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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상연의 시시각각

진문 감별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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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최상연
최상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일자리가 호랑이다. 멸종 위기다. ‘그냥 쉬고 있다’는 사람만 200만 명을 넘어섰다. 취준생이건 40~50대 가장이건 한숨이 많다. 그래도 자기들 일자리만큼은 호황인 게 이 정부 특징이다. 정부 출범 후 신임 공공기관장 절반, 상임감사 자리의 80%를 꿰찼다. 민간 기업 사외이사 임기를 6년에 끝내도록 상법 시행령도 바꿨다. 당초 내년부터 실시할 계획이었지만 민주당의 강한 요구로 3월 주총 때부터 적용된다고 한다. 700여 개의 새 자리가 생겨난다.

청와대·사법부 선거판 몰려가고 #국회선 비문 살생부 명단 나돌아 #진박 국회 만들기와 뭐가 다른가

총선 공천을 앞두고 ‘반발 출마’를 막자면 자리가 많이 필요할 것 같긴 하다. 뒤가 든든하면 선출직으로 떠나는 몸놀림도 가벼울 거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던 건 옛날이다. 지금 대한민국 관가는 여의도로 통한다. 그 좋은 자리를 배짱 좋게 내던지는 줄사표 러시다. 청와대 인사만 70명을 넘는다는데 심지어 판사들까지 같은 대열에 섰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의 또 다른 기록이다.

뒷배가 있다 쳐도, 많아도 너무 많다. 청와대 직원이라야 400명 남짓이다. 더구나 정치판은 거칠고 험한 싸움판이다. 판세를 알아도 겁쟁이는 뛰어들 수 없고, 겁이 없어도 판단력 없이는 살아남기 힘든 곳이다. 번쩍거리는 금배지가 몰염치와 무능의 상징으로 전락한 지 꽤 오래다. 그런데도 특별히 긴 줄을 만드는 건 왜 그런 것인가. ‘친문 국회’를 향한 ‘뭔가’가 매우 강력하기 때문일 것이다.

안 그러면 임기가 한참 남았는데 후임자 없이 사표를 던지고, 그 사표가 수리될 까닭이 없지 않나. 따지고 보면 1년 넘도록 매달 ‘총선용 인사’다. 뒤숭숭한 관청에선 ‘청와대는 총선 캠프, 국회는 청와대 출장소’란 말을 달고 산다. 대통령 친위 부대를 더 많이 국회로 보내고 싶다는 욕심이야, 뭐 그렇다 치자. 안 그랬던 정권도 없다. 이명박 청와대선 대통령 퇴임 뒤 ‘안전판’을 위해 청와대 참모의 총선 도전을 지원해야 한다는 문건까지 돌았다. 그래도 정부마다 선은 지켰다.

굳이 예외라면 지난 정부다. 전임 대통령은 툭하면 참모들을 모아 놓고 말로는 국회, 내용적으론 반대편을 공격했는데, 결국 ‘진박 고르기’로 번졌다. ‘5·16은 쿠데타’ ‘유신은 구국의 결단’ 등을 체크하는 가박(가짜 친박) 질문지가 나왔다. ‘박 대통령이 꿈에 세 번 이상 나타났다’는 등의 친박 계급론도 등장했다. ‘적폐 청산 청와대’란 그걸 끝장내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기록 양산이다. 대통령이 참모들 앞에서 ‘국회의 존재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부끄럽고, 볼썽사납다’고 연말에도, 연초에도 야당을 두들겨 패는 건 같은 장면이다. 비문(非文) 의원 공천 살생부가 ‘찌라시’로 도는 것도 어슷비슷하다. ‘대통령의 입’들이 “야당 심판”을 외치며 전원 선거판으로 향한 건 한술 더 뜬 거다. 핵심 정무 라인이 선거공작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거나 요청받은 건 기록 경신이다.

국회만도 아니다. 청와대가 검찰 간부를 대상으로 ‘이석기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인사 검증을 벌였다는 얘기가 나왔다. 진문 감별법인 모양이다. 청와대와 사법부는 나라의 게이트 키퍼다. 정파성에 의문이 생기면 영이 설 리 없다. 국정이나 재판보다 선거에 관심이 더 많다는 소리가 일상으로 나오니 나랏일이 제때 옳게 돌아갈 까닭이 없다. 막강 파워로 ‘청와대 정부’ 소릴 듣는 지금 청와대에선 더 그렇다.

국가 권위와 사회질서가 흔들리는데 나라가 부강하고 융성해졌다는 말은 어느 책에도 없다. 가뜩이나 풍전등화처럼 흔들리는 대한민국이다. 진성 우리 편만 챙기는 청와대를 보면서 이 정부가 과연 비상 국면에서 국민을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인지 무력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묻고 또 되뇐다. 진문 검증과 진박 질문지는 뭐가 어떻게 다른 것인가라고. 친박으로 모자라 진박 감별에 나섰던 그 당은 선거에서 참패하고 정권을 손수 헌납했다.

최상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