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노량진의 한 구석진 골목 피자집도 잔칫집 같았다.
영화 '기생충' 속 기택(송강호 분)네가 동익(이선균)네 가정부를 쫓아내기 위한 작당 모의를 하던 배경으로 등장한 곳이다. 10일 오후 기자가 도착했을 때 테이블은 모두 동네 주민 9명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일본 방송사 NHK 기자가 스탠딩 촬영 중이었다. 이 집 단골이라는 주민들은 피자가 나오자 "여기 피자가 제일 맛있어"라고 한 마디씩 큰 소리로 말했다.
피자 가게 주인 엄항기(66)씨는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에서 전해온 낭보에 "이렇게까지 잘 될 줄은 몰랐다"며 축하 인사를 전했다. 그는 "봉준호 감독님을 처음 봤을 때 청바지에 티셔츠 하나만 걸치고 가게를 둘러보고 있었다"며 "너무 수더분해서 이렇게 대단한 분인지 처음엔 몰랐다. 촬영할 때 보니 '배운 분'이라 그런지 큰 소리 한 번 안 내고 점잖은 신사였다"고 떠올렸다.
서울 전역서 피자집 물색…봉준호 한번에 "오케이"
엄 사장 부부는 2002년 이곳 노량진에 프랜차이즈가 아닌 개인 브랜드의 피자집을 열었다. 이전에 전 빵집을 운영했지만 프랜차이즈 가게에 밀렸다고 한다. 반죽 만큼은 자신 있었던 부부는 직접 반죽하고 굽는 컨셉의 피자집을 열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엄 사장은 "장사도 안되고 힘들 때 영화 관계자가 찾아왔다. 처음엔 남편 반대가 심했는데, 촬영 장소 대여료도 나오고 무엇보다 딸 내외가 봉 감독의 팬이라 적극 찬성을 해 촬영이 성사됐다"고 전했다. 남편 강양희(72) 사장은 '왜 그렇게 반대하셨냐'는 질문에 "조용한 동네에 민폐 끼치기 싫어서"라고 답했다. 한국에서 유학 중이던 노르웨이인 사위가 특히 봉 감독의 영화는 다 챙겨본 열성 팬이었다고 한다. 딸 내외의 지지에 힘입어 촬영 장소를 빌린 봉 감독은 엄 사장 딸과 사위의 이름을 적고 사인을 남기기도 했다.
영화 제작사 섭외 관계자에 따르면 '기생충' 섭외 팀은 피자 가게를 섭외하기 전 서울 전역에서 피자집을 물색했다. 프랜차이즈는 제외했다. 노량진에서 찾은 엄씨의 가게는 영화 특유의 느낌을 살리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내부 공간이 호프집처럼 분할돼 있어 동선을 살리기에도 적합했다. 봉 감독은 이곳을 방문하자마자 "오케이"를 외쳤다.
봉 감독, 피자집 손뜨개 수세미도 활용
피자집은 영화 구석구석에 기여했다. 피자 박스 접기 아르바이트 장면을 찍기 전 기택네가 생계를 위해 접던 피자 박스도 여기 전시돼 있다. 엄 사장은 "피자 박스 접는 방법 여기서 배워갔다"고 전했다. 이날 피자집 일을 돕는 엄 사장 아들이 피자 박스를 직접 접어 보였다. 영화 속 화제가 됐던 장면처럼 빠르진 않았다. 그는 "이렇게 모든 면을 다 접어야 하는데, 원래 시간이 좀 걸린다"고 말했다. 피자 박스 접기 아르바이트를 주진 않는다고 한다. 엄 사장 가족도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피자 박스를 직접 접기 때문이다.
봉 감독은 가게를 방문했을 때 엄 사장이 만든 손뜨개 수세미를 유심히 보다 영화에 활용했다. 기택의 아내 충숙(장혜진 분)이 뜨개질로 수세미를 만들던 모습이다. 엄 사장에게 가게에서 손뜨개 수세미도 파는 이유를 묻자 "장사가 내 맘처럼 안돼서 힘들 때 뜨개질을 하면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설명했다. 빵집을 할 때도 피자집을 할 때도 늘 장사가 어려웠다.
영화 '기생충'의 성공 이후 서울시 관광 명소로 소개돼 외국인들이 그나마 이곳을 찾아왔지만 최근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우한 폐렴) 여파로 그마저도 끊겼다.
가게에서 만난 상도3동 주민 송재순(67)씨는 "나도 사업을 하는데 모든 업종이 다 어렵다"며 "이 동네도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았는데 세계적인 사람들이 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송씨와 함께 가게를 찾은 김애숙(67)씨도 "빈부차이가 세계적 문제라 기생충이 그렇게 큰 상을 받은 것 같다"며 "봉 감독님이 세계적 감독이 돼 한국 영화를 빛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엄 사장은 가게 바깥에는 '방 세 놓습니다'라는 쪽지가 붙어있다. 월세가 저렴한 편이지만 올해부턴 방도 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요즘 여러모로 너무 힘들지만 영화가 잘돼 정말 기쁘다"며 봉 감독에게 "아카데미 4관왕 축하드리고 언제 한 번 오시면 피자와 치킨을 대접하겠다"고 전했다.
정은혜 기자 jeong.eunhye1@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