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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을 안달하지 말자, 그냥 힘 좀 빠지는 나이 일 뿐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한순의 시골 반 도시 반 (14)

올해 나는 환갑이 된다. 여자 나이 환갑이라. 어디에 내놓고 떠들기 참 쑥스럽다. 피부는 탄력을 잃었고, 옷태도 예전처럼 나지 않는다. 나이 들어가며 느끼는 현상 중 참 뛰어넘기 힘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이때 나는 인간도 동물임을 강하게 느낀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힘과 아름다움이 그들의 생존 조건이 되고, 이것들이 점점 소멸해 갈 때 그들은 좀 뒷전으로 물러나 포효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의 쇠락을 처량해 한다. 간과할 수 없이 일상에서 수시로 맞는 감정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피부과로 헬스장으로 가고, 더 많은 사회적 활동을 하며 그들의 힘을 보여주려고 한다. 늘 질문이 많은 나는 이 정서가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자연스럽게 좀 힘이 빠져가는 나이라오 하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인가. 이건 동물의 세계에서 그냥 밀려날 수밖에 없는 정서인가? 어쨌든 나는 여자가 스스럼없이 나이를 말하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을 이야기 하고 싶다. 내 환갑기념으로!

어설픈 내 연주의 청중은 겨울나무와 파란 하늘과 시골 밭의 비닐하우스, 장작더미와 길냥이 그리고 싸한 겨울 찬공기다. [사진 한순]

어설픈 내 연주의 청중은 겨울나무와 파란 하늘과 시골 밭의 비닐하우스, 장작더미와 길냥이 그리고 싸한 겨울 찬공기다. [사진 한순]

시골행 가방에 한 가지 물품이 더 늘었다. 컴퓨터에서 프린트한 대중가요 피아노 악보다. 악보를 프린트할 때마다 한장을 더해 가방에 휙 던져 넣어 놓으면, 겨울 시골에서 지루함이 다가올 때 연습하기 좋다. 어설픈 내 연주의 청중은 겨울나무와 파란 하늘과 시골 밭의 비닐하우스, 장작더미와 길냥이 그리고 싸한 겨울 찬 공기다.

여백이 많은 공간에서 대중가요는 클래식 음악 못지않게 아름답다. 무척 심플한 구조와 코드를 가졌음에도 한음 한음이 마음을 잡는다. 그래, 그렇게 많이 들었던 ‘시’음이 이거였어? 나는 이제 환갑에 이르러서야 ‘시’음을 정확하게 인지한다.

사회 초년생 시절, 나는 종합청사에 근무했다. 딱딱한 건물만큼이나 딱딱한 구조 속에서 친구가 가지고 있던 일제 소니 빨간색 워크맨은 나를 살짝 들어 올렸다. 폭신한 스펀지로 스피커를 감싼 이어폰까지 귀에 끼고 나면 나는 날아갈 듯 자유로웠다. 이 워크맨 하나만 있으면 세상 어디로든 날아갈 것 같았다. 10개월 적금한 돈으로 빨간 워크맨을 손에 들게 된 날, 너무 기뻐 북한산 밑 구파발 길을 내리 걸었다. 노을은 장엄한 산에 걸리고 왼쪽 귀에는 드럼이 오른쪽 귀에는 멜로디가 울리고 때로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르며 리듬이 살아서 뛰어다녔다.

빨갛게 빛나던 워크맨 가죽 커버가 날긋해질 때까지 그는 나의 영혼을 받아주는 그루 같았다. 그 그루가 작동을 멈추는 날까지 나는 워크맨을 내 손 닿는 곳에 두었다. 나는 늘 그에게 와 쓰러졌는데 그는 푹신한 쿠션처럼 날 받아주었다. 때로는 지극한 위로로 때로는 방방 뛰게 할 리듬으로 때로는 철학자로 때로는 날 선 선생처럼!

폭신한 스폰지로 스피커를 감싼 이어폰까지 귀에 끼고나면 나는 날아갈 듯 자유로웠다. 이 워크맨 하나만 있으면 세상 어디로든 날아 갈 것 같았다. [사진 Flickr]

폭신한 스폰지로 스피커를 감싼 이어폰까지 귀에 끼고나면 나는 날아갈 듯 자유로웠다. 이 워크맨 하나만 있으면 세상 어디로든 날아 갈 것 같았다. [사진 Flickr]

18살 후반부터 시작된 사회생활이 40여 년을 더해 가고 있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났을까? 얼마나 많은 일을 했으며, 몇 권의 책을 만들었을까? 또 몇 권의 책을 읽었을까?

아들 둘이 다 장성하여 장가를 갔으며, 너무 이쁜 손녀가 있고 이제 곧 출산을 앞둔 며느리가 있다. 그 삶의 굽이굽이에서 나는 음악에 기대어 살아왔다. 남편과 내가 만난 것도 음악과 책이었으며 그 음악과 책은 우리 삶에서 어떤 형태로든 같이 했다. 내 삶의 수훈자를 꼽으라 하면 나는 망설임 없이 ‘음악과 책’을 꼽겠다. 나에게 나이도 주름도 조금 쇠락한 기운도 잊게 하는 것은 음악과 책이다. 그 속에는 또다시 나를 위로하고 단련시키는 그루들이 살고 있다.

시골 생활 첫 집에서 나는 쇼팽의 녹턴을 거의 오백삼십 번 정도 들었다. 나의 무서움을 탈피하려 들었고, 어두운 마음을 그곳에 기댔다. 그러나 반복될수록 쇼팽의 마음이 들렸다. 그의 슬픔과 괴로움과 환희, 모순과 아름다움들이 들려왔다.

나에게 나이도 주름도 조금 쇠락한 기운도 잊게 하는 것은 음악과 책이다. 그 속에는 또 다시 나를 위로하고 단련시키는 그루들이 살고 있다. [사진 Pixabay]

나에게 나이도 주름도 조금 쇠락한 기운도 잊게 하는 것은 음악과 책이다. 그 속에는 또 다시 나를 위로하고 단련시키는 그루들이 살고 있다. [사진 Pixabay]

최근에 존 필드의 녹턴을 반복해서 들을 기회가 왔다. 쇼팽 녹턴의 근간이 되었던 존 필드의 녹턴이었다. 나는 존 필드의 음악에 빠져들었다. 특히 10번은 백미다. 이에 비하면 쇼팽은 너무 세련되고 화려하고 구성이 치밀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이 들어 좋은 것은 세상에서 제일 좋다고 하는 것에 가만히 의문을 가져보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일들의 근간이 되었던 것에 보다 주목하여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나에게 시골 생활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특히 시골 겨울은 음악 듣기에 더없이 좋다. 사물이 모두 그루의 형상으로 안을 향에 침잠해 있다.

나이가 좀 들면 어떤가? ‘시’음이 ‘시’로 들리는데.

도서출판 나무생각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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