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보는 재미 대신 듣는 재미… 시각장애인도 스포츠 즐겨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시각장애를 갖고 있지만 스포츠의 매력에 빠진 안제영, 류창동, 권순철씨(왼쪽부터). 우상조 기자

시각장애를 갖고 있지만 스포츠의 매력에 빠진 안제영, 류창동, 권순철씨(왼쪽부터). 우상조 기자

"혼자서 야구장도 갈 수 있어요." "배구 스파이크 소리가 정말 시원하더라구요." "응원가를 부르다보면 팬들과 하나가 되는 기분이죠."

대한민국에는 약 25만3000명의 시각장애인(2017년, 통계청)이 있다. 앞은 보이지 않아도 시각장애인 상당수는 스포츠를 즐긴다. 열혈 스포츠 팬인 권순철(39), 류창동(30), 안제영(25)씨를 만나 시각장애인들의 스포츠 관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소리가 주는 쾌감, 한 팀을 응원하면서 얻는 기쁨은 비장애인과 똑같다고 했다.

권순철는 시각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그의 본업은 안마사. 하지만 또다른 직업이 있다. 바로 팟캐스트 프로듀서다. 그는 20대 때부터 라디오 방송에서 일을 했고, 2015년부터는 야구 관련 팟캐스트 '듣는야구'를 제작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각장애인 아나운서 이창훈, 김원식 훈남하이 엔터테인먼트 대표와 손잡고, 벌써 6년째 방송을 만들고 있다.

권씨는 "어렸을 때부터 야구란 종목에 매료됐다. 처음엔 다이아몬드도 모른 채 야구를 들었다. 중계 멘트와 공을 치는 소리만으로도 재밌었다"고 했다. 그는 "나중에 배트와 공을 만져본 뒤 어떤 스포츠인지를 알게 됐다. 그래서 라디오 중계를 듣기 시작하면서 야구를 좋아했다"고 말했다. 권씨는 "점점 야구 중계가 라디오에서 TV 중심으로 넘어갔다. 그래서 선수들 이야기를 담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류창동씨와 안제영씨는 중학교 교사다. 류씨는 역사, 안씨는 국어를 가르친다. 두 사람도 권순철씨처럼 태어날 때부터 빛을 보지 못했다. 류씨는 "아버지가 야구를 좋아하셨다. 화면이 안 보이니까 소리로만 듣다가 아버지가 설명을 해주셔서 자연스럽게 야구를 알게 됐다"며 "맹학교 기숙사에 같이 살던 형들이 야구를 좋아해서 팬이 됐다. 처음엔 두산을 좋아했는데, 이종욱 선수가 옮긴 뒤엔 NC를 응원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비장애인들과 마찬가지로 야구장에서 응원하고, 치맥같은 음식을 먹는 걸 즐긴다"고 했다.

아버지를 따라 롯데 팬이 된 안씨는 "처음엔 1루·2루·3루·홈베이스가 일직선인 줄 알았다. 홈이 타자 뒤라고 해서 의아했다"고 웃었다. 그는 "나중에 아버지와 밥상에 스트라이크존을 만들고 탁구 라켓을 치는 놀이를 하며 야구를 배웠다. 야구 규칙이 복잡하지만 한 번 익히니 너무 재밌었다"고 했다. 그는 "9살 때 야구장을 처음 간 뒤엔 응원문화에 빠졌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에만 다섯 번이나 롯데 원정 경기를 '직관'했다.

지난달 프로배구 GS칼텍스-현대건설전을 관람한 이창훈 아나운서, 안제영씨, 권순철씨(왼쪽부터). [사진 한국배구연맹]

지난달 프로배구 GS칼텍스-현대건설전을 관람한 이창훈 아나운서, 안제영씨, 권순철씨(왼쪽부터). [사진 한국배구연맹]

시각장애인들이 주로 야구를 보는 건 경기 특성 때문이다. 권순철씨는 "야구는 투구 사이 20초 정도 걸린다. 그 사이에 여러 가지 상황을 설명하고, 투수와 타자, 감독의 작전을 생각할 수 있다. 보이지 않아도 생각하는 재미가 있다"고 했다. 류창동씨는 "중,고등학생 때 유럽축구 중계도 들었다. 좋아하는 팀과 선수도 있었다. 하지만 축구는 플레이 과정을 중계진이 모두 설명하기 어렵다. 정말 긴박한 순간엔 선수 이름만 외치다가 끝날 때도 있다. 그래서 축구는 빠져들기가 어렵더라"고 했다. 안제영씨는 "아나운서의 해설이 없으면 상황파악이 어려운데, 요즘은 TV중계 위주라 볼카운트, 주자의 움직임들을 캐스터들이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을 때도 있어 아쉽다"고 했다. 세 사람은 "임용수, 한명재, 권성욱, 정우영 아나운서님이 상황을 잘 풀어주시는 편이라 듣기가 좋다"고 했다.

시각장애인들에게 가장 와닿지 않는 종목은 아무래도 기록 경기다. 선수들이 역동적으로 달리거나 속도를 내는 장면을 소리만으로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안제영씨는 "육상이나 겨울 스포츠, 사이클, 마라톤은 아무래도 흥미를 갖기 어렵다. 쇼트트랙은 그래도 추월이 자주 일어나서 머리 속으로 상상할 수 있다"고 했다. 권순철씨는 "아이스하키는 퍽이 너무 빨라 따라가기 어렵다. 피겨스케이팅 같이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종목도 감동이 전달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들은 생각보다 더 많은 종목을 즐긴다. 권순철씨는 "유도의 경우에는 시각장애인들이 직접 배우는 경우도 많다. 복싱이나 UFC도 타격음이 있어서 듣는 맛이 있다"고 했다. 안제영씨는 "펜싱이나 배드민턴 경기를 한 번 보고 싶다"고 했다. 류창동씨는 "양궁도 경기 규칙을 이해하기 쉽고, 누가 몇 점을 쐈느냐를 잘 알려주기 때문에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날아가는 화살을 못보는 건 아쉽지만, 줄 튕기는 소리와 과녁에 맞는 소리가 잘 들려 좋다"고 했다..

권순철씨와 안제영씨는 최근 새로운 경험을 했다. 지난달 16일 프로배구연맹의 초청을 받아 GS칼텍스와 현대건설의 여자부 경기를 관전했다. 배구연맹은 15명의 시각장애인을 위해 스포츠 전문 캐스터와 음향 장비를 별도로 준비해, 생생한 현장의 소리와 분위기를 전달했다. 경기 전에는 선수들과 함께 사진 촬영을 하며 배구 경기장에서 추억을 쌓았다.

시각 장애에도 스포츠 경기 만끽하는 3인 인터뷰. 우상조 기자/20200210

시각 장애에도 스포츠 경기 만끽하는 3인 인터뷰. 우상조 기자/20200210

안씨는 "배구는 이번에 처음 접했다. 팀도, 선수도 잘 몰랐는데 올림픽 예선을 통해 조금 접했다. 이번 방문을 통해 팬이 됐다. 장충체육관이 가기 편해 우리카드와 GS칼텍스를 응원하게 됐다. 요즘엔 TV중계도 꼬박꼬박 듣는다. 작은 이벤트지만 한 명의 팬이 늘어나지 않았냐"고 웃었다. 권씨는 "농구대잔치 시절엔 몇 번 농구 경기를 보러 갔는데 관중이 적은 경기 때는 코트에서 공 튀기는 소리가 들려 너무 좋았다. 배구도 스파이크를 때리는 소리가 참 좋았다"고 했다.

야구장과 배구장에 팬들을 초청하는 행사들이 몇 차례 열리긴 했지만 아직까지 경기장을 직접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권순철씨는 "구단이나 기구가 시각장애인들을 고객으로 생각했으면 좋겠다. 메이저리그 LA 다저스타디움은 시각장애인들이 신청할 경우 단말기를 통한 점자중계도 서비스한다. 유럽축구 팀 역시 경기장 내에서 음성중계가 가능하다. 꼭 장애인용이 아니더라도 구장 내에서 와이파이나 특정 주파수를 활용한 오디오 중계가 되면 팬들에게 서비스가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직접 여러 구장을 둘러본 안제영씨는 "수원 KT위즈파크의 경우 미리 연락을 해놓으면 경호업체에서 동선안내는 물론, 관란 안내, 화장실 안내까지 모두 잘 됐다. 하지만 특정구단의 경우 다소 불쾌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주변 관객들의 도움으로 경기는 끝까지 봤지만 아쉬웠다"고 했다. 류창동씨는 "시각장애인은 물론 장애인을 위한 관람 매뉴얼이 KBO나 배구연맹 같은 기구 차원에서 만들어지면 좋겠다. 그러면 팬층도 더 확대될 수 있지 않을까"란 제언을 했다.

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