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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 줄이세요...그래야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중앙일보

입력

김선두, '느린 풍경-덕도길'(2019), 장지에 분채, 133x160cm. [사진 학고재갤러리]

김선두, '느린 풍경-덕도길'(2019), 장지에 분채, 133x160cm. [사진 학고재갤러리]

"어느 날 저녁 무렵 운전을 하며 정체된 고가를 지나가는데 눈앞에 '속도를 줄이시오'라고 쓰인 표지판이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천천히 가다 보니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북한산 풍경이 한 편의 그림처럼 보였습니다. 그때 그런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삶의 속도도 줄여야 전에 잘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나는 쉴 새 없이 직진만 하며 살아온 게 아닌가···. "

학고재갤러리, 한국화가 김선두 개인전 '김선두' #'느린 풍경' '별을 보여드립니다' 연작 등 19점 소개 #장지에 색 쌓아 완성, 그윽한 색채의 깊이감 돋보여 #일상에 밀착한 소재, 삶에 대한 성찰,,, 현대적 감각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들을 푸근하게 담아낸 붉은 화폭 앞에 선 중년의 화가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마치 봄의 흙냄새가 담긴 듯한 그림 속에 동그랗게 자리한 반사경,  그 안에 'SLOW(천천히)'라고 쓴 글씨가 보인다.  이 그림은 유화가 아니다. 장지에 수십 번의 붓질로 색을 쌓아 완성한  그림이다.

요즘 한국화가 어디까지 와 있는지 궁금하다면 현재 서울 삼청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화가 김선두(61)의 개인전  '김선두'를 봐야 한다.  '느린 풍경' '별을 보여드립니다' 등 그의 대표 연작을 포함해  '지금, 여기,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담은 진솔하고 푸근한 작품 19점을 만날 수 있다.

한국화, 현대 회화의 어법으로

김선두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한국화가 중 한 사람이다. 전통의 틀 안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한국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지속해서 탐색해온 작가이기도 하다. 수묵과 채색을 접목하고, 그리는 대상에 따라서는 유화도 그린다. 무엇보다 그는 화폭에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를 담는다. 우연히 지나다 본 담벼락 위의 철조망,  포구에서 본 낡은 뜰채와 말린 생선, 옛날 여권에서 발견한 자신의 20대 얼굴 등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그림의 소재가 된다.  "그동안 동양화나 한국화를 전통 회화로만 여기는 게 가장 아쉬웠다"는 그는 "한국화를 현대 회화의 어법으로 풀어내고 싶었다"고 했다. " '정서'만 담아내는 그림이 아니라 실제로 내가 삶에서 얻는 깨달음을 시각적 이미지로 전하고 싶었다"는 얘기다.

김선두, '나에게로 U턴하다'(2019), 장지에 분채,77 189cm. [사진 학고재갤러리]

김선두, '나에게로 U턴하다'(2019), 장지에 분채,77 189cm. [사진 학고재갤러리]

나에게로  U턴하라  

특히 '느린 풍경' 연작엔 "이제 직진만 하지 말고 천천히 쉬었다 가고 유턴도 하고,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자"는 작가의 생각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 미술사가인 김백균 중앙대 교수는 "김선두는 '느린 풍경' 연작을 통해  어떤 세계의 진실이 보이는 순간이 있다면, 그 순간은 유턴을 위해 멈춰 섰을 때이거나 아니면 심하게 굽은 길에서 속도를 줄일 때라고 말한다"면서 "그의 그림 속에서 반사경은 자신이 지나온 길을 보여 준다. 세계의 진실을 보려면 상대적인 세계의 양면을 모두 봐야 한다는 얘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나에게로 U턴하다'는 작품에 이르면 김선두의 메시지는 더욱 분명하고 강해진다. 나에게로 U턴한다는 것은 나의 본성으로 돌아갈 기회라고 해석" 가능하다고 말했다.

붓을 잘 쓴다는 것은···

김선두, '포구는 반달' (2019), 96x77cm. [사진 학고재갤러리]

김선두, '포구는 반달' (2019), 96x77cm. [사진 학고재갤러리]

이번 전시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작품은  장지에 먹, 분채로 그린 '포구는 반달' '마른 도미' '철조망 블루스''행-아름다운 시절'과 같은 신작이다, 능란한 붓질로 먹의 농담을 조절해 표현한 선들이 돋보인다.

"묵유오채( 墨有五彩·먹에 다섯 가지 색이 있다)라는 말이 있어요. 먹에 담긴 색을 잘 드러내야 한다는 뜻이죠. 그런데 그 색을 무엇으로 드러내는가. 그것은 바로 붓질입니다. 결국 붓을 잘 쓰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

"수묵화의 본질은 결국 필법에 있다고 믿는다"는 그는 낡은 철조망과 구멍 난 뜰채를 그린 그림만으로도 그 필법이 얼마나 중요한지 드러낸다.  그런데 왜 그는 굳이 철조망과 뜰채, 마른 도미를 자신의 화폭에 옮긴 것일까.

"어느 날 지나가다가 문득 녹슬고 휘어진 철조망을 보았죠. 그런데 제게는 그게 한 편의 블루스 음악처럼 느껴졌어요. 직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오랜 세월을 겪으며 거기에 순응한 모습, 그게 사실은 한 편의 음악처럼 굉장히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었죠."

김선두, '마른 도미'(2019), 178x[158cm. [사진 학고재갤러리]

김선두, '마른 도미'(2019), 178x[158cm. [사진 학고재갤러리]

"마른 도미요? 이게 어떻게 보면 사람 얼굴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또 괴물 같아 보이죠.  원래는 한 마리의 싱싱한 물고기였는데, 둘로 쫙 벌어져 등을 맞대고 있는 순간 그게 성남 사람 같기도, 탐욕스러운 괴물 같아 보이기도하는 거예요. 소설가 고 이청준 선생님이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죠. '이 세상에 가장 무서운 사람이 신념이 강한 사람'이라고. 요즘 제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게 됐어요. 종교든, 정치든, 무엇이든 양극화되고 있는 시대,  자기 신념에 빠진 사람들이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뜰채를 그리면서는 사랑을 생각했어요. 사랑이란 게 이런 거 아닌가.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것.  반쯤 뚫린 구멍으로  모두 빠져나가는 것. "

작가의 소재의 기법에 대한 고민은 결국 삶에 대한 그의 성찰과 맞닿아 있다. 붓을 쥐고 너무 힘을 주지 말 것, 붓을 휙휙 빠르게 놀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 완급을 조절하며 리듬을 탈 때 그림과 내가 하나가 된다는 것···. 삶도 그림도 그럴 때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해진다는 것이다.

이 작가가 별에 집착하는 이유 

김선두, '별을 보여드립니다-호박'(2019), 장지에 분채, 138x178cm. [사진 학고재갤러리]

김선두, '별을 보여드립니다-호박'(2019), 장지에 분채, 138x178cm. [사진 학고재갤러리]

김선두, '별을 보여드립니다-담쟁이1' (2019), 장지에 분채, 108x76cm.[사진 학고재갤러리]

김선두, '별을 보여드립니다-담쟁이1' (2019), 장지에 분채, 108x76cm.[사진 학고재갤러리]

김선두의 '별을 보여드립니다' 연작도 이번 전시에서 눈에 띈다. 별을 촘촘히 수놓은 배경 위에 선인장을 그려 넣거나, 담쟁이 혹은 호박, 옥수수, 토란, 해바라기 등을 그려 넣은 작품들이다. 낮에는 잘 보이지 않는 '별'과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것들을 한 화폭 안에 담았다. 특히 '별을 보여드립니다-호박'의 화면을 잘 들여다보면 시든 호박 줄기 아래 음료수 캔, 과일 포장지 등이 보인다. 적나라한 우리네 삶의 소비 풍경이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탐진치(貪瞋癡)를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고 해요.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번뇌를 떨쳐야 한다고요. 별은 언제나 하늘에 있는데 그게 보이기도 하고 안보이기도 하잖아요.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니잖아요. 삶의 중요한 것들이 그런 것 같아요. 탐욕과 집착을 좀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게 보이죠. 제가 별을 그리면서 하는 생각입니다."

김선두는 1958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다. 중앙대 한국화과를 졸업(학·석사)하고  현재 중앙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소설가 김훈의 『남한산성』표지를 그렸고, 임권택 감독의 영화 '취화선'에서 오원 장승업의 그림 대역을 맡아 주목받았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서울시립미술관·호암미술관(서울)·성곡미술관(서울)에 소장돼 있다. 전시는 3월 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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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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