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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2020년, 서른 즈음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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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조영태 서울대 교수·인구학

조영태 서울대 교수·인구학

얼마 전 연구실에서 생일을 맞이한 학생이 있어 연구실원들끼리 조촐하게 생일축하 케이크를 잘랐다. 생일을 맞이한 학생이 서른 번째 생일이라며, 장난스럽게 고(故) 김광석씨가 불렀던 ‘서른 즈음에’의 서두 한 소절을 시작하자 다른 학생들도 함께 부르는 것이었다. 내가 서른 즈음이었을 때와 비교하여 외모는 물론이고 모든 것이 어려 보이기만 한 90년대생 학생들이 이 노래의 감성을 이해나 할까? 라는 약간의 꼰대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물었다. 당신들이 1990년대 중반에 발표된 이 노래에 담긴 감성을 알기나 하고 따라 부르는 것이냐고. 그러자 생일을 맞은 학생이 대답했다. 감성이요? 당연히 알 수가 없죠. 가사가 지금의 서른 즈음의 삶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노래를 부른 것은 그냥 제목이 나의 나이를 이야기하고 있고, 워낙 명곡으로 알려져 있는데 부모님이 자주 흥얼거리셔서 나도 그냥 알게 된 거죠.

서른 살이 받는 인구 압박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 #기성세대의 이해와 관심보다는 #서로 다른 인구임을 인정해야

대답을 듣고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2020년 서른 살이 어떻게 1990년대 서른 살의 감성을 이해하겠으며, 반대로 1990년대 서른 살의 감성을 어찌 2020년 서른 살의 삶에 대입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1990년대와 2020년 서른 살이 차이하고 있는 사회적 위치가 천양지차로 다르기 때문이다.

통계청이 제공하고 있는 통계지리정보시스템에 따르면 1995년 우리나라에는 약 4천 5백만 명이 살고 있었고, 평균 연령이 31.2세였다. 인구피라미드의 모습은 평균 연령 위쪽으로는 명확한 삼각형이고 아래로는 들쑥날쑥하지만 전반적으로 인구의 크기가 줄어드는 역삼각형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김광석씨가 구성진 목소리와 스잔한 가사로 담아냈던 서른 즈음은 바로 당시 우리나라 허리 연령대이며 가장 수가 많은 사람들의 삶이었다. 허리였기 때문에 서른 살은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충분히 성인이었고 돌봐야 할 것들이 많은 어른이었다. 노래의 가사처럼 또 하루 멀어져가고 저물어 가는 감성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인구학적 위치였던 것이다.

반면 2020년 현재에는 약 5천 2백만 명이 살고 있고, 평균 연령은 42.8세다. 인구피라미드의 모습은 서른 살 위로는 계속 인구가 많아지다가 60세를 계기로 줄어드는 다이아몬드 형태이고, 서른 살 아래로는 인구가 급감하는 명확한 역삼각형이다. 인구피라미드의 형태만 보더라도 2020년과 1995년은 완전히 다른 사회이기 때문에 비록 생물학적인 나이는 같더라도 서른 즈음이 차지하는 사회적 위치는 절대로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 1995년의 서른 즈음이 더 어른이고 2020년의 서른 즈음은 어리다는 말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로, 과거의 서른 즈음은 가정을 꾸리고 평생직장을 갖는 사회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어른의 대접을 받았고 스스로도 어른이라고 여겼을 테지만 사실 어른으로서 짊어지어야 할 사회적 부담의 무게는 2020년의 서른 즈음이 더욱 무겁다.

인구학에는 ‘인구 압박’이라는 용어가 있다. 어떤 연령이 다른 연령 혹은 연령 집단에 비해 얼마나 큰지 작은지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만일 30세가 100명 있는데 생산연령대인 31~59세가 1000명이면 30세 인구집단은 10만큼의 인구 압박을 받는 다는 것이다. 당연히 높은 숫자는 높은 압력을 의미한다. 1995년 서른 살에게 지워졌던 31~59세의 압박은 20.3이었다. 2020년 현재 서른 살은 34.5배의 압박을 받고 있다. 만일 무게를 지우는 연령대를 서른 살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31~39세로 좁혀보면 1995년 압박의 강도는 9.0, 2020년 압박의 강도는 9.6이다. 이렇게 보면 30대 인구들 사이에서의 인구압박은 과거나 지금이나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교육 수준을 고려하면 양상은 달라진다. 대학입학비율을 고려하여 인구압박 강도를 산출해보면, 100명 중 20~30명만 대학에 진학하고 1995년 서른 살이 된 사람들은 31~39세로부터 약 7.5배의 인구압박을 받았다. 반면 100명 중 80명 정도가 대학에 진학했던 2020년의 서른 살에게 지워진 인구압박은 10.1배나 된다.

서른 즈음의 연령대는 청년(靑年)이다. 푸르다는 것은 생기가 넘치고 자라난다는 의미인데 언제부터인가 ‘청년=푸르지 못한 연령대=자라지 못한 연령대’라는 의미로 변질되어 버린 듯하다. 이렇게 의미가 바뀐 이유가 2020년 서른 즈음 인구가 과거에 비해 어리거나 편해져서가 아니라 바로 1995년 서른 즈음은 상상도 해보지 못했을 인구압박에 기인한 것이다. 커져버린 인구압박의 무게는 자연스레 사회적 진도를 늦춰 놓았다.

그럼 우리는 엄청난 수준의 인구압박을 받고 있다니 2020년 서른 즈음의 청년을 다독이며 늦어도 괜찮다고 말해 주어야 하는가? 아니다. 이 질문 역시 기성세대의 눈과 감성으로 오늘의 청년을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에서 나온 발상이다. 필자의 생각으론 굳이 서른 즈음을 이해하려 노력할 필요없이 그냥 다름을 인정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왜냐하면 1995년에 비해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무게를 톡톡 튀는 감성과 재기발랄함으로 극복해 가고 있는 것이 2020년의 서른 즈음이기 때문이다.

조영태 서울대 교수·인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