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을 짝사랑한 여성, 그가 죽은 후 1년간 상복 입어

중앙일보

입력 2020.01.31 12:00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61)

파리에 있는 페르 라세즈 묘지의 쇼팽의 무덤. 그의 무덤 앞에는 항상 싱싱한 꽃이 놓여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파리에 있는 페르 라세즈 묘지의 쇼팽의 무덤. 그의 무덤 앞에는 항상 싱싱한 꽃이 놓여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쇼팽은 산채 묻히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는 숨이 넘어간 것을 꼭 확인해 달라고 신신 당부를 했었다. 그의 아버지도 똑 같은 것을 원했었다. 새벽 2시경 쇼팽이 숨을 거두었고 허둥지둥하는 사이에 금방 날이 밝았다. 그를 돌보아 주었던 크뤼베이에르 박사에 의해 부검이 진행되었다. 쇼팽이 바라던 대로 심장은 바르샤바로 보내지기 위해 적출되었고 시신은 마들렌느 성당의 지하에 안치되었다.

쇼팽은, 생전에 나폴레옹의 유해 안장식에서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될 때 큰 감명을 받았었다. 그의 장례식에도 연주되기에 좋은 곡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곡에 여성 가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쇼팽이 아꼈던 폴린 비아르도는 기꺼이 가수로 참가하려 했지만 일찍이 마들렌느 대성당 안에서 여성이 노래한 적은 없었기에 성당 측은 난감해 했다.

장례식은 2주나 연기되었다. 대주교님의 특별 허가가 있었고 폴린은 장막 뒤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허용되었다. 장례식에는 많은 파리의 명사들이 모였다. 성당 주위에 몰린 사람이 수천 명에 달했다. 초대권을 가진 사람만 성당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의식 도중에는 쇼팽이 마요르카에서 완성했던 전주곡 작품번호 28번 중 4번째, 6번째 곡도 연주되었다.

쇼팽은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다. 그가 바르샤바를 떠날 때 가지고 왔던 은잔의 흙이 시신 위에 뿌려졌다. 그곳 묘지에는 많은 명사들이 잠들어 있다. 쇼팽의 옆에도 유명 음악가들이 여럿 묻혀있다. 하지만 매일 싱싱한 꽃이 한 가득 놓이는 곳은 그의 무덤이 유일하다.

누나 루드비카는 쇼팽의 물건들을 챙겼는데 그가 즐겨 입던 옷에는 수첩이 들어있었고 거기에는 조르주 상드의 머리카락 한 줌이 끼워져 있었다. 어떤 상자 안을 보니 상드가 보낸 200여통의 편지도 곱게 보관되어 있었다. 장례식을 마치고 루드비카는 쇼팽의 심장과 유품을 바르샤바로 가져갔다.

1890~1900년경의 마들렌느 성당. 쇼팽의 장례식이 거행된 곳이다. 미국 의회 도서관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

1890~1900년경의 마들렌느 성당. 쇼팽의 장례식이 거행된 곳이다. 미국 의회 도서관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

그녀가 국경을 지날 때 경비는 편지가 든 상자가 수상하다며 압수했다. 루드비카는 더 소중하게 생각한 쇼팽의 심장을 잘 감추어 바르샤바로 가져갔고 후에 성십자가 성당에 안치될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1851년, 오페라 『춘희』의 원작자 알렉상드르 뒤마(1824-1895)가 우연히 같은 초소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 편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경비는 편지가 든 상자를 돌려주려 했으나 주인의 연락처를 몰랐다고 했다. 뒤마는 즉시 친구였던 조르주 상드에게 그 소식을 알렸고 그녀의 요청에 따라 편지는 노앙으로 보내졌다. 편지를 받은 상드는 그것을 태워버렸다. 수만 통 남아있는 상드의 편지 중에 쇼팽에게 보낸 편지가 들어있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제자 제인 스털링(1804~1859)이 쇼팽에게 보인 모습은 놀라웠다. 제인은 쇼팽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에게 충직했다. 제인은 쇼팽의 장례비용뿐만 아니라 쇼팽의 누나 루드비카가 바르샤바로 돌아 갈 때의 여행비용도 모두 부담했다. 그리고 쇼팽이 남김 유품을 경매를 통해 매입하였고 쇼팽이 쓰던 피아노는 바르샤바로 보내주었다.

제인은 자기가 매입한 유품을 스코틀랜드로 가져가 따로 방을 만들어 잘 보관하였다. 쇼팽의 가족이 유작을 출판하기로 결정했을 때, 자신이 사들인 미 출판 악보를 활용하여 유작의 정리, 출판에도 도움을 주었고, 쇼팽 연구가들에게도 수집한 자료를 제공하기도 했다.

쇼팽의 사망 일주 기일에는 가족에게 부탁하여 바르샤바의 흙을 가져다 쇼팽의 무덤 주위에 뿌렸다.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였지만 그녀는 쇼팽의 사후 일년간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았고 검은 상복을 입었다. 그런 제인을 미망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녀는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제인 스털링과 어린 질녀. 1840년경. Achille Deveria 그림. [사진 Wikimedia Commons]

제인 스털링과 어린 질녀. 1840년경. Achille Deveria 그림. [사진 Wikimedia Commons]

부유한 유력 가문의 1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제인은 10대에 양친을 여의고 큰 재산을 물려받았다. 인기도 있어서 30곳 이상에서 청혼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일찍 남편과 사별한 언니 어스킨 부인과 같이 고향 스코틀랜드와 파리를 오가며 생활했다. 솔랑주는 제인이 키가 컸고 나이에 비해 어려 보였으며 예뻤다고 했다.

음악과 예술에 관심이 많았고 프로테스탄트 운동에도 열심이었다. 쇼팽을 알게 된 것은 1842~1843년경이었는데 처음 소개받았을 때부터 둘은 서로를 존중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쇼팽의 기록에 언급되는 것은 1844년에 가서인데 그만큼 제인이 조용하고 튀지 않는 성격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쇼팽에 대한 제인의 감정은 특별했다. 그가 상드와 헤어지자 제인은 그 동안 숨겨왔던 자신의 애정을 드러냈다. 그녀는 홀로 지내던 쇼팽의 비서, 매니저, 대리인의 역할을 하면서, 상드가 했던 것처럼 모성적 보살핌을 그에게 주려 노력했다. 1848년 2월에 있었던 쇼팽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연주회에서는 연주홀의 난방, 환기, 꽃 장식 등을 직접 챙겨서 그가 불편하지 않도록 노력했었다.

상드와 헤어진 후 건강이 악화된 쇼팽은, 연주회에 온 힘을 쏟아내고 무대에서 당당히 걸어 내려왔지만 대기실에 오자마자 제인에게 기대어 쓰러졌었다. 그는 그 후 심하게 앓아 한동안 일어서질 못했다. 제인은 마치 쇼팽의 보호자인 듯 바르샤바의 가족들과도 수시로 편지를 주고 받았고 가족에게는 신년 선물을 보내기도 하였다.

제인은 연주회 후 2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쇼팽이 고립되었을 때 그를 런던으로 이끌었고, 그곳에서 무더위 속에 버려졌을 때는 스코틀랜드로 초대했었다. 쇼팽이 파리로 돌아와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는 거금을 보조하였고 마지막 큰 아파트의 월세도 직접 부담하였다.

제인의 마음을 잘 알았지만 쇼팽은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둘 사이의 감정을 우정이라 단정하고 제인에게도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했다. 나름 흠 잡을 데 없는 여인으로서 이런 거절을 들으면 보통은 억하심정에 미움을 가질 수도 있고, 적어도 더 이상 도와줄 생각은 안 할 것이다. 하지만 제인은 그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쇼팽의 데드마스크. 스위스 라페르스빌(Rapperswil)의 폴란드 박물관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

쇼팽의 데드마스크. 스위스 라페르스빌(Rapperswil)의 폴란드 박물관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

같은 6살 연상이었는데 왜 쇼팽은 상드와 달리 제인에게서는 매력을 찾지 못한 걸까? 제인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섣부른 판단이 될 수도 있는데, 필자가 느끼기에 제인은 ‘곰형’ 인물이었던 것 같다. 크고 늘씬한 체구에 표정은 엄숙했고 옷도 짙은 색의 진중한 빛으로 입었다고 했다. 생각과 신념은 뚜렷했고 목소리에는 약간 쉰 소리가 섞였다고 한다.

속은 깊으나 그것을 잘 드러내지 않고 먼저 나서지도 않으면서 뒤에서 묵묵히 사랑하는 대상에게 충정을 다하는 그런 유형의 사람으로 여겨진다. 별다른 생각 없이 막 살았는데 어느 날 앞이 막혀 당황할 때, 조용히 뒤에서 나타나 구원의 손길을 주는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큰 복이다. 곰형의 인물은 의리와 곧은 심성이 특징이나 인정과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아담한 체형을 가진 조르주 상드의 모습은 매우 다양하다. 제인과 비교하기 위해 그 다양한 상드의 모습 중에서 필자는 ‘여우형’ 혹은 ‘토끼형’ 인물의 특징에 주목하려 한다. 물론 이러한 추론에도 허점이 많을 수 있다는 위험을 무릅쓰겠다. (상드는 특히 개방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상드는 조용히 뒤에 머무는 것보다 원하는 것을 앞서서 실행하는 유형에 가까웠다. 요구하지 않아도 미리미리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챙기고 적극 권하는 사람이었다. 상드는 아침 레슨 시간에 서두르는 쇼팽을 붙잡아 따뜻한 수프와 코코아를 빠뜨리지 않도록 했다고 한다. 화제도 풍부하고 즐거운 일을 주도적으로 제안하는 스타일의 인물로 생각된다.

상드는 많은 사람과 교류했었는데 그녀가 먼저 다가가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작품을 칭찬하는 편지를 보내거나, 사상에 존경심과 동의를 표시하며 다가갔다. 그녀의 살가운 접근에 처음에는 그녀를 싫어했던 상대가 마음을 바꾼 경우가 꽤 있었다. 곰형과 달리 이런 형의 인물은 사람들의 뒤보다 앞이 더 익숙하고, 대체로 원하는 것을 스스로 얻어낸다.

여우형에다 토끼형이 섞인 인물과 같이 있으면 즐겁다. 그러나 다소 답답함이 있더라도, 배신하지 않은 쪽은 곰형 인물이다. 어떤 이는 제인 이야말로 쇼팽을 진정 희생적으로 사랑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쇼팽이 생전에 그녀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기도 한다.

쇼팽의 머리카락. 바르샤바 쇼팽 기념관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

쇼팽의 머리카락. 바르샤바 쇼팽 기념관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

제인이 세상을 떠난 후 유언에 따라 그녀가 보관하던 쇼팽의 유품은 바르샤바의 가족에게 보내졌는데, 그 대부분은 다른 유품과 함께 1863년 러시아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제인이 간직했던 쇼팽의 적갈색 머리카락 한 묶음은 살아 남았다. 쇼팽은 상드의 머리카락을 끝까지 간직했고, 제인은 쇼팽의 머리카락을 끝까지 남긴 것이다.

쇼팽은 제인에게 작품번호 55의 녹턴 2곡을 헌정했다. 특히 첫 번째 곡에는 쇼팽 특유의 감정이 겹겹이 실려있다. 다음 편에는 상드를 비롯한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맺는 말이 있다.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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