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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대전환시대③]"작업복 입고 회식하는 직장인, 눈 씻고 찾아도 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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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창업국가산업단지 전경. 산단 북쪽으로 상업지구와 주택가가 자리잡고 있다. [사진 한국산업단지공단]

창업국가산업단지 전경. 산단 북쪽으로 상업지구와 주택가가 자리잡고 있다. [사진 한국산업단지공단]

지난해 11월 26일 오후 6시, 경남 창원시 최대 상권인 상남시장 사거리는 한산했다. 예전 같으면 창원산업단지공단(창원산단)에서 일하는 직장인으로 북적거릴 시간이지만, 이날 저녁엔 음식점·식료품점·옷가게 할 것 없이 인적이 뜸했다. 인구 100만 도시의 번화가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상남동에서 차로 5분만 가면 나오는 '세계 최대의 기계산업 밀집단지' 창원산단의 몰락 때문이다.

차·조선·기계 등 업체 2600개 밀집 #산업구조 변화 시기 노동시장 경직 #스마트 팩토리 구축 고용 늘린 곳도

'세계 최대 기계산업단지' 창원의 눈물  

신동만(64) 상남시장상인회장은 "지난해 여름부터 직장인이 눈에 띄게 줄었다. 작업복 입고 단체로 회식하러 오는 팀은 이제 눈 씻고 봐도 찾기 어렵다"고 했다. 갈수록 시장을 찾는 직장인이 줄면서 빈 점포는 늘었다. 신 회장은 "580여 개 점포 중에 150여 개가 비어 있거나 창고로 쓰인다. 가게 임대료를 내지 못해 야반도주한 곳도 있었다"고 했다.

창원산단 고용 추이. 그래픽=신재민 기자

창원산단 고용 추이. 그래픽=신재민 기자

이날은 창원에서만 560개의 일자리가 추가로 사라진 날이었다. 한국GM 창원공장 산하 7개 하도급업체가 파견한 비정규직 근로자 560명이 '해고 통지서'를 받았다. 한국GM이 창원공장을 주야 2교대에서 1교대로 전환하며, 비정규직이 맡던 라인을 정규직에 넘긴 것이다. 한국GM은 "물량 감소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밝혔다. 실적 감소의 여파가 고용 취약 계층에게 가장 먼저 불어닥친 셈이다.

한국GM 창원공장 비정규직 지회 노동자들이 지난해 12월 30일 공장 앞에서 해고 철회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GM 창원공장 비정규직 지회 노동자들이 지난해 12월 30일 공장 앞에서 해고 철회를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2년 새 창원의 생산·수출·고용 지표는 모두 큰 폭으로 하락했다. 지난해 11월 창원산단의 월 생산액은 3조3037억원으로 2년 전인 2017년 11월(5조339억원)보다 34% 줄었다(한국산업단지공단 통계). 같은 기간 수출액은 16억4600만 달러에서 8억1300만 달러로 반 토막 났으며, 고용은 12만5048명에서 12만3482명으로 약 1600여 명 줄었다. 2년 동안 고용 지표가 가장 좋았던 2018년 7월(12만7098명)과 비교하면 1년 남짓한 기간에 3600여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창원산단은 자동차·조선·기계 제조업 등 대기업과 1·2차 하도급업체까지 합하면 2600여 개가 밀집해 있다.

창원산단 생산액. 그래픽=신재민 기자

창원산단 생산액. 그래픽=신재민 기자

이동찬 한국산업단지공단 경남본부장은 "창원산단에서 LG전자 가전 빼고 자동차·조선·기계 등 전 업종이 부진한 실정"이라며 "스마트 산단과 연구개발특구 유치를 통해 고용을 늘릴 것"이라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산업 구조가 지금처럼 변화하는 시기엔 자본·노동을 재배치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고 있다. 특히 노동 시장의 경직성이 문제"라고 말했다.

최근 2년간 창원산단 수출액. 그래픽=신재민 기자

최근 2년간 창원산단 수출액. 그래픽=신재민 기자

스마트팩토리, 단순 작업자 줄고 관리자 늘어

창원의 제조업체 모두에서 일자리가 줄어든 건 아니다. 선제적 투자를 통해 일자리를 늘린 곳도 있다. 자동차 변속기에 들어가는 스풀 밸브(자동변속기의 초정밀 유압 밸브)를 제조하는 중소기업 경한코리아에게 변곡점은 2015년 찾아왔다. 글로벌 완성차업체 폴크스바겐에 직접 납품할 물량을 따낸 것이다. 이후 독일 변속기 업체 ZF, 캐나다의 스택폴 등 글로벌 자동차 부품업체로부터 잇따라 공급 계약을 따냈다. 직원 수는 2015년 83명에서 현재 103명으로 늘었다.

폴크스바겐 수주 전 연 200만~300만 개였던 생산량은 지난해 1000만 개로 늘었다. '스마트팩토리(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제조 혁신)'를 도입하면서 일감이 늘었고, 단순 공정 자동화로 사라진 인원을 관리 인원이 채웠다.

중앙일보가 찾아간 창원 성산동 경한코리아 공장에선 자동화 공정이 한창이었다. 연면적 2만6000㎡ 규모의 공장 1~2층엔 320여 대의 컴퓨터 수치 제어(CNC) 공작기계가 밸브를 깎고 연마하고 코팅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특히 대당 3000만~4000만원에 달하는 로봇팔 10여 대가 눈에 띄었다.

부품을 들어 올려 선반에 놓는 단순 작업은 대부분 로봇의 몫이었다. 삼성·LG전자와 같은 글로벌 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이 갖추고 있는 자동차 설비로는 놀라운 수준이다.

경한코리아는 최근 4년간 CNC 설비에 130억원 이상을 쏟아부었다.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추기 위한 전략이었다. 6년 전, 폴크스바겐 본사 구매 담당이 변속기 부품을 아웃소싱하기 위해 경한코리아를 비롯 한국·일본·중국의 부품 전문 업체를 탐색한 게 시작이었다.

폴크스바겐의 계약 조건은 생산과 '트랙킹(제조 이력 조회)'이 가능한 스마트 팩토리 구축과 기존 업체보다 낮은 가격이었다. 이준형 경한코리아 부사장은 "기존의 기름때 묻은 공장과 수기 시스템으론 어림도 없었을 것"이라며 "살아남기 위해 투자했다"고 말했다.

디지털화한 경한코리아의 생산라인 모니터링. 김영주 기자

디지털화한 경한코리아의 생산라인 모니터링. 김영주 기자

경한코리아의 CNC 공작기계는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간다. 2교대로 각 30여 명이 공작기계를 관리·감독한다. 사람 60명과 320여 대의 자동화 설비가 하루 평균 3만개의 부품을 제작하고 있다.
이 회사는 스마트 팩토리 구축 후 CNC의 소프트웨어를 관리하는 직원을 새로 채용했다. 이 부사장은 "설비와 연계된 모니터링을 한다. 또 제품 이력 추적을 위한 MES(제조실행시스템)를 관리하는 직원도 새로 뽑았다"고 했다.

매출은 2016년 260억원에서 지난해 매출 400억원이 됐다. 수출은 지난해 2000만 달러에 이어 올해 2200만 달러(약 256억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준형 경한코리아 부사장은 "기존에 하던 대로 내수만 바라보고 있었다면 매출과 수출, 고용 모두 줄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살아남았다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없는 건 아니다. 이상연 경한코리아 대표는 "스마트 팩토리도 계속 업그레이드하지 않으면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고 말했다.

허재준 한국노동연구원 고용정책연구본부장은 "중소기업의 스마트 팩토리는 현장 근로자의 노하우도 데이터화할 수 있는 과학적 접근이 필요하다"며 "수출 등으로 시장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만큼 정부도 기업에 메시지를 확실히 줘 변화를 유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영주 기자 humanest@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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