 작가는 “한 공모전에서는 웹소설 부문 대상작을 찾다가 숫자가 너무 많아서 집계할 수 없었을 정도”라고 했다.

폭발 시점은 ‘인간’에 집중했을 때  

SF소설의 붐은 과학보다 인간에 방점이 찍힌 시점과 맞물렸다. 김초엽의 책을 낸 허블의 한성봉 대표는 “휴머니즘, 인간성의 탐구가 최근의 눈에 띄는 트렌드다.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과학의 시각에서 풀어보는 이야기들이 순문학에 가깝게 전개될 때 독자들이 반응했다“고 했다. 대표적으로 특히 한국에 큰 충격을 던진 2016년 알파고와 인간의 대결, 또 ‘인터스텔라’(2014) ‘마션’(2015) 같은 영화 등이 미친 영향도 컸다는 설명이다. 한 대표는 “요즘 SF 독자들이 과거 하드 SF물에서 인간적인 SF문학으로 넘어왔다”고  덧붙였다.

출판사 아르테가 지난해 11월 출간된 SF문학 무크지 ‘오늘의 SF’ 도 성공적이었다. 작가 듀나ㆍ정소연ㆍ박해울ㆍ김초엽, 평론가 김지은이 참여하고 감독 연상호의 인터뷰 등을 소개했다. 신작 6편과 비평이 두루 실린 초판은 2주 만에 모두 판매됐다. 아르테는 5월 2호를 발간할 계획이다.

무크지 '오늘의SF'. [사진 아르테]

무크지 '오늘의SF'. [사진 아르테]

담당자인 전민지 아르테 인문교양팀장은 “오래전 미국에서 유행했던 스페이스 오페라, 즉 외계인이나 우주전쟁을 소재로 했던 흐름과는 다르다. 사람, 특히 소수자에 집중하면서 내밀한 서사가 있는 SF에 독자들이 반응했다”고 했다. ‘오늘의 SF’는 페미니즘 문제, 장애인의 이야기 등을 다루며 과학과 사람의 접점을 짚었다. 전 팀장은 “다양한 분야의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 문제라는 소재도 SF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쪽으로 다음 호를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젊은 여성 독자들이 움직였다

이런 움직임 뒤에는 ‘젊은 여성’ 독자층이 있었다. 김초엽 작가의 책을 낸 허블의 조유나 편집장은 “최근 김 작가와 강연을 함께 해보면 팬층이 상당히 젊다. 책이 나왔을 때도 20ㆍ30대 여성이 움직였기 때문에 입소문을  빠르게 탔다”고 했다.

김 작가의 책에선 한 작품을 뺀 모든 작품의 주인공이 여성이다. ‘할머니’ 과학자가 등장하고, 임신한 여성이 컴퓨터에 입력됐다 사라진 엄마의 영혼을 찾아다닌다. 또 여성 우주인인 주인공은 역시 우주인이었던 이모를 향했던 사회의 시선을 되짚어내며 우주로 향한다. 조 편집장은 “작품의 기본 정서가 젊은 여성들과의 공감대가 넓다”며 “팬덤이 생길 정도의 호응은 여기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했다. 온라인 서점 예스24에 따르면 『우리가 빛의…』의 이달 5일까지 총 구매자 중 74.5%가 여성이었고, 20대 여성이 24.1%, 30대 여성은 21.2%였다.

김초엽 작가. [사진 허블]

김초엽 작가. [사진 허블]

온라인 서점 알라딘 도서팀의 김효선 과장은 “국내 SF 소설의 경우엔 기존에 있던 매니어층이 대중으로 확장이 된 경우인데 그러려면 부담스럽지 않은 책이 필요했다. 사람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다루면서도 시각의 틀을 제공하는 작품들이 나오면서 SF 독자층이 눈에 띄게 확장됐다”고 했다. 이처럼 한국의 SF 소설은 머지않아 전성기를 맞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SF아카이브의 박상준 대표는 “종이책 시장 자체가 침체하고 줄어드는 중에도 SF 소설의 비중만큼은 늘어날 것”이라며 “만화ㆍ영화ㆍ드라마로 연결될 가능성이 큰 장르라는 점에서도 성장 가능성이 더욱 크다”고 했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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