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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부장들' 감독 "18년 장기집권 피로, 내려올 시기 놓쳤을 것"

중앙일보

입력

엿새째 3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남산의 부장들' 우민호 감독을 개봉 전인 20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났다. [사진 쇼박스]

엿새째 3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남산의 부장들' 우민호 감독을 개봉 전인 20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났다. [사진 쇼박스]

“10ㆍ26사건과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프랑스 파리 실종사건이 불과 20일 차이였어요.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 명령으로 파리 실종사건을 주도하고 20일 후에 그 충성이 (대통령을 향한) 총성으로 바뀌었죠. 서로 다른 사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걸 메인으로 10ㆍ26사건 발생까지, 영화에 담은 40일이 가장 흥미로웠죠.”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사건을 다룬 ‘남산의 부장들’(22일 개봉)로 설 연휴 극장가를 휩쓴 우민호(49) 감독의 말이다. 5년 전 ‘내부자들’로 900만 흥행(본편+감독판)을 거둔 배우 이병헌과 다시 뭉쳐, 개봉 엿새째 300만 관객을 돌파했다. 흥행 속도도 빠른 편이다. ‘택시운전사’(나흘째 300만 돌파)엔 못 미쳤지만, ‘변호인’(8일째) ‘1987’(9일째)보단 앞섰다. 우 감독을 20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카페에서 만났다.

300만 돌파 영화 '남산의 부장들' #'내부자들' 우민호 감독, 이병헌 재회 #"18년 독재 충성 왜 총성 됐나, #10ㆍ26 인물들 내면 좇았죠" #청와대·중앙정보부 등 세트 구현 #미·프 로케이션…총제작비 208억

1026 마주한 두 번의 충격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이병헌이 연기한 중앙정보부장 김규평. 실존인물 김재규가 모델이다.[사진 쇼박스]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이병헌이 연기한 중앙정보부장 김규평. 실존인물 김재규가 모델이다.[사진 쇼박스]

영화는 1979년 10월 26일, 18년간 군림한 대통령(이성민)이 바로 그 독재권력의 수족이던 중앙정보부장(이병헌)의 총성에 무너진 그 날까지 숨 가쁘게 내달린다. ‘내부자들’이 권력층의 검은 유착에 칼날을 댄 질퍽한 해부도였다면, 이번엔 사건에 얽힌 인물들의 내면을 현미경을 들이댄 듯 집요하게 그렸다.

1990년대 동아일보 연재 취재기를 엮어낸 동명 베스트셀러에서 마지막 40일에 집중해, 우 감독이 공동각본과 연출을 겸했다.

“10ㆍ26사건이 제가 아홉 살 때였죠. 그땐 어렸으니까, ‘큰일 났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죽었다’. 되게 충격이었던 기억이 나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캐릭터는 배우 이성민이 특수분장을 더해 연기했다. 청와대 집무실은 세트로 지은 것.. [사진 쇼박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캐릭터는 배우 이성민이 특수분장을 더해 연기했다. 청와대 집무실은 세트로 지은 것.. [사진 쇼박스]

18년 뒤 군 제대 후 우연히 접한 동명 원작은 또 다른 충격이었다.

“제목에 이끌려서 책을 펼쳤어요. 제 세대만 해도 ‘남산’이 상징하는 바를 안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런데도 몰랐던, 놀라운 현대사가 있더군요. 권력의 상징이자, 공작과 음모가 팽배했던 곳, 중앙정보부란 존재가 놀라웠죠.”
함부로 덤벼들기 힘든 거대한 이야기였다. ‘내부자들’을 끝내고 4년 전에야 원작 판권 구매에 나섰던 이유다.

독재란 이름의 폭주기관차

그는 “정치색을 띠는 영화가 아니라”고 거듭 강조했다. “인물들의 공과 과를 평가하지 않았다. 그런 절대 권력자가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뭐였을지, 그들의 내면에서 찾아보려 했다”고 했다.

왼쪽부터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병헌)은 오랜 동지이던 전 정보부장 박용각(곽도원)이 미국에서 박 대통령 독재정권 실체를 고발하자 더 큰 폭로를 막으러 나선다. 이번 영화는 실제 미국과 프랑스 로케이션 촬영했다.[사진 쇼박스]

왼쪽부터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병헌)은 오랜 동지이던 전 정보부장 박용각(곽도원)이 미국에서 박 대통령 독재정권 실체를 고발하자 더 큰 폭로를 막으러 나선다. 이번 영화는 실제 미국과 프랑스 로케이션 촬영했다.[사진 쇼박스]

“18년이란 장기집권의 피곤함, 어떤 의미에선 자리에서 내려오고 싶지 않은 집착도 있었겠죠. 달리 보면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아, 내려오고 싶어도 내려올 시기를 놓칠 수 있었겠구나. 이미 폭주하는 기관차에서 거기 그냥, 안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겠구나. 그게 권력의 속성이잖아요.”

그런 심리를 실어낼 배우가 중요했다. “캐스팅에 첫째 기준은 외모 싱크로율이 아닌 그 닮음을 연기할 수 있는” 탁월한 배우들. 이성민이 연기한 박 대통령 역만은 예외였다.

“남녀노소 다 아는 이미지가 있어서 박 대통령이 아닌 느낌이면 반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귀 특수분장과 잇몸 보형물, CG(컴퓨터그래픽)로 신뢰감을 줬죠. 이성민 배우도 목 각도 하나까지 신경 썼죠.” 우 감독이 돌이켰다.

왼쪽부터 각각 차지철 경호실장과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토대로 한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 보안사령관 전두혁(서현우). 이들 뒤로 이성민이 연기한 대통령의 사진이 보인다.[사진 쇼박스]

왼쪽부터 각각 차지철 경호실장과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토대로 한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 보안사령관 전두혁(서현우). 이들 뒤로 이성민이 연기한 대통령의 사진이 보인다.[사진 쇼박스]

절제와 폭발 사이, 이병헌표 '햄릿'

반면 김재규가 모델인 주인공 김규평은 심리묘사가 절대적이었다. 절제와 폭발을 자유자재로 오가는 이병헌의 호연이 빛을 발했다. 과열된 충성전쟁에 내몰린 2인자의 불안감을 외줄 타듯 절묘하게 표현해냈다.

대통령과 공연을 관람하는 김 부장. 이병헌의 시시각각 변화하는 심리 묘사는 영화의 큰 묘미다. [사진 쇼박스]

대통령과 공연을 관람하는 김 부장. 이병헌의 시시각각 변화하는 심리 묘사는 영화의 큰 묘미다. [사진 쇼박스]

외모에 있어선 실존인물 김재규의 특징적인 헤어스타일, 안경을 가져왔다. “포마드 바른, 2대8 가르마. 실제로도 머리가 흐트러지는 걸 참지 못했고 성격 자체도 순간순간 욱하는 게 있었대요. 항상 매너 있고 안으로 꾹꾹 참다 참다 결정적인 순간 걷잡을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 캐릭터죠. 혼자 고민하고 번뇌하고 갈등하는 어떻게 보면 햄릿형.”

"망자를 되살려오는 작업"

장르적으론 냉전 시대가 배경의 할리우드나 유럽 첩보물도 떠오른다. 우 감독에겐 오히려 “망자들의 이야기를 다시 영화 속으로 되살려오는 작업”이었단다. 그는 관객들이 “옛날 명함판 초상화를 보듯 그 시대와 인물에 빠져들길 바랐다”고 했다. 1970년대 스타일과 색상, 의상이며, 심지어 종이 한 장도 당시 것을 구해다 썼다. “하나하나 컨트롤하며 강박하게 찍었죠.”

영화 '남산의 부장들' 촬영 현장에서 우민호 감독과 배우 이병헌(왼쪽부터). 두 사람은 5년 전 영화 '내부자들'로 700만 관객을 모은 데 이어 이번에 다시 뭉쳤다. [사진 쇼박스]

영화 '남산의 부장들' 촬영 현장에서 우민호 감독과 배우 이병헌(왼쪽부터). 두 사람은 5년 전 영화 '내부자들'로 700만 관객을 모은 데 이어 이번에 다시 뭉쳤다. [사진 쇼박스]

주요 무대인 청와대, 궁정동 안가, 중앙정보부 세 공간도 모두 정교한 세트로 지어냈다. 미국 워싱턴 링컨동상 앞, 프랑스 파리의 방 돔 광장 등 당시 주요 사건이 펼쳐진 해외 장소도 직접 현지 로케이션을 진행했다. 총제작비가 208억원(손익분기점 500만 관객)에 달한 까닭이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 해외 현지 로케이션 도중 촬영팀의 모습이다. [사진 쇼박스]

영화 '남산의 부장들' 해외 현지 로케이션 도중 촬영팀의 모습이다. [사진 쇼박스]

"모히또 가서…" 잇는 명장면은

밀도 높은 대사도 이번 영화의 묘미다.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김규평의 이 도발적인 대사는 원작에서 김재규가 스스로 했다고 증언했던 것. 박 대통령이 극 중 여러 번 반복하는 “임자 곁에는 내가 있잖아”란 대사엔 “내 손에 피 묻히지 않고 혹여나 문제되면 2인자를 버리겠단 막후정치”를 반영했다.

정치에도 격을 중시하는 김 부장(이병헌)은 청와대 앞에 탱크를 밀어넣는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과 신경전에 피가 마른다. [사진 쇼박스]

정치에도 격을 중시하는 김 부장(이병헌)은 청와대 앞에 탱크를 밀어넣는 경호실장 곽상천(이희준)과 신경전에 피가 마른다. [사진 쇼박스]

우 감독이 ‘내부자들’에서 이병헌이 유행시킨 애드리브 대사 “모히또 가서 몰디브 한 잔”만큼 기억되면 좋겠다고 귀띔한 장면은 이것. “극 중 2인자들이 구두 없는 자기 발을 쳐다보는 장면이 교차하는 걸 좋아해요. 그렇게 최고의 권력을 구사했던 자들이 자기 구두 한 짝조차 없이 초라하게, 그냥 맨발로 끝날 수밖에 없구나, 그런.”

전두환 전 대통령 부당 재물 묘사

실존인물에서 이름을 바꾼 극 중 캐릭터 설정이 어디까지 실재일까 궁금증도 인다. 영화에는 박 대통령, 그리고 전두환 전 대통령을 토대로 한 전두혁(서현우) 당시 보안사령관 캐릭터가 재물을 부당하게 빼돌리는 모습도 나온다.

“(박 대통령이) 부정축재가 있었다는 것은 원작이 토대죠. 전두혁은 역사적으로 그 사람이 뭘 했는지 팩트로 보여줬을 뿐이에요.” 우 감독의 설명.

특히 전 전 대통령 캐릭터에 관해선 시사회 때 같은 대목에 질문이 나오자 그는 “어찌 됐건 그 사람이 10ㆍ26 이후 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은 건 아니다. 그런 상징적인 느낌으로 봐 달라”고 답했다. 영화 말미 생전 김재규와 전 전 대통령의 모습‧육성이 교차하는 자료화면에 대해선 “실존인물 두 사람은 실제 상반된 진술을 했다. 선택은 보신 여러분이 하시면 좋겠다”고 했다.

지금 우리사회 내면 들여봐야

1979년 그날을 2020년 스크린에 펼친 의미를,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보면 그런 거대한 사건도 뚜렷한 대의, 논리적 인과관계가 아니라 개인들 간의 감정, 관계, 거기서 오는 균열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우리가 흔히 조직사회, 가족, 친구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믿음과 충성, 배신, 모멸, 질투와 시기 같은 것이요. 어떤 극단적인 행동이 단순히 그 사람만의 문제일까요. 10ㆍ26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끔찍하고 이상한 내면을 들여다봐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마약왕' 실패하니 솔직해지더라"

‘남산의 부장들’은 감독으로서도 절치부심했던 영화다. 여기에 대해선 이병헌도 시사회 때 농담 반 진담으로 들려준 얘기가 있다. “우 감독이 굉장히 열이 많은 분이에요. ‘내부자들’ 때는 그 기쁨과 환함과 기분 좋음을 참지 못하고 겉으로 표현했는데 이번 현장에선 굉장히 차분했어요. 이번 영화 제작 중간에 개봉한 ‘마약왕’이 잘 안 돼서 성격이 바뀌셨구나, 했습니다.” 송강호 주연의 총제작비 165억원 대작 ‘마약왕’은 지난해 흥행과 비평에 모두 쓴맛을 봤다.

우민호 감독은 전작 '마약왕'의 실패가 자숙하고 이번 영화를 더욱 세공할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사진 쇼박스]

우민호 감독은 전작 '마약왕'의 실패가 자숙하고 이번 영화를 더욱 세공할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사진 쇼박스]

우 감독은 “이번 영화엔 ‘내부자들’의 성공보단 ‘마약왕’의 실패가 원동력이 됐다”면서 “실패했을 때 자신한테 더 솔직해지더라. 제가 끝까지 보고 싶고, 보여 주고 싶은 작품을 위해서 끝까지 고민했다”고 말했다.

10년 무명…죽기 전에 한 편만 찍자 버텼죠

‘내부자들’로 가장 많이 알려졌지만, 그에겐 이전에도 두 편의 영화가 더 있었다. 데뷔작은 김명민 주연 납치 추적극 ‘파괴된 사나이’(2010). 이어 ‘간첩’(2012)에선 소시민으로 가장한 남파 간첩들의 좌충우돌 코미디를 그렸지만 흥행에 큰 재미를 보진 못했다.

“그러고 보니 자꾸 파괴적으로 치닫는 인물을 그렸네요. 데뷔까지 오래 걸려서 그런가. 10년간 영화가 계속 엎어졌거든요. 죽기 전에 꼭 하나는 찍겠다, 생각으로 버텼어요. 그 세월이 있어서, 또 앞에 두 편이 있어서 ‘내부자들’을 찍었고, ‘마약왕’이 있어 ‘남산의 부장들’도 찍을 수 있었어요. 성공하든 실패하든 감독은 매번 새로운 작품을 찍고 평가받길 원하는 사람들이니까요.”

‘남산의 부장들’이 최고작으로 평가받길 기대할까.

“자신은 못 하는데 바람이죠. ‘마약왕’ 개봉하고 쉬지 않고 달리느라 심신이 지쳐있는 건 사실이죠. 일단은 좀 쉬어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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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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