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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력·건망증은 동전 양면, 그걸 알려준 조선독서광 김득신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옛이야기(52)

아주 평범한 사람의 아주 평범한 일상을 그린 이야기는 가능할까. 영화든 드라마든 소설이든 너무 자극적이고, 일반적인 사람이 평소 고민할 일은 전혀 없을 것 같은 내용만 가득하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나처럼 내세울 것 하나도 없는 사람이 그냥 일어나서 밥 먹고 출근하고 일하고 사람들 만나고 퇴근해 돌아 씻고 밥 먹고 TV 좀 보다 잠드는, 그런 아주 평범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의 모습을 영화든 드라마든 무언가로 만들어 보여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생각 이상으로 훨씬 ‘이야기’의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다. 주변에서 흔히 떠도는 ‘누가 어쨌다더라’ 하는 카더라 통신 식의 소문도 ‘이야기’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아이고, 뭐 그런 일이 다 있다냐”, “세상에 그런 일이. 에구 쯧쯧” 하며 적극적으로 공감하기도 하고, 별일·별사람이 다 있는 게 세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 한편으로는 예의를 모르고 배은망덕한 사람 이야기를 뒷담화 삼아 하다가 어느 순간 문득 ‘아, 혹시 나도 어디서 엄한 소리나 하고, 인사드릴 분을 무시한 채 엄벙덤벙 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며 등골 서늘하게 자신을 돌아보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가 쌓이고 상상력이 더해지면서 이야기는 훨씬 더 복잡하고 풍부한 내용과 구성을 갖게 된다. 그 속에서 인간의 모습을 닮은 신의 세계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요정·귀신·괴물이 등장하는가 하면 좀비·흡혈귀·외계인 등에 맞서 싸우는 지구인의 혈투를 그려내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가 대중문화의 큰 부분을 담당하면서 우리는 여가를 그런 이야기와 함께 즐겁게 소비한다.

이야기가 쌓이고 상상력이 더해지면서 이야기는 훨씬 더 복잡하고 풍부한 내용과 구성을 갖게 된다. 그런 이야기들이 대중문화의 큰 부분을 담당하면서 우리는 여가 시간을 그런 이야기들과 함께 즐겁게 소비한다. [사진 Pxhere]

이야기가 쌓이고 상상력이 더해지면서 이야기는 훨씬 더 복잡하고 풍부한 내용과 구성을 갖게 된다. 그런 이야기들이 대중문화의 큰 부분을 담당하면서 우리는 여가 시간을 그런 이야기들과 함께 즐겁게 소비한다. [사진 Pxhere]

자극적이기만 한 이야기에 대한 반발심에서 하게 된 말이긴 했지만, ‘이야기’란 일상성을 벗어나야만 성립하는 것인가 하는 나름대로 매우 원초적이고 진지했던 질문을 이제야 개미 코딱지만큼 이해하게 되었다. 이야기는 일상에 틈이 생기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의 저자 로버트 맥기가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이야기란 인간이 삶의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우리 삶이 그렇게 평범하기만 하고 아무런 균열 없이 조화와 균형을 잘 갖춘 상태에서 운영되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지점에서 이야기가 생겨난다. 균형을 찾으려고. 뭔가 어그러지고 약해지고 조각나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을 이야기를 통해 논리를 맞추고 필요한 부분은 강화하고 조각들을 이어 하나로 통합해 주는 것이다. 삶에는 늘 갈등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것은 나 자신에게서 나오기도 하고 외부로부터 주어지기도 한다. 언제 어떤 갈등과 마주하게 될지 예측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니 어떤 문제 상황이 생겼을 때 그게 무엇 때문에 생긴 문제인지,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지 금세 알아차리기도 힘들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이야기를 하면서 이해할 수 없었던 일에 대한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그래서 이삼십 년 묵은 갈등과 복수의 서사는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 조폭과 검사, 형사, 여기에 정·재계 거물급 인사들이 등장하는 영화가 여전히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기억 속에 트라우마처럼 자리 잡고 있는 일에 대해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 하고, 이야기 속에서나마 깔끔하게 해결되는 모습을 그려보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묵혀 두었던 이야기를 열심히 끄집어내 충분히 풀어내고, 지금 다시 떠올렸을 때 마음에 드는 방식대로 다시 구성해 보기도 하고,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판타지를 구성하기도 한다.

‘기억의 복원’을 떠올리다 보니 그 반대편에 있는 ‘건망증’에 생각이 미친다. 잊지 못하고 있는 기억에 매달려 과거를 재구성하는 데에 몰입하는 것과 웬만하면 그냥 잊어버리고 사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양쪽 다 일종의 치유적 효과를 갖는다는 면에서는 나름대로 효용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건망증으로 유명한 이야기 몇 편을 떠올려 보았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변의를 느껴 길가 풀숲에 들어갔다. 쭈그려 앉으려니 갓이 거추장스러워 나뭇가지에 걸어 두었다. 시원하게 볼일을 보고는 일어나다가 머리에 갓이 닿으니, “어이쿠, 어느 놈이 제 갓을 나뭇가지에 걸어 놓고 그냥 갔나 보네. 덕분에 갓 하나 공짜로 얻었구먼” 하고 좋아했다. 엉거주춤 일어나 갓을 집어 들려다가 제가 싸놓은 똥을 밟고는, “에이, 이런. 어느 놈이 이런 데다 똥을 싸 놓고 가나 그래. 고얀 놈” 하고 욕을 했다.

인생을 돌이켜보았을 때 복원하고 재구성해야 할 중요한 기억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웬만한 일은 잊어버리면서 사는 것도 소확행의 방법일 수 있겠다. [사진 Pixabay]

인생을 돌이켜보았을 때 복원하고 재구성해야 할 중요한 기억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웬만한 일은 잊어버리면서 사는 것도 소확행의 방법일 수 있겠다. [사진 Pixabay]

건망증 하면 김득신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조선의 독서왕으로 유명한 그 김득신 말이다. 김득신이 한 손에 담뱃대를 들고 팔을 휘저으며 길을 갔다. 지나가던 사람이 보니 김득신이 끊임없이 중얼거리는데, “어, 내 담뱃대 어딨지? 아, 여기 있구나. 어? 내 담뱃대? 아, 여기 있구나” 하면서 갔다고 한다. 양팔을 휘저으면서 힘차게 걷다 보니 담뱃대 든 손이 뒤로 갔을 땐 담뱃대가 어디 갔나 했다가 그 손이 다시 앞으로 왔을 때 아 여기 있구나 했다는 것이다.

김득신이 또 하루는 고개 넘어 어디를 가는데,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던 스님을 길에서 만났다. 김득신이 스님에게 어디 가느냐고 물으니 스님은 아무 절에 불공드리러 간다고 했다. 둘이서 산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고 있는데, 김득신이 스님에게 어디 가는 길이냐고 또 물었다. 스님이 불공드리러 간다고 하니 “아, 그러시냐”고 하고는 좀 가다가 또 스님에게 어디 가는 길이냐고 물었다. 스님이 불공드리러 간다고 하니, “아무 절에서 큰 행사가 있는 모양입니다. 오늘 참 스님을 많이도 보네요” 했다고 한다.

조선의 독서왕 김득신은 어렸을 때 천연두를 앓은 후유증으로 건망증을 얻었다는 설이 있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부터 매우 느린 편이었는데 꾸준히 책을 읽은 노력으로 당대에 알아주는 시인으로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백이전(伯夷傳)』을 1억 번이나 읽었다며 자기 서재 이름을 ‘억만재(億萬齋)’라고 지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머리에 모자를 쓰고 있으면서 “내 모자 어디 갔냐”고 찾거나, 핸드폰 들고 통화하면서 “어머, 내가 핸드폰 어디 뒀지?” 하는 정도는 우리 일상이다. 인생을 돌이켜보았을 때 복원하고 재구성해야 할 중요한 기억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웬만한 일은 잊어버리면서 사는 것도 소확행의 방법일 수 있겠다. 그저 내가 걸어 놓은 갓을 발견하고 “오와, 득템!” 하면서 좋아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름 신나는 인생 만드는 비결일 수도 있겠다. 내 똥 밟아 놓고 똥 싼 놈 욕할 때는 스트레스 지수가 좀 올라가기도 하겠지만, 그 또한 풀숲을 벗어나면서 금세 잊을 것이니 별다른 영향은 없을 수도 있겠다.

‘이야기하는 인간’은 기억의 복원과 재구성, 그리고 한편으로는 ‘잊어버리기’를 통해 살아간다. 충분히 풀어헤쳐 진 이야기로 만족감을 얻은 후에는 더 이상 그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건망증과는 좀 다른 층위의 기억 문제이긴 하지만, 이야기의 힘은 ‘충분히 풀어내기’와 ‘적당히 잊어버리기’의 차원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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