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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달 몸 수그린채 반지하방 女 엿본 男···스토킹 처벌 못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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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대문구에서 3개월간 20대 여성이 거주하는 반지하 원룸을 훔쳐본 40대 남성이 검찰에 기소의견 송치됐다. [MBC 뉴스 캡처]

서울 동대문구에서 3개월간 20대 여성이 거주하는 반지하 원룸을 훔쳐본 40대 남성이 검찰에 기소의견 송치됐다. [MBC 뉴스 캡처]

서울 동대문구의 반지하 방에서 살던 여성 A씨는 어느 날 창문 밖을 바라보다 사람 얼굴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한 중년 남성이 창밖에 몸을 수그린 채 방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창문을 가리고 불을 꺼보기도 했지만, 남성은 3개월간 찾아와 A씨의 방을 엿봤다. A씨는 인근 폐쇄회로(CC)TV 영상을 확보해 이를 경찰에 신고했다. 3개월 뒤 경찰은 '남자가 문을 두드리거나 창문을 여는 직접적인 행위를 하지 않아 처벌할 방법이 없다'며 수사를 끝냈다.

1년 뒤, A씨의 사건은 언론에 보도됐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에서는 "‘훔쳐보기’가 아니라 ‘스토킹’ 아니냐" "어떻게 아무런 처벌도 하지 않을 수 있냐"는 등 비난 여론이 거세졌고, 경찰은 지난해 말부터 다시 수사를 시작해 최근 40대 남성 B씨를 입건해 검찰에 기소의견으로 넘겼다. A씨가 집을 옮기고 정신적 고통을 호소한 뒤였다.

‘훔쳐보기’ 3개월, 처벌 가능할까?

법조계 인사들에 따르면 B씨는 검찰에 기소돼 실제로 처벌을 받게 될 가능성이 크다. 법무법인 서담의 김의지 변호사는 "B씨에게 적용된 죄명은 ‘주거침입 미수’로, 주거침입죄의 보호 법익은 ‘주거 생활의 평온’이다"고 설명했다. 그는 "문손잡이를 잡거나 창문을 여는 등 주거침입 착수 행위가 없었다고 치더라도 창문에 얼굴을 대고 피해자를 몇 달간 관찰하고 이로 인해 피해자가 정신적 충격에 이사까지 결행하는 상당한 피해를 보았기 때문에 검찰에서 기소를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다만 B씨의 행위는 현행법상 스토킹 범죄라고 하기 어렵다. 형법에 ‘스토킹 범죄’에 대한 정의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서혜진 변호사(더라이트하우스 법률사무소)는 "‘스토킹 범죄’가 정의돼 있지 않아 엿보기만으로는 형법상 처벌할 근거가 없다. 무조건 경찰의 대처가 소극적이었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경범죄처벌법이 ‘상대가 원하지 않는 만남을 계속 요구하거나, 반복해서 한 대상을 지켜보거나 따라가는 행위’를 ‘지속적 괴롭힘’이라 규정하고 처벌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처벌은 범칙금 8만원이 전부"라면서도 "다만 B씨의 행위는 법무부가 입법 예고한 정부 안에 따라 충분히 ‘스토킹 범죄’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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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킹 처벌법, 국회 제출도 안 돼

법무부는 2018년 5월 ‘스토킹 범죄 처벌법’을 입법 예고했다. 해당 법안은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정당한 이유 없이 계속 피해자를 따라다니거나 지켜보고 기다리는 등 행위로 불안감ㆍ공포심을 일으키는 것’으로 스토킹 범죄를 정의했다. 당초 법무부는 "스토킹을 범죄로 규정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겠다"며 법안을 내놨지만, 정작 해당 법안은 총선을 앞둔 지금까지 국회 제출도 되지 못했다.

서 변호사는 "미국 등 대부분 국가는 ‘스토킹 범죄’를 별도로 규정하고 처벌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스토킹은 통념과 달리 사회에서 많이 발생하는 범죄고,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피해가 반복되기 때문에 한 사람의 일상을 파괴할 수도 있다"며 "스토킹 피해자들은 대부분 피해를 겪은 뒤 집이나 직장을 옮기거나 이름까지 바꾸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처벌 법령이 없기 때문에 사법기관에서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경우가 많다"고 비판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한민경 연구원도 "‘스토킹’은 범행의 전 단계"라며 "범행을 하겠다는 의도가 있는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특정 지역을 배회하며 피해 대상을 물색하고 찾아다니는 과정을 ‘스토킹’의 단계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연구원은 “통계적으로 성폭력 범죄는 여성 1인 가구 밀집 지역에서 빈발한 것으로 나타난다"며 "성폭력 범죄 예방의 측면에서 이들 지역에 대한 단속 및 순찰을 강화하고, 스토킹 범죄를 단계적으로 처벌하는 법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병준 기자 lee.byungju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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