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권석천 논설위원이 간다

‘직권남용의 남용’ 논란, 대법원은 왜 소심한 경고에 그쳤나

중앙일보

입력 2020.02.03 00:32

지면보기

종합 26면

권석천
권석천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대법원 전원합의체 직권남용 사건 판결

(서울=뉴스1) 이재명 기자 = 김명수 대법원장 등 대법관들이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김기춘·조윤선 등 '블랙리스트' 관련 직권남용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에 참석해 있다. 2020.1.30/뉴스1

(서울=뉴스1) 이재명 기자 = 김명수 대법원장 등 대법관들이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김기춘·조윤선 등 '블랙리스트' 관련 직권남용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에 참석해 있다. 2020.1.30/뉴스1

지난주 목요일(1월 30일) 오후였습니다. 제가 대법원 1호 대법정의 심판대에 오른 것은. 아, 제 소개부터 드려야겠네요. 제 이름은 ‘직권남용’입니다. 그렇게 낯설진 않으시죠? 제 이름이 부쩍 자주 불리기 시작한 건 2016년부텁니다. ‘국정농단’ ‘사법농단’ ‘환경부 블랙리스트’ ‘유재수 감찰 무마’…. 굵직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검찰 수사에 활용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서곤 했습니다.

종전보다 엄격해지긴 했지만
검찰 수사에 큰 영향 없을 듯
‘잘 보이기 위해 한 일’까지
책임지게 한다는 우려 여전

이제 내 운명도 바뀌는 걸까? 그날 대법정은 판사, 검사, 변호인, 그리고 기자들로 오랜만에 북적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주도했다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최종심이 열리는 날이었으니까요. 대법관 전원합의체에서 제 판결이 나오는 것도 처음이고요. 방청객들 얼굴엔 분명한 기준을 제시해주지 않을까, 기대감이 엿보였습니다.

시침이 오후 2시를 가리키자 재판장인 김명수 대법원장과 주심 안철상 대법관 등 대법관들이 대법정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자리에 앉은 김 대법원장이 마이크에 대고 말하더군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는 단순히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는 행위를 하였다는 것만으로 곧바로 성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것’은 별개의 범죄성립요건입니다.”

형법

형법

당사자인 저도 잠시 생각해보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제 이름인 ‘직권남용’은 약칭일 뿐이고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가 진짜 이름이란 얘기였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직권을 남용’했더라도/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것이 아니면/ 형법 제 123조로 처벌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음, 다시 설명을 드리면 기존의 직권남용은 다음과 같은 3단 논법 위에 서 있었습니다.

①A의 직권남용은 위법하다→ ②B가 A의 위법한 지시에 따랐다면 의무 없는 일을 한 것이다→ ③A에게 형법 123조를 적용해 형사처벌한다.

이번 판결의 핵심은 ‘직권을 남용한 지시에 따랐다고 해서 곧바로 의무 없는 일을 했다고 단정해선 안 된다’는 겁니다. 3단 논법에서 ①과 ③을 연결해오던 구름다리(②번)를 없앤 것이지요. 따라서 앞으로 직권남용으로 처벌하려면 하위 공무원 B가 업무협조나 의견교환 차원을 넘어 원칙이나 기준, 절차를 위반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봐야 합니다.

앞서 서울고법 재판부는 “김기춘 전 실장 등이 정부 지원에서 ‘좌파’ 문화예술인들을 배제하기 위해 문화예술위 등 직원들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다”며 14개 유형의 행위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는데요. 대법원은 이 중 2개를 다시 재판해봐야 한다고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재판이 끝나고 대법정에서 나오던 한 변호인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말하더군요.

“뚜렷한 기준을 확립할 기회였는데, 좀 허탈합니다. 대법관들이 일선 법원 판사들처럼 사건의 구체적 내용을 놓고 씨름한 느낌이랄까….”

직권남용죄 발생 추이

직권남용죄 발생 추이

종전보다 엄격해진 게 사실입니다만, 검찰이 저를 공직자 수사의 핵심 도구로 쓰는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 같습니다. ‘권리행사방해’가 되는지부터 보고 ‘직권남용’을 조사하는 것으로 순서를 조정하게 됐다고 할까요. 고등법원 부장판사 출신의 변호사는 이렇게 평하더군요. “의미를 부여하자면 ‘직권남용죄를 함부로 휘두르지는 마라’ 정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큰 물음표가 달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의무 없는 일’을 공무원 등이 알아서 한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슨 얘기냐고요? 그러니까, 현실에서는 직권을 가진 고위 공직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위 공무원이나 관련기관 임직원이 ‘요구받은 범위를 넘어선 일’을 하는 경우가 종종 벌어지곤 합니다. 이를테면 과잉충성 같은 것인데요. 직권남용 의혹을 받게 된 고위 공직자로선 하위 공무원 등이 이상한 일을 벌이면 ‘의무 없는 일을 시킨 것’으로 꼼짝없이 당하게 됩니다.

물론 공직자가 직권을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하위 공무원이 ‘이렇게 하면 나를 잘 봐줄 것’이라며 알아서 한 일까지 책임지우는 것은 부당하지 않을까요? 실제로 직권남용 사건에서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합니다.

14년 전이었습니다. 헌법재판소에서 저에 대해 8대 1로 합헌 결정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권성 재판관이 유일하게 소수의견을 냈는데요. 그는 이렇게 우려했습니다.

“이른바 정권 교체의 경우에 전임 정부의 실정과 비리를 들추어내거나 정치적 보복을 위하여 고위 공직자들을 처벌하는 데 이용될 우려가 있고, 때로는 국정 운영 과정에서 행하여진 순수한 정책적 판단이 비판의 대상이 된 경우에 악화되는 여론을 무마하기 위하여….”

자칫하면 죄형법정주의가 무너지고요. 모든 공직자가 검찰 앞에 잠재적 피의자가 됩니다. 공직자가 잘못했을 때 형사처벌로만 제재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징계할 수도 있고, 탄핵으로 책임을 물을 수도 있습니다. 저를, 즉 직권남용을 남용해선 안 된다는 걸 대법원이 선명하게 보여줄 순 없었을까요. 왜 소심하게 경고하는데 그친 걸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전원합의체=대법원장·대법관 13명 전원이 참여하는 재판으로 대법관 4명씩으로 구성된 소부(小部) 재판과 구분된다.

죄형법정주의=범죄와 형벌은 법률로 정해져야 한다는 대원칙. 명확성·엄격 해석·최소침해의 원칙이 핵심이다.

안철상·노정희 대법관 “검찰의 자의적인 기소가 사법불신 부른다”
안철상

안철상

이번 전원합의체 판결에서도 다수의견을 중심으로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다. 그중에서도 도드라져 보인 것이 안철상·노정희 대법관의 보충의견이었다. 두 대법관은 직권남용 수사·기소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검찰이 문예기금 등 지원 배제라는 ‘최종행위’가 아니라 그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서 행해진 명단 송부, 진행상황 보고, 배제 방침 전달 같은 ‘과정의 행위’를 기소했음을 지적한 것이다.

‘관련기관 직원들은 최종행위에 대해서는 직권남용의 공범이 될 수 있지만, 이 과정의 행위에 대해선 직권남용의 상대방이 될 수 있게 된다. 수사기관이 수사 협조 여부에 따라 자의적으로 관여자를 공범 또는 상대방으로 정하여 기소할 수 있다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다.’ (판결문 74쪽)

또 다른 문제? 검찰이 직권남용 수사 과정에서 참고인으로 소환된 이들을 상대로 “피의자가 될 수 있다”고 압박하거나 “기소 대상에서 빼주겠다”고 회유할 수 있다는 얘기다. 보충의견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최종행위가 기소되었다면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가 성립할 수 있었음에도 과정의 행위만을 기소하여 그 행위가 구성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처벌할 수 없게 된 경우, 일반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직권남용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묻지 못함에 따른 사법불신을 가져올 수 있다.’ (74쪽)

노정희

노정희

대법원 안팎에선 ‘과정의 행위만을 기소한 대표적 사례’로 안태근 전 검사장 사건을 꼽고 있다. 안 전 검사장은 법무부 검찰국장이던 2015년 인사 실무자인 신○○ 검사에게 여주지청에 근무하던 서지현 검사를 통영지청으로 보내는 인사안을 작성하게 시킨 혐의로 기소됐다. 대법원은 지난달 9일 안 전 검사장 사건을 ‘직권남용 무죄’ 취지로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법원 관계자는 “신 검사가 안 전 검사장 지시를 받았거나 그런 생각을 알고 있었다는 전제가 필요하긴 하지만, 검찰이 신 검사를 공범으로 수사하고 기소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했다. 노정희 대법관은 안 전 검사장 사건 주심이었다. 그는 자신이 왜 무죄 취지 판결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밝히고 싶었던 것일까. 2018년 법원행정처장으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3차 조사를 지휘했던 안철상 대법관의 얼굴이 떠오르는 대목도 있다.

‘특정 안(案)을 검토하게 하거나 그 집행을 위한 준비를 하게 한 것만으로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한다고 본다면 예비나 미수를 처벌하지 않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입법 취지에 맞지 않게 된다.’ (76쪽)

대법원 재판에는 대법관들이 살아온 경험과 가치관, 그리고 법률가로서의 불가피함 같은 것들이 섞여 있다. 어쩌면 그것이 그들의 가능성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권석천 논설위원

모비온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