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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A 학위 버리고 시장으로···'면'에 미친 남자, 국수판 뒤엎다

중앙일보

입력

가업이 쓰러져가자 대기업을 그만두고 전통 시장을 돌며 트럭에 실은 국수를 팔던 이가 있었다. 이젠 글로벌 시장을 넘본다.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일본 국수 업체들과도 당당히 경쟁한다는 목표다. 국수 업체인 ㈜풍국면 최익진(58) 대표의 이야기다. 일반인에겐 생소해도 풍국면은 우리나라에서 제일 역사가 긴 기업(1933년 설립) 중 하나다. 부도 위기 등 굴곡도 많았다. 중앙일보는 지난 14일 대구 노원로의 풍국면 공장에서 최 대표를 만나 어려움을 이겨내고 사업을 길러온 비결을 물었다. 기사는 최 대표 1인칭의 관점이다.

풍국면 최익진 대표가 14일 대구 노원로 풍국면 본사 국수 생산라인에서 건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구=송봉근 기자

풍국면 최익진 대표가 14일 대구 노원로 풍국면 본사 국수 생산라인에서 건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구=송봉근 기자

턱까지 차오른 '빚'

'매출 13억9000만원에, 부채 12억원'.
충격이었다. 잘 나가던 회사가 급격히 기울었다.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대기업을 그만두고 가업을 살리기 위해 풍국면에 입사한 1993년의 실적이다. TV 광고까지 하며 한참 잘나가던 70년대 중반엔 연 매출이 30억원에 달했는데…. 하지만 십여년 만에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대기업 계열사들이 잇따라 국수 시장에 뛰어든 탓이었다. 작은 국수 회사들은 숱하게 넘어졌다. 업계에선 "풍국면도 곧 망할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1t 트럭 몰며 전통시장서 직접 국수 팔아

'잘 나가는 풍국면집 아들'의 기억은 과거가 됐다. 입사 초부터 1t 트럭을 몰고 대구 시내 전통 시장을 돌며 국수를 팔았다. 미국에서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고 대기업에 다녔던 기억도 지웠다. 자금 사정이 악화해 사재를 헐어 직원들 월급을 주던 시절이다. 그때는 하루 1만원으로 반찬을 만들어 공장에서 20여 명의 직원과 함께 식사를 때우며 버텼다.

유통망 개선으로 활로 찾아 

고생은 했지만, 매출은 쉬이 늘지 않았다. 유통 방식이 문제였다. 당시 5명뿐인 영업사원으로는 아무리 국수 맛이 좋아도 판매를 늘리는 데 한계가 있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때마침 양산 빵 업체들의 유통망을 활용하면 어떨까 싶었다. 양산 빵은 유통 기간이 3~4일 정도로 짧아 이 회사 영업사원들은 매일 소매점에 들르고 있었다. 그때 막 커지기 시작하던 대형마트(이마트)에도 눈을 돌렸다. 미국 유학 시절 월마트의 성장세를 직접 체험했던 일이 떠올랐다.

이마트와 거래를 트기 위해 반년 가까이 대구 풍국면 공장과 이마트 서울 본사를 오갔다. KTX도 생기기 전이었다. 편도 7시간의 먼 길을 국수를 담은 가방을 들고 오갔다. 찜질방에서 새우잠을 자며 바이어를 만날 시간을 맞췄다. 고생 끝에 조금씩 살길이 보였다. 당시 개념조차 생소한 대형마트 자체 브랜드(PB) 상품을 제안해 이를 관철했다. 95년의 일이다.

꾸준한 품질 개선 덕에 기회 열려

유통망을 다변화한 덕에 매출이 조금씩이나마 늘었다. 숨통이 어느 정도 트이고 나니 이제 품질을 높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살길은 '더 나은 국수'를 만드는 일 아닌가. 다른 업체들에 앞서 자동화 생산 설비를 갖추고 위생 등 식품 안전에 더 신경을 썼다. 2003년 당시 자동화 설비에만 꼭 40억원이 들었다. 그해 풍국면 매출은 28억원이었다. 사람들은 다들 내게 "미쳤다"고 했다.

하지만 좋은 제품을 만드니 시장에서 풍국면을 알아줬다. 대기업들도 함께 일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이 무렵 CJ제일제당과 거래를 시작했다. 인연은 현재까지도 이어진다. CJ제일제당의 프리미엄 브랜드인 '제일제면소'가 내놓은 국수류는 우리가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으로 생산한 것이다. 꾸준히 성과가 나오면서 지난해 매출은 127억원이 됐다. 우리나라 국수 시장 규모는 연 1200억원 선이다.

1200억원 국내 시장 넘어 해외로

풍국면 매출 추이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풍국면 매출 추이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750만 그릇 분량.
지난해 우리 회사가 판매한 국수의 양(약 7500t)이다. 얼핏 많아 보이지만, 국내 시장 만으론 한계가 분명하다. 우리나라 국수 시장은 몇 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살길은 해외뿐이다. 그래서 2017년부터 해외 시장을 두드리고 있다.

성과도 조금씩 나온다. 첫해 26만 달러(약 3억원)였던 수출 금액은 지난해 57만 달러(약 6억6000만원)로 두 배 넘게 늘었다. 해외 시장 개척도 중간 도매상 등을 거치지 않고 직접 한다. 젊은 날 이마트와 거래를 시작할 때처럼 해외 현지 바이어를 찾아내 수십통씩 e메일을 보내는 건 예사다. 무작정 현지로 찾아가기도 한다. 미국까지 갔다가 바이어를 만나지 못하고 그냥 돌아온 일도 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두드려 볼 생각이다. 현재 우리 풍국면의 영업사원은 나뿐이다.

면 종주국 일본에도 없는 설비 갖춰

풍국면 최익진 대표가 14일 대구 노원로 풍국면 본사 국수 생산라인에서 자사 면을 소개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기계는 풍국면이 최근 개발해 설치한 국수 포장기계다. 대구=송봉근 기자

풍국면 최익진 대표가 14일 대구 노원로 풍국면 본사 국수 생산라인에서 자사 면을 소개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기계는 풍국면이 최근 개발해 설치한 국수 포장기계다. 대구=송봉근 기자

글로벌 시장 진출에 대비해 품질을 한 단계 더 높이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최근엔 60억원을 투자해 공장을 넓히고, 포장 기계와 진공 반죽기 등을 설치했다. 국수 종주국인 일본 업체도 갖추지 못한 설비들이다. 거의 자체 제작하다시피 했다.

국수 끓이는 일을 번거롭게만 생각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면 조리 시간을 '3분 40초'로 표준화하는 작업도 했다. 누가 언제 우리 면을 삶든, 저 시간만 지키면 맛있는 국수를 먹을 수 있다. 모두가 스마트폰을 가진 세상이니 국수 삶는 시간을 재기도 더 수월해진 것 아닌가.

내겐 꿈이 있다. '세계 최고의 국수'를 만들어 '세계 최고'라는 일본 기업들을 이기는 일이다. 일본 국수가 북미나 유럽에서 특히 인기라고 한다. 선진국 시장에서 품질로 일본 국수를 꺾고 싶다. '안전품질식품(SQF)'이나 'FSSC22000' 같은 식품 안전 관련 인증을 받으려는 것도 선진국 시장에 제대로 진출하기 위해서다.

대구=이수기 기자 lee.so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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