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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은 어떻게 아카데미를 석권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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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일(현지시간) 제92회 아카데미 4관왕을 차지한 봉준호 감독과 제작자 곽신애(바른손이앤에이) 대표(뒤쪽부터)가 시상식 직후 포즈를 취했다. '기생충'은 이날 비영어 영화 최초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을 수상했다. [연합뉴스]

10일(현지시간) 제92회 아카데미 4관왕을 차지한 봉준호 감독과 제작자 곽신애(바른손이앤에이) 대표(뒤쪽부터)가 시상식 직후 포즈를 취했다. '기생충'은 이날 비영어 영화 최초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을 수상했다. [연합뉴스]

“올해 이 부문 이름이 ‘외국어영화상’에서 ‘국제영화상’으로 바뀌었잖아요. 그 이름이 상징하는 바가 있는데 오스카가 지향하는 방향에 지지의 박수를 보냅니다.”

9일(미국 현지 시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으로 한국영화 첫 오스카상(국제영화상)을 받아든 봉준호 감독의 감사다. 이 수상 소감은 마치 예언이 됐다. 한국영화 ‘기생충’은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비영어 영화 최초 작품상, 아시아 영화 최초 각본상, 아시아계 역대 두 번째 감독상(대만의 이안 감독에 이어)까지 최다 4관왕을 차지했다. 한국영화 신기록뿐 아니라 아카데미 92년 역사를 뒤집었다. 영어가 아닌 영화는 ‘외국어영화’로 구분해온 아카데미가 ‘미국 로컬(local‧지역) 영화제’란 꼬리표를 확실히 떼어냈다.

'기생충' 아카데미 수상 분석 #비영어 영화 최초 작품상… #봉준호 4관왕 어떻게 이뤘나

'안전한 후보' 1917 제친 비결…

(앞줄 왼쪽부터)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작품상에 호명된 봉준호 감독이 무대에 올라 시상자인 배우 제인 폰다와 포옹하고 있다. 둘 사이로 통역가 샤론 최, 그 왼쪽엔 영화의 숨은 주역 배우 박명훈이 보인다. [AFP=연합뉴스]

(앞줄 왼쪽부터)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작품상에 호명된 봉준호 감독이 무대에 올라 시상자인 배우 제인 폰다와 포옹하고 있다. 둘 사이로 통역가 샤론 최, 그 왼쪽엔 영화의 숨은 주역 배우 박명훈이 보인다. [AFP=연합뉴스]

‘기생충’의 4관왕은 여러 모로 이변이다. 칸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동시에 받은 것도 1955년 미국 영화 ‘마티’ 이후 ‘기생충’이 단 두 번째다.

특히 ‘기생충’은 올해 작품상‧각본상에 가장 유력하게 점쳐졌던 영국 거장 샘 멘데스 감독의 제1차 세계대전 영화 ‘1917’을 제쳤다. ‘1917’은 할리우드 큰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설립한 영화사가 제작한 데다 전쟁영화‧실화 바탕에 우호적인 아카데미 취향과도 맞아 떨어져 수상 예측 사이트 골드더비 등에서 작품상 가능성 1위로 꼽혔다. 그러나 ‘기생충’은 이 모든 예상을 뒤집었다.

'#오스카는너무하얗다' 변화 일궈  

왼쪽부터 공동 각본가 한진원 작가와 봉준호 감독이 9일(현지 시간) '기생충'으로 아시아 영화 최초 수상한 아카데미 각본상을 들어올렸다. [로이터=연합뉴스]

왼쪽부터 공동 각본가 한진원 작가와 봉준호 감독이 9일(현지 시간) '기생충'으로 아시아 영화 최초 수상한 아카데미 각본상을 들어올렸다. [로이터=연합뉴스]

뉴욕타임즈 등 현지 매체는 이날 시상식이 “‘기생충’의 역사적인 밤”이 된 요인으로 최근 5년간 아카데미상이 추구해온 다양성에 주목했다. 아카데미상은 출품이나 초청이 아니라 전 세계 8000여명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회원들이 투표로 선정한다. 5년 전부터 백인과 남성 위주 시상식에 반기를 든 ‘#오스카는 너무 하얗다(OscarsSoWhite)’ 해시태그 저항이 거세지며 아카데미측은 다양한 국적, 인종의 회원을 확충해 개방화, 다각화에 힘써왔다. 한국 감독 임권택‧봉준호‧박찬욱‧홍형숙 등과 배우 최민식‧송강호‧이병헌‧배두나 등도 이런 흐름 속에 아카데미 회원이 됐다. 여전히 회원의 80%가량은 미국 현지 영화 관계자이지만, 이런 노력이 수상 결과도 변화시켰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은 여성 감독상 후보가 없는 데다, 연기상 부문을 통틀어 단 한 명의 유색인종 후보만 올리며 빈축을 샀지만, 작품상 후보 명단엔 아시아 영화 ‘기생충’ 외에도 전통적 극장 기반이 아닌 넷플릭스 영화 ‘아이리시맨’ ‘결혼 이야기’와 코믹북 원작 영화 ‘조커’까지 포함됐다.

9일(현지시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에 오른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가운데)과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포즈를 취했다. [AFP=연합뉴스]

9일(현지시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4관왕에 오른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가운데)과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포즈를 취했다. [AFP=연합뉴스]

김형석 영화 저널리스트는 “아카데미 92년 역사가 백인, 남성, 중산층, 보수주의에서 점점 다양성의 영화제로 나아가고 있다”면서 “흑인 배우, 여성 감독, 퀴어영화 등에 수상하며 태생적으로 지녀온 장벽을 하나하나 해체해가는 과정이다. ‘기생충’은 아카데미가 최후의 보루처럼 남겨놨던 언어적 장벽을 넘어, 미국 바깥 타인들의 이야기에 상을 줬다는 게 큰 의미”라 했다.

빈부 양극화 주제 시의 적절

지난해 한국영화 최초 칸 황금종려상 이후 ‘기생충’이 일으킨 세계적 신드롬도 한 몫 했다. 반지하집 가족이 부잣집에 숨어드는 이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영화는 코미디와 비극, 호러가 절묘하게 뒤섞여 “장르가 봉준호”란 말까지 나왔다. 봉 감독은 비공식 부문인 감독주간으로 처음 칸에 간 괴수 SF ‘괴물’부터 할리우드 배우와 함께한 ‘설국열차’, 슈퍼 돼지가 나오는 넷플릭스 영화 ‘옥자’ 등으로 해외 평단‧관객 사이에 팬덤을 쌓아왔다.

‘기생충’의 빈부 양극화란 주제는 국경을 넘어 공감대를 얻었다. 골드더비 에디터 조이스 엥은 “시의적절한 영화일뿐 아니라 대중적으로 재밌다”며 “‘기생충’이 지난해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이 불발됐던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멕시코 영화) ‘로마’와 다른 점”이라고 했다.

봉준호 '자식바보 아빠' 패러디 

봉 감독 자신의 표현대로 “자본주의의 심장 같은 나라” 북미 반응은 더욱 뜨거웠다.  지난해 10월 단 3개관에서 개봉했지만, 결정적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 방지, 영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놀이처럼 퍼졌다. 봉 감독의 이름에 황금종려상(Palm d'Or)을 합한 ‘봉도르’, 팬덤을 뜻하는 ‘봉하이브(Bonghive)’ 등 SNS 해시태그도 유행했다. 북미 현지 배급사 네온이 ‘독도는 우리 땅’ 가락에 가사를 바꿔 극중 기정(박소담)이 흥얼거린 ‘제시카 징글’ 등을 적극 홍보하며 입소문은 커졌다.

봉준호 감독이 9일(현지시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이 받은 트로피를 바라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봉준호 감독이 9일(현지시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이 받은 트로피를 바라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봉 감독의 솔직한 유머도 호감을 더했다. 인기 토크쇼 ‘지미 팰런의 투나잇 쇼’에선 한국어 통역을 끼고도 청중을 웃겨, 통역사 샤론 최의 통역 실력까지 화제가 됐다. ‘기생충’이 비영어 영화론 처음으로 미국배우조합 앙상블상 수상 무대에 올랐을 때 봉 감독이 흐뭇하게 웃으며 카메라에 배우들 모습을 담은 표정은 ‘자식을 자랑스러워하는 아빠(Proud Daddy)’ 같다며 패러디까지 나왔다.

"자막 1인치" 발언 美관객 녹였다

“자막이란 1인치의 장벽을 넘으라”는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수상 소감은 비영어 영화의 자막 읽기를 꺼리는 미국 대중들 사이에 화제가 되며 자성의 목소리마저 나왔다.

봉 감독은 9일 아카데미 시상식 직후 간담회에서 “어떻게 보면 그 소감이 때늦지 않았나. 이미 장벽이 부서지고 있는 상태였고 유튜브나 스트리밍(OTT), 인스타그램이나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이미 모두 연결돼있고. 이젠 외국영화가 상받는 게 사건으로 취급되지도 않을 것 같다”고 웃으며 돌이켰다.

CJ ENM 한국 최초 아카데미 홍보전

이번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엔 투자‧배급사 CJ ENM과 북미 현지 배급사 네온의 적극적인 홍보전도 컸다고 분석된다. 할리우드에서 아카데미 시상식은 매해 전 세계 최대 이목이 쏠리는 홍보무대다. 많게는 수천만 달러의 큰 예산, 글로벌 인맥, 공격적인 프로모션 등을 총동원하는 이유다. 할리우드 스튜디오엔 아카데미 캠페인 전담팀이 조직 내 따로 있을 정도다. 한국영화론 처음 캠페인에 뛰어든 CJ ENM은 지난해 칸영화제 이후부터 500곳 이상 외신 인터뷰, 여러 영화제 및 시사회, 관객과의 대화, 파티 등으로 아카데미 투표권을 가진 배우‧감독‧프로듀서 등 할리우드 조합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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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이 골든글로브‧영국아카데미상에 더해 각종 조합상에서 비영어 영화 최초 수상 기록이 잇따른 데는 이런 노력도 있었다.

미드 '기생충' 봉도르 신화 이을까

인기를 더하며 ‘기생충’은 지난달 스크린을 전국 1000개 넘게 확장했다. 흥행 분석 사이트 박스오피스모조에 따르면 9일까지 ‘기생충’의 북미 수입은 3547만 달러(약 420억원), 역대 비영어 영화 북미 흥행 6위다. 5위인 멕시코 출신 할리우드 감독 길예르모 델 토로의 스페인어 영화 ‘판의 미로’(3760만 달러)도 곧 넘어설 기세다. 지난해 북미 개봉한 비영어 영화 최고 흥행작에 등극한 데 이어서다.

한국영화 역대 북미 흥행 신기록을 세웠던 심형래 감독 ‘디 워’의 1097만 달러는 진즉에 넘어섰다. 이번 아카데미 수상이 더 큰 흥행 결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기생충’은 미국 HBO 방송의 TV 시리즈로도 리메이크된다. 봉준호 감독과 CJ가 할리우드 감독 아담 맥케이와 손잡고 개발에 참여한다. 각각 한국어와 영어로 만들 예정인 두 편의 차기작도 기다린다. ‘봉준호’의 신화는 이제 시작됐다.

기생충 수상내역.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기생충 수상내역.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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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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