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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화의 창

미술로 보는 근현대사의 명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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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연말연시를 보내면서 미술계에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세 개의 대규모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개관 50주년을 맞아 서울관, 덕수궁관, 과천관 등 세 전시장에서 열고 있는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전, 갤러리현대가 개관50주년을 앞두고 마련한 ‘한국근현대인물화: 인물, 초상, 그리고 사람’전, 경기도미술관의 ‘시점(視點)·시점(時點)-1980년대 소집단 미술운동 아카이브’전이다. 이 세 전시는 모두 방대한 규모일 뿐만 아니라 한결같이 주제를 미술과 사회, 미술과 인간, 미술과 시대로 삼고 있어 마치 그림을 통해 우리 근현대사를 보는 듯한 감동이 있다.

미술은 그 시대를 반영한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 나간다 #문화는 생산자가 창조한다 #그러나 소비자가 발전시킨다

우리 근대미술은 19세기말 개화 바람과 함께 시작되었으나 구체적으로는 1914년, 춘곡 고희동이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면서 최초의 서양화가가 된 때를 본격적인 출발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5년, 두 번째 유학생인 김관호가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본 문부성이 주관하는 ‘문전’에 ‘해질 녁’을 출품해 특선을 수상하면서 서양화라는 신미술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김관호, 해질녘, 1915년, 캔버스에 유채. [사진 도쿄예술대학 소장]

김관호, 해질녘, 1915년, 캔버스에 유채. [사진 도쿄예술대학 소장]

이때 동경에 있던 춘원 이광수는 ‘아! 특선, 특선이라! 특선이라면 미술계의 알성 급제다… 장하도다 우리 김군!’이라는 흥분에 가득 찬 관람기를 동경발 속보로 보냈다. 그런데 정작 신문은 대동강변에서 미역 감는 두 여인을 그린 이 작품을 ‘벌거벗은 그림인고로 게재하지 못함을 양해 바란다’고 했다. 그런 김관호의 환상적인 누드화가 지금 갤러리현대 전시장에 걸려 있다. 작품 곁에 진열된 당시 신문 기사 판넬을 보고 있자니 격세지감과 함께 미술과 시대의 괴리를 절감케 한다.

그런데 국립현대미술관의 서울관에 전시된 우리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 앞에서 나는 또 다른 낭패감을 지울 수 없었다. 조형언어의 난해함을 넘어 참을 수 없는 어지러움으로 가득하다. ‘벌거벗은 여인’인 고로 게재치 못했다는 괴리감이 지금 나에게 당혹감으로 다가온다. AI, 5G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한 나 같은 아날로그 세대들을 무참하게 소외시켜 버린다. 확실히 미술은 시대를 반영하되 항시 앞서 나간다는 점을 말해 주는 듯하다. 서글픈 생각마저 들었지만, 어쩔거나 시대감각의 낙오에서 나온 것임을. 그저 나의 인생이 녹아 있는 지난 시절 속에서 나의 서정을 발해야지….

그러나 내가 산 시절이라는 게 말처럼 간단치가 않다. 이번 세 특별전은 모두 1980년대 민중미술을 대대적으로 전시하고 있는데 이를 다루는 시각이 제각기 다르다. 경기도미술관은 처음부터 80년대 소집단미술운동의 ‘아카이브’ 전시회임을 표방하면서 폭압적인 독재에 맞서 용감하게 저항하던 미술인들의 뜨거운 예술혼을 발굴, 집대성하고 있다. 이에 반해 갤러리현대는 민중미술 중 80년대의 인물화라는 관점에서 조형적으로 세련미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꾸며졌다.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은 전시장 내 작품뿐만 아니라 6월 민주항쟁과 노동자대투쟁 때 사용된 걸개그림까지 전시하면서 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 ‘광장’ 미술을 복원하고 있다.

전시회에 혹독한 비판을 가하기도 하는데 내가 보기에 이는 아직도 민중미술에 대한 기존의 거부감이라는 면이 없지 않으나 분명한 것은 이 세 전시장에서 보여주는 작품들 모두가 80년대 미술운동이 낳은 예술적 소산이라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세 특별전의 의의는 그 동안 제도권에서 소외됐던 민중미술이 비로소 우리 현대미술의 어엿한 시대 양식으로 받아들고 있다는 점에 있다. 반세기만의 제도권 입성이다. 이미 많은 외국의 현대미술사가들은 우리 민중미술을 30년대 멕시코의 벽화운동이나 중국 루쉰의 목판화 운동같은 제3세계의 한 사조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우리 80년대 민중미술을 70년대 단색조 추상미술과 함께 한국의 독특한 미술로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서울·과천·안산으로 전시장을 둘러보려면 적지 않은 다리품을 팔아야 하지만 근대미술 초기부터 해방공간, 한국전쟁기, 산업화와 민주화의 현장, 그리고 4차산업시대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다양한 작품을 만나는 기쁨에 전시장 순례는 보람차다. 그중 나에게 가장 감동적인 작품 하나만 꼽으라면 근원 김용준이 1948년, 회갑을 맞이한 벽초 홍명희에게 큰 절을 올리는 근원 자신의 그림이다. 그 시절 세상은 날카롭게 대립했어도 원로를 원로답게 모시던 아름다운 세태가 생생하게 다가온다. 오늘날의 사회풍조를 생각하면 가슴이 더욱 뭉클해진다.

전시장을 돌면서 아쉬운 점은 관람객이 너무 적은 것이다. 반 고흐, 데이비드 호크니같은 서양 유명화가의 블록버스터 전시회에는 줄을 서면서 우리의 근현대사를 비춰주는 모처럼 만의 대규모 전시장이 한산하다는 것은 뭔가 잘못됐다. 좋은 전시회가 열릴 때 많은 관객이 찾아와야 더 좋은 전시회가 열린다. 문화를 창조하는 것은 공급자이지만 이를 발전시키는 것은 소비자이다. 세 전시 모두 내달 초까지 열린다. 설 연휴에 많은 관객들이 찾아갔으면 좋겠다.

유홍준 본사 칼럼니스트·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