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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앗이 음식, 외식, 영화, 찜질방…설이 뚝딱 지나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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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푸르미의 얹혀살기 신기술(13)

“안 간다! 내가 그래도 명색이 가장인데, 명절에 가장이 집을 지켜야지. 누가 올지도 모르는데, 그런 일은 생각도 마라.”

이번 설 연휴엔 강릉에 와서 함께 보내자 권유하는 언니 2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는 아버지 목소리. 혹시나 하며 귀를 쫑긋 세웠던 나는 수화기 내려놓는 ‘딸깍!’ 소리와 함께 어깨가 처진다.

‘왜, 도대체, 명절에 가족이 모여야 하는가? 길은 막히고 모일 수 있는 가족 수도 점점 줄어드는데, 왜, 기어코, 모두 다! 모여야 만족하는가?’

늘 가져온 의문이다. 시골에 계신, 혹은 떨어져 사시는 부모님을 왜 꼭 명절에 만나러 가야 하는가 말이다. 수시로 전화 드리고 각자 형편 따라 찾아뵈면 좋겠건만, 꼭 명절 연휴에 가족이 모두 모여야 만족하는 우리 아버지. 딸만 넷 낳으신 덕에 언니들 시집간 뒤로는 다 함께 동시에 모일 형편도 아닌데,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두고두고 섭섭해하신다. 먼 길 온 사람 반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지 못한 사람을 아쉬워하며 찾으신다.

어머니 세상을 떠나신 뒤론 사위 온다고 음식 해 줄 장모도 없고 딸들이 부산과 대전, 강릉에 사는 것을 감안, 형편 되는대로 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럼에도 명절이 다가오면 나에게 신신당부하신다.

“오라, 마라 하는 얘긴 절대 하지 말고, 온다면 언제 오는가만 물어봐라.”

조심스럽게 언니들 상황을 체크해 보긴 하는데, 솔직히 나도 형부나 조카들이 다 함께 오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다.

지금 사는 오피스텔은 아버지와 나 둘이 살기에 꼭 알맞다. 명절 때 언니들 상황을 체크해 보긴 하는데, 솔직히 형부나 조카들이 다 함께 오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다. [사진 pxhere]

지금 사는 오피스텔은 아버지와 나 둘이 살기에 꼭 알맞다. 명절 때 언니들 상황을 체크해 보긴 하는데, 솔직히 형부나 조카들이 다 함께 오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다. [사진 pxhere]

우선 집이 좁다. 가족이 많을 땐 제법 넓은 아파트에 살았지만, 지금은 아버지와 나 둘이 살기에 꼭 맞은 오피스텔이다. 잘 곳도 이불도 마땅찮다. 음식도 걱정이다. 집에서 먹는 것도 사 먹는 것도 부담이다. 게다가 아버지는 새벽 5시면 일어나 활동하시는 분이라 모처럼 친정에 온 언니들이 맘 놓고 늦잠도 잘 수 없다. 먼 길 온 사람들 잠시 앉아 얼굴만 보고 가라고 할 수도 없고, 오면 오는 대로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고민이 많다. 그런데 올해는 일찌감치 언니1에게서 통보가 왔다.

“우리는 설날 아침 일찍 서울 갈 거야. 같이 떡국 끓여 먹자.”
한술 더 떠 시어머니 모시고 사는 언니3은 설날 전에 미리 온단다.

“형부 일찍 퇴근할 테니까 버스 타고 목요일 오후에 올라가서 설날 아침에 내려오려고.”
언니1과 3이 모두 온다는 속보를 접한 언니 2도 결심한다.

“설날 차례 지내고 바로 서울로 출발할게. 같이 점심 먹을 수 있어.”
세상에 이런 일이, 전원 참석!

언니들이 모두 온다 하면 고맙고 기뻐야 하는데,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사흘 동안 그 많은 사람들이 뭘 먹고 어떻게 자야 하나 마음이 분주해졌다.

다행히 언니1과 2는 설날 당일치기라 잠자리 걱정은 덜었다. 대신 언니3 가족은 장롱 깊이 모셔둔 손님용 목면이불을 쓸 행운을 얻었다. 부산에서 도착하는 목요일 저녁과 금요일 점심은 외식, 금요일 아침과 저녁은 집에서 먹기로 계획하고 조카가 좋아할 밑반찬들을 준비했다. 언니들이 오기까지 머릿속이 복잡하기 그지없었는데, 각 가정에서 품앗이로 가져온 음식에 외식을 배합하고, 영화관과 찜질방, 남한산성 나들이를 배치하니 나름대로 알찬 연휴 일정이 되었다.

가장 만족도가 높은 이는 단연 아버지. 신권을 찾아 예쁜 봉투에 메시지를 적어 세뱃돈을 준비한 아버지는 손주들 세배도 받으시고, 생신 축하 케이크도 미리 드셨다. 순서대로 다녀간 딸들 덕에 축하 촛불이 2번이나 켜졌다. 베개와 의자는 부족했지만, 옹기종기 앉아 밥 먹고 설거지도 나눠 하니 걱정만큼 힘든 일은 없었다. 아버지 심리 상태가 좋으시니 시간이 물 흐르듯 흘렀다.

언니들 가족이 각지에서 모여들 때는 좁디좁던 집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나니 널찍하게 느껴졌다. 일요일엔 교회에 다녀오고 마지막 남은 월요일 하루는 아버지와 둘이 그야말로 맘 편하게 쉬었다. 언니들이 와 준 것만으로 이번 설 연휴는 특별히 한 일 없이 할 일 다 한 셈이 되었다.

할아버지가 5명의 손주를 위해 준비한 세뱃돈 봉투. 봉투 안 금액은 비밀! [사진 푸르미]

할아버지가 5명의 손주를 위해 준비한 세뱃돈 봉투. 봉투 안 금액은 비밀! [사진 푸르미]

명절 연휴가 끝나면 명절증후군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 이를 놓칠세라 TV홈쇼핑에선 ‘고생한 나를 위한 선물’이라는 감언이설로 각종 물건을 팔아대고, 심지어 명상으로 명절 스트레스를 치유하는 콘텐츠도 인기다.

방 2개, 화장실 1개의 전용면적 39㎡ 작은 집에 합숙학원에 입소한 고3 수험생 조카 한 명을 뺀 총 12명의 김씨 일가가 사흘 동안 쉴 새 없이 들고났건만 명절증후군은 없었다. 대신 미니멀 라이프에 빠져 그간 집과 짐을 줄여온 나는 가족이 모이려면 그래도 집이 조금은 더 커야겠구나 하는 과제를 갖게 됐다.

올봄 이사 갈 집은 아버지가 사랑하는 난초를 전시할 베란다가 있고 조식 서비스가 되는 민영임대주택이다. 여가와 운동, 인간관계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아버지 혼자 식사하는 외로움을 덜 수 있는 주거공간을 찾아 헤매고 있다. 이번 이사도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 의뢰인 상황에 맞는 집을 구해주는 방송프로그램의 문을 두드려볼 생각도 해 본다.

“구해줘요, 홈즈!”

공무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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