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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오팔세대’의 화려한 빛, 그러나 짙은 그림자도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한순의 인생후반필독서(22)

‘소통교육’을 받으러 과천 어느 주택에 모여 소모임 강의를 들을 때였다. 그곳에 강의를 들으러 오기에는 좀 연륜이 있는 나이로 보이는 분은 집이 대전이어서 강의가 길어질 때는 중간에 일어나 막차가 끊기기 전에 터미널로 발걸음을 종종 옮겼다. 나는 개근을 하였고, 그분은 한 번 정도 결석했던 거 같다. 그런데 그분이 결석했을 때 괜히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런 느낌이 들까 생각해 보니, 길지 않게 짧게 끝나는 그분의 답변에는 유머와 페이소스가 짙게 배어 있어 듣는 재미가 있었다. 당시 그분은 대전중부경찰서장이었다. 그 나이에 경찰서장이라면 알게 모르게 밴 연륜과 권위가 배어 나옴직 했는데 시종일관 서번트개그맨 자세였다.

“아내가 나보다 여덟 살이나 아래니까 정년퇴직을 하려면 앞으로 10년 남았다. ‘10년 동안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며 아내에게 차를 대접하고 “고객님”하고 부르니 “웬 고객님” 한다. 아내는 이제부터 내가 평생 모셔야 하는 ‘영원한 VIP 고객님’이다. 나한테는 늘그막에 새로운 일이 생겼으니, 10년 동안은 더욱 감사하며 충성해야 한다.”

이렇게 현실과 유머가 뒤범벅된 기승전결은 블랙코미디의 전형이다. 현직 경찰 시절, 빠른 승진으로 빠른 정년을 맞이한 정기룡 소장(미래현장전략연구소)의 책 『오팔세대 정기룡, 오늘이 더 행복한 이유』에는 곳곳에 유쾌한 지뢰처럼 블랙코미디가 포진해 있다.

'소통교육'에서 알게 된 그분이 결석했을 때는 괜히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런 느낌이 들까 생각해 보니, 길지 않게 짧게 끝나는 그분의 답변에는 유머와 페이소스가 짙게 배어 있어 듣는 재미가 있었다. [사진 Pixabay]

'소통교육'에서 알게 된 그분이 결석했을 때는 괜히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런 느낌이 들까 생각해 보니, 길지 않게 짧게 끝나는 그분의 답변에는 유머와 페이소스가 짙게 배어 있어 듣는 재미가 있었다. [사진 Pixabay]

“현직에 있는 동안 박사학위도 받고, 사회복지사·제빵제과·초콜릿 만들기· 손두부 만들기·떡 만들기·피아노 교습·노무사 준비도 했지만 다 쓸데없었고, 나중에 알았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남보다 잘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요. 저는 남보다 말하는 재주가 있어서 요즘은 기업 연수나 은퇴설계 강의를 주로 하고 있습니다. 저의 실패담은 강의 소재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피나는 노력의 결과 퇴직 후 삼성에스원 상근 고문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고문을 대하는 그의 자세는 이러하다. “아무래도 고문은 자리가 자리다 보니 나이가 제일 많다. 어쩌다 직원들과 식사할 기회가 있으면 내가 얼른 물을 따랐다. 사람들이 놀라서 “고문님, 왜 그러셔요”하고 말하면 이렇게 말한다. 고문법 1조, 고문은 식당에 가면 물을 따른다. 고문법 2조, 고문은 식당에 가면 수저를 놓는다. 고문법 3조, 고문은 밥을 먹고 커피를 빼 온다.”

그런가 하면 평범한 베이비붐 세대의 전형적인 아버지 모습도 보인다.
“손자들 간식 사주는 데는 몇만 원도 쉽게 쓰면서 염색 값 1만2000원을 아끼겠다고 목욕탕에서 눈치 보며 혼자 염색을 하는 내 꼴이 한심하고 우스웠다. 물론 항변할 이유가 충분히 있다. 한 푼이라도 아껴 자식들에게 잘해주고 싶었다. 내가 원래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서 지금의 정기룡이 있다. 아마도 우리 부모님들도 다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현직에 있을 때 맞았던 사건사고만큼이나 그의 은퇴 후 행보는 다채롭다. 목사 안수를 받기도 하고, 노래교실 강사 자격증을 따기도 한다. 또 다가올 미래 ‘웰다잉’과 호스피스 교육을 받고 호스피스 병동으로 봉사를 가기도 한다.

‘오팔세대’ 라는 말은 화려하게 빛나는 오팔에 빗대어 골드시니어 세대를 말한다. 그들은 고급 소비층으로 대두되며, 경제소비 인구로 타깃팅 되고 있다. [사진 Pixabay]

‘오팔세대’ 라는 말은 화려하게 빛나는 오팔에 빗대어 골드시니어 세대를 말한다. 그들은 고급 소비층으로 대두되며, 경제소비 인구로 타깃팅 되고 있다. [사진 Pixabay]

이제 임종기에 들어간다고 말을 했고, 남편이 다시 아내를 만지면서 마지막 말을 나누었다. “여보, 우리 그동안 좋았지? 생각해보니 내가 못 해준 게 너무나 많았어. 이별의 시간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모르고. 우리가 허리 굽어서도 손잡고 다닐 줄 알았는데. 여보, 너무 빠르잖아. 여보, 이게 끝이 아닌 거 알지? 나중에 우리 다시 만날 거잖아. 거기선 아프지도 않고 힘든 일도 없을 거야. 당신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금방 따라갈 거야. 아주아주 나중에 우리 애들도 다 같이 만날 수 있을 거야. 외로워하지 말고 잘 있어야 해. 그런데, 여보, 당신에게 한 가지만 부탁할게. 오늘 하루만 더 버텨줄 수 있어? 우리 내일 이별하자. 응? 난 그것으로 족해.”

눈물이 흐르는 현장의 모습 속에 한 남자가 눈물을 삼키고 있다. ‘오팔세대’ 라는 말은 화려하게 빛나는 오팔에 빗대어 골드시니어 세대를 말한다. 오팔은 원래 ‘Old People with Active Lives’의 대문자로 만든 조어다. 그들은 고급 소비층으로 대두되며, 경제소비 인구로 타깃팅 되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다른 ‘오팔세대’로 읽힌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부모님 밑에서 일찍 삶의 현장에 노출되고, 철이 들어 불철주야 노동 현장에서 뛰었고, 이제는 저성장기를 맞은 자녀 세대를 위해 또 뛰어야 하는 세대로 보인다. 사람은 경험의 수만큼 빛난다. 우리가 보기에는 아주 쉽게 자신의 과거 직위를 내려놓은 것 같은 정기룡 서장도 이렇게 고백한다.

“‘그래도 내가 옛날에.’ 불쑥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평생 어깨에 들어간 힘을 빼지 못해 노년에 자기가 설 자리를 찾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나도 힘 빼고 살려고 나름 노력하며 살지만 한껏 추어올렸던 어깨높이가 내려가는 데는 몇 년이나 걸렸다. 순탄한 인생이 아니어서, 남보다 애쓰고 살아서 보상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들 애쓰지 않고 살았을까.

짧은 에세이를 한 꼭지 한 꼭지 읽어가다 보면, 평범하고 쉬운 글에 깊이 담긴 삶의 내공을 느끼게 된다.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이곳 살피고 저곳 살피고 울고 웃는 삶의 행적은 눈물겹고 사랑스럽다. 그리고 책을 덮을 즈음에는 이분은 행복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나도 좀 더 빛나는 진정한 오팔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든다.

도서출판 나무생각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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