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장해야할 왕의 즉위식, 풍악을 울리지 않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2020.02.02 13:00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9)

단종은 조선왕조 최초로 경복궁에서 왕세자로서 절차에 따른 즉위례를 치른 왕이다. 그는 1441년(세종 23)에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단종은 1448년(세종 30) 8세의 나이로 왕세손에 책봉되었는데, 세종은 이때 “원손(元孫) 이홍위는 천자(天資)가 숙성하고 품성이 영특하고 밝은데, 지금 나이가 스승에게 나갈 만큼 되었으므로 너를 명해 왕세손을 삼는다.”라고 했다.

1450년에는 문종이 즉위하면서 왕세자가 되었고 부왕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사정전에 선왕의 빈소를 차리고 성복한 후 세자가 근정문에서 즉위하고 교서를 반포했다. 실록은 단종이 즉위하는 의식을 아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영월군 영모전에 모셔진 단종 어진. [사진 Wikimedia Commons]

영월군 영모전에 모셔진 단종 어진. [사진 Wikimedia Commons]

즉위하는 의식 (단종 즉위년 5월 18일)
대보를 찬궁(欑宮: 빈전안의 임금의 관을 둔 곳) 남쪽에 놓고 종친과 문무백관이 조복으로 갈아입는다. 상의원의 관원이 면복을 왕세자에게 받들어 드리며 최복(衰服: 상복)을 벗고 면복을 갖춘다. 판통례가 사왕(嗣王)을 이끌고 전정(殿庭) 길 동쪽에 들어와 북향하고 선다. 향 올리기를 끝내면 사왕이 사배하고 일어난다. 영의정이 대보를 받들고 판통례가 사왕을 인도하고 동계로부터 올라와서 들어와 향안 앞에 나와 북향하여 서게 한다.

영의정이 대보를 드리면 사왕이 받아서 근시(近侍)에게 준다. 전하가 사배하고 근시가 대보를 받들고 앞서서 간다. 근시가 대보를 받들고 먼저 내려가 동쪽에 서면 판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내려와 전정 가운데 배위(拜位: 절하는 자리)에 나아가게 한다. 전하가 사배하고 중문으로 나가면 근시가 대보를 받들고 앞서서 간다. 전하가 악차(喔次)에 들면 종친과 백관이 모두 나간다.

어좌를 근정전 한가운데에 베풀어 남향하고 또 보안(寶案) 과 향안(香案)을 설치한다. 병조에서 군사를 정렬하고 전악(典樂)이 악부(樂部)를 베푼다. 어좌에 오르기를 아뢰어 청하면 전하가 악차에 나온다. 전하가 어좌에 오르면 향로에 연기가 오르고 산선 및 여러 호위관·승지·사관·사금이 시위하고 상서관(尙瑞官)이 보(寶)를 베풀기를 모두 평상 의식과 같이 한다. 악부는 베풀기만 하고 연주하지는 않는다. 종친과 백관이 사배하고 일어난다. 통찬이 ‘산호(山呼)’라고 창하면, 종친과 백관이 공수(拱手)하여 이마에 대고 ‘천세(千歲)’라 하며, ‘산호’라고 창하면 ‘천세’라고 한다. 다시 ‘산호’를 창하면 ‘천천세(千千歲)’라고 한다.

종친과 백관은 다시 국궁사배한다. 판통례가 ‘예필(禮畢)’이라고 아뢰면 전하가 어좌에서 내려 여(輿)를 타면 산선 및 호위관이 시위하고 여차로 돌아와서 면복을 벗고 상복을 도로 입는다. 봉례랑이 종친과 문무백관을 나누어 이끌고 나와서 조복을 벗고 도로 상복을 입는다. 그리고 근정문에 허위(虛位: 죽은 왕을 위해 마련한 빈자리)를 베풀고 종친과 문무백관이 최복을 갖추고 동서로 나누어 서고 교서를 반포한다.

모든 의례 절차 중 눈여겨 볼 부분은 ‘악부를 배치하지만 연주하지 않는다.’는 대목이다. 즉 왕의 즉위는 왕조의 새 하늘을 여는 막중한 의식이기 때문에 모든 장엄을 다 베풀어 왕의 위엄을 보이기는 하지만 선왕의 장례로 지극히 슬픈 때이므로 흥겨운 음악을 연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선왕이 아버지인 경우 아들은 아버지를 잃은 불효로 하늘을 우러르지 못할 만큼 사무치고 슬픈 심정을 헤아리는 것이기도 하다.

태어나자마자 모후를 잃고 또다시 부왕을 잃은 어린 왕의 운명은 그의 흐느낌대로 풍전등화였다. 단종에게는 차라리 수양대군이 처음부터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고 부왕 문종이 살아있을 때 모든 상황정리가 끝났더라면 그 어린나이에 목숨을 잃는 비극을 초래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태종이후 또다시 되풀이 되는 비정한 정치판에서 어린 단종은 한군데 의지할 곳 없이 격랑에 표류하다 침몰하는 가여운 신세였다. 단종 즉위 1년 만에 수양대군이 계유정란을 일으켰다. 숙부가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고 죽이기까지 한 것은 태종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사태에 버금가는 왕실의 비극이었다.

단종은 즉위 3년 후 영의정 수양대군에게 양위했다. 이때 단종은 자신의 나이가 어리고 중외(中外)의 일을 알지 못하는 탓으로 대임을 영의정(수양대군)에게 전하여 주려고 한고 말했다. 그러자 군신들이 모두 그 명을 거둘 것을 굳게 청하고 세조 또한 눈물을 흘리며 완강히 사양하였다. 이에 노산군(단종)이 대보를 들여오라고 분부하고 재촉하니 동부승지(同副承旨) 성삼문이 대보를 내다가 바치게 하였다.

노산군이 경회루 아래로 나와서 세조를 부르니, 세조가 달려 들어가고 승지와 사관이 그 뒤를 따랐다. 노산군이 일어서니 세조가 엎드려 울면서 굳게 사양하였다. 노산군이 손으로 대보를 잡아 세조에게 전해 주니, 세조가 더 사양하지 못하고 이를 받고는 오히려 엎드려 있으니, 노산군이 명하여 부액해 나가게 하였다. 세조가 사정전으로 들어가 노산군을 알현하고 면복을 갖추고,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다. - 세조1년(1455년) 윤6월 11일

세조 어진 초본. 1927년 이당 김은호 모사본. [사진 Wikimedia Commons]

세조 어진 초본. 1927년 이당 김은호 모사본. [사진 Wikimedia Commons]

이날 세조는 대위를 굳게 사양하였으나, 종친과 대신들도 모두 종사(宗社)를 위해 사양할 수 없다고 하여 할 수 없이 근정전에서 즉위하고, 주상(主上)을 높여 상왕으로 받들게 되었다고 즉위교서를 반포했다. 세조는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것이 아니라 대위를 받으라는 왕의 명에 놀라 엎드려 울고 극구 사양하였으나 나라 종사를 위해 할 수 없이 즉위한 것이다.

어린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에게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1457년(세조 3) 6월에 성삼문, 박팽년 등의 집현전 학사들이 단종 복위 운동을 펼친 것을 기화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었다. 이때 단종의 나이 17세였다. 그리고 영월로 유배된 단종은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됨에 따라 사약을 받았다. 단종이 죽은 지 200년이 훨씬 지난 뒤 노산군은 1681년(숙종 7)에 노산대군으로 복위된 데 이어, 1698년(숙종 24)에 왕의 시호를 받고 단종으로 추증되었다.

그리고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은 수강궁에서 즉위했다. 1468년(세조 14) 9월 7일 세조는 수강궁((壽康宮: 지금의 창경궁 자리 쯤)에서 승하하기 하루 전 예종에게 선위하였다. 세조는 병 치료를 위하여 수강궁에 머물렀던 까닭으로 환관으로 하여금 경복궁에서 면복을 가지고 오게 하여, 친히 세자에게 내려 주고 즉위하게 하였다. 세자가 수강궁 중문에서 즉위하고서 백관의 하례를 받고 반사(頒赦: 임금이 물건이나 녹봉을 내려 나누어 주던 일)하였다. 병든 세조가 세자에게 중기(重器: 나라의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를 부탁하자 세자는 두 번 세 번 굳이 사양하였으나 유윤(兪允)을 얻지 못하고, 이날 마지못하여 수강궁에서 대위에 올랐다.

이처럼 왕의 즉위는 반드시 궁궐이라는 정해진 장소에서 장엄한 격식으로 치러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즉위가 우선 선왕의 승하 장소와 연결되어 있고 대부분 선왕을 사모하는 마음에 슬프게 울고 사양을 거듭하다가 마지못해 위에 오르고, 즉위례를 마치고는 다시 상주로서 역할을 해야 하므로 매우 간단히 진행되기도 한다. 더구나 중종의 경우처럼 진성 대군은 반정(反正: 중종반정 1506년)을 일으켜 연산군을 내쫓고 근정전에서 즉위했는데 창졸간에 면복과 면류관을 갖출 겨를이 없어서 익선관(翼善冠)과 곤룡포로 즉위하는 경우도 있었다.(卽位當用袞冕, 而用此冠服, 倉卒未暇備也)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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