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망자가 9일 909명을 기록하며 1000명 돌파는 시간문제가 됐다. 세계 2위 경제대국 중국의 신종 코로나 대참사는 17년 전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때의 두 영웅 중 한 명을 지웠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사스 상황 은폐 폭로한 장옌융 #확산 막는 데 기여했지만 잊혀져 #코로나 처음 알린 리원량 데자뷔
2003년 사스 사태 당시 중국엔 두 명의 영웅이 있었다. 한 사람은 최근 언론을 많이 타고 있는 중난산(鍾南山) 중국 공정원 원사다. 그는 84세의 나이를 잊은 채 우한 최전선으로 달려가 신종 코로나와 사투를 벌이고 있다.
당시 중난산 이상으로 사스 퇴치에 큰 공을 세운 이가 베이징 소재 해방군 301병원 교수 장옌융(蔣彦永·89)이다. 은폐와 기만으로 일관하던 사스 상황의 심각성을 폭로해 사스와의 싸움에 전 중국이 나서는 계기를 만든 주역이다.
중국의 첫 사스 환자가 발생한 건 2002년 12월 초였다. 2월 초가 되자 사람 간 감염이 나타나 환자는 100명이 넘었다. 곧 춘절(春節·설) 대이동이 이어졌고, 2월 12일엔 광저우에서 열린 중국과 브라질의 친선 축구경기에 5만 명이 운집했다. 베이징에선 3월 초 첫 환자가 나왔고, 중순엔 동남아와 유럽 등 세계로 퍼졌다. 반면에 중국에선 사스 보도가 줄어드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4월 2일 중국 위생부장 장원캉(張文康)은 TV에 나와 베이징에 사스 환자는 단지 12명, 사망자는 3명뿐이라고 발표했다.
격분한 장옌융은 “장원캉 부장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두 통의 편지를 써 중국 중앙텔레비전(CCTV)과 홍콩 피닉스TV에 보냈다. 아무도 보도하지 않았고, 회신도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한 서방 미디어가 이 서한 내용을 공개했다. 한 달 전 국가주석에 오른 후진타오(胡錦濤)는 비로소 사태를 파악하고 “어떤 사람도 질병 상황을 숨겨서는 안 된다”며 장원캉을 경질했다. 환자 수를 축소한 베이징 시장 멍쉐눙(孟學農)의 옷도 벗겼다. 장원캉과 멍쉐눙 경질 직후 중국은 베이징 사스 환자가 37명이 아닌 10배 가까운 339명이라고 밝혔다. 문제가 생기면 긴급 투입돼 소방수란 별명이 붙은 왕치산(王岐山·현재 국가 부주석)이 베이징 시장이 됐고, ‘철(鐵)의 여인’으로 불리는 우이(吳儀) 부총리가 위생부장을 겸했다. 후진타오 정권은 신속하고 투명한 사스 정보 공개로 인민의 신뢰를 회복했다.
그러나 중국 검색엔진 바이두(百度)에서 ‘SARS 사건’을 검색하면 사스 시작부터 퇴치까지의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는데, 정작 장옌융의 이름은 제대로 찾아볼 수 없다. 중국 언론에선 내부 치부를 용기 있게 폭로한 ‘휘슬 블로어(whistle blower)’ 장옌융이 반갑지 않기 때문이다. 신종 코로나 발병 사실을 최초로 폭로했던 리원량(李文亮)이 3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신종 코로나 초기 대응에 실패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현재 집권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중국 네티즌들은 중국 정부를 조롱하는 셀카 사진을 SNS에 올리고 있다. 마스크에 ‘不能(못하겠다) 不明白(모르겠다)’이라고 쓰거나 이 글을 쓴 종이를 드는 식이다. 이 글은 신종 코로나 위험을 최초로 경고했다 공안에 끌려간 리원량의 반성문에서 나온 것이다. ‘能’은 ‘당신은 유언비어를 유포해 사회질서를 해쳤다. 범법행위 중단을 요구한다. 그렇게 하겠는가?’라는 질문의 자필 답이었다. ‘明白’은 ‘위법행위를 계속할 경우 법의 제재를 받게 될 것이다. 알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공안 협박에 굴복해야 했던 단어 ‘能’ ‘明白’은 공산당에 대한 저항의 뜻을 담아 ‘不能’ ‘不明白’이라는 단어로 재탄생했다.
베이징=유상철 특파원, 김경미 기자 you.sangchul@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