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가린 ‘기생충’ 포스터…봉 감독도 몰랐죠

중앙일보

입력 2020.01.29 00:02

업데이트 2020.01.29 07:13

지면보기

종합 23면

영화 ‘기생충’ 스틸 사진 작가 이재혁씨가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자신이 촬영한 ‘기생충’ 스틸 한 컷을 들어보였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영화 ‘기생충’ 스틸 사진 작가 이재혁씨가 중앙일보 스튜디오에서 자신이 촬영한 ‘기생충’ 스틸 한 컷을 들어보였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골든글로브·아카데미상 후보 오른 외국영화들 포스터랑 있어도 ‘기생충’만 눈에 확 보이는 거예요. 외국에서도 패러디하고. 정말 많은 사람이 기억할 만한 사진이 됐구나, 이제 영화를 그만둬도 여한이 없다, 그랬죠.”

포스터 스틸사진 찍은 이재혁 작가
영국 화가 호크니의 느낌 살리려
배우들에게 ‘수영장’ 작품 보여줘
눈 가린 건 김상만 감독 아이디어
‘제시카송’ 함께 해외 패러디 열풍

설 연휴 전, 이재혁(50) 사진작가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소감이다. 그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의 스틸·포스터를 촬영했다. ‘기생충’은 지난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올해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고, 다음 달 9일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6개 부문 후보까지 올랐다.

그가 촬영한 영화의 본 포스터는 ‘제시카송’과 함께 패러디 열풍도 불었는데, 포스터 속 인물들의 눈을 가릴 줄은 배우들도, 자신도 몰랐단다. “디자인 다 돼서 나올 때 눈 가린 버전, 안 가린 버전이 있었죠. 가린 게 느낌이 확 사는 거예요. 포스터를 만든 김상만 감독이 방점을 찍은 거죠.”

영국 화가 호크니의 수영장 시리즈 중 ‘예술가의 초상’(ⓒ Christies Images Ltd 2018).

영국 화가 호크니의 수영장 시리즈 중 ‘예술가의 초상’(ⓒ Christies Images Ltd 2018).

‘더 테너 리리코 스핀토’ 등을 만든 영화감독이자 포스터 디자이너인 김 감독은 그의 고교 1년 선배다. “‘내 마음의 풍금’ ‘신장개업’ 이후 오랜만에 같이했죠. 상만 형이 ‘기생충’ 포스터가 영국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수영장 시리즈 느낌이면 좋겠다며 그림을 보여줬어요.” 수영장 시리즈엔 호크니가 미국 로스앤젤리스(LA)의 햇볕 짱짱한 날씨에 받은 충격이 담겨있다고 했다. “저희도 정오 광 조명을 했죠. 정오에 내리쬐는 그 아른아른하는 느낌으로요.”

박사장(이선균)네 가든 파티신 촬영 중 딱 하루 흐린 날이 포스터 촬영에 주어졌다. 포스터를 마주하고 왼쪽 위로 조명을 최대한 높이 올리고 송강호 쪽에 강한 빛을 쐈다. “호크니 그림을 배우들한테도 보여줬어요. (표정을) 감정 없이, 무심하게(하라고). 각 위치 인물마다 찍어 나중에 합성했어요.”

눈 가린 이유에 대해 그는 “봉 감독님도 모른다. 김상만 감독님이 알 텐데 물어보진 않았다”며 “지금도 안 알려진 거면 그렇게 남겨놔도 좋은 것 같다”고 했다. 다만, 빈부 양극화를 그린 영화 주제처럼 눈가리개도 부자인 박사장네 가족은 흰색, 가난한 기택(송강호)네는 검은색인 건 짚어냈다. “가려져도 계층이 다른 거겠죠.”

1997년 영화 스틸을 찍기 시작해서 올해로 23년째. 그가 봉 감독과 함께한 건 ‘설국열차’ ‘옥자’에 이어 세 번째다. “콘티가 정확해요. ‘기생충’에서 사람 피랑 매실청이 섞이는데, 그 둘이 섞이는 ‘라인’은 감독님이 현장에서 아이패드로 찍어 특수효과팀에 요청한 거예요. 피 선이 몇 퍼센트까지 와야 하고 수석은 어디 떨어지고. 전체적인 타이밍이 기가 막혔죠.” ‘기생충’ 촬영 내내 현장을 따라다닌 그는 영화 스틸 작가란 직업에 대해 “현장에서 기록하는 사람, 사진 일을 하는 영화 크루”라고 정의했다.

“기택네 가족이 빗속에 동네로 내려오는 사진을 봉 감독이 좋아했어요. 촬영 초기 만리재 고개 근처였는데 특유의 색감과 빈티지 같은 느낌, 이런 게 깔끔한 성북동이나 도심과 다르잖아요. 배우에 의존하는 영화도 있지만 ‘기생충’은 인물은 물론 공간과 소품 모든 게 다 주인공이었어요.”

영화 ‘기생충’ 공식 포스터(왼쪽)와 이를 만화 캐릭터 아기공룡 둘리 버전으로 패러디한 포스터.

영화 ‘기생충’ 공식 포스터(왼쪽)와 이를 만화 캐릭터 아기공룡 둘리 버전으로 패러디한 포스터.

스포일러 탓에 찍어놓고도 못 쓴 스틸이 더 많단다. 작가가 가장 애착을 가진 장면은 기택이 박사장네 주차장에서 내려오는 장면이다. 한국 개봉땐 쉬쉬한 장면을 북미 개봉 시엔 과감하게 썼다.

그는 박사장네 가정부 문광(이정은)의 한순간도 손꼽았다. “머리카락과 스카프 흩날리고, 고급소재 옷 입고 쫓겨나는데 뒤돌면 쫓겨나온 박사장네 부잣집이 있는 장면이다. (이)정은씨한테 그랬어요, 구라파 여배우처럼 나왔다고. 영상에선 스쳐 지나간 표정을 포착하는 것도 스틸 작업의 묘미죠.”

그는 그림에 영감을 받는 편이다. ‘기생충’ 땐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기택네 집 같은 색감의 그림을 기억해뒀다. “칙칙한 녹색인데, 곰팡이 같은 느낌이죠. 봉 감독님, 홍경표 촬영감독님이 설계한 기택네 조명이 구식 형광등이잖아요. 거기에 침수가 반복되고 습한 반지하 집의 벽, 그늘진 부분에 그런 색감이 나도록 작업했죠.”

그는 최동훈 감독의 ‘타짜’,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 장준환 감독의 ‘1987’ 등에서도 작업했다. 봉 감독이 “천재 화가 느낌”이라면, ‘아가씨’를 함께한 박찬욱 감독은 “문인이 기품 있게 난을 치는 듯했다”고 돌이켰다. 그는 박 감독의 영화사 모호필름이 제작하고, 봉 감독이 만든 ‘설국열차’의 스틸 작업도 했다.

‘설국열차’ 스틸을 본 할리우드 SF 영화 프로듀서 제의로 크리스틴 스튜어트 주연의 ‘이퀄스’, 쉐일린 우들리 주연의 ‘엔딩스, 비기닝스’ 등 할리우드 영화도 잇달아 찍게 됐다. 마블영화 ‘어벤져스:에이지 오브 울트론’ 한국 촬영 현장에도 스틸 작가로 참여했다.

경성대에서 광고사진을 전공한 그를 영화로 이끈 건 형 이광모 감독이다. 이 감독은 열두 살 소년의 눈으로 한국전쟁을 그린 데뷔작 ‘아름다운 시절’(1997)로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되는 등 국내외에서 주목받았다. 이 작가도 이 영화로 스틸 작가에 데뷔했다. 지금껏 스틸을 찍은 영화가 30여 편이다.

최근 공유, 박보검 주연 SF 영화 ‘서복’ 작업을 마친 그는 3월부터 ‘타짜’ 최동훈 감독의 새 영화 현장에 돌입한다. 박찬욱 감독과 ‘아가씨’ 사진집도 준비 중이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모비온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