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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긴 내 손, 오히려 자랑스럽제” 64세 종갓집 맏며느리 김순옥 명인

중앙일보

입력

김순옥(64) 명인이 "이젠 못생긴 손이 부끄럽지 않다"며 두 손을 내보이고 있다. 추인영 기자

김순옥(64) 명인이 "이젠 못생긴 손이 부끄럽지 않다"며 두 손을 내보이고 있다. 추인영 기자

 “내가 옛날에는 손이 이라고('이렇게'를 뜻하는 사투리) 생겨서 부끄러갖고 호주머니에 넣고 가리고 다녔어. 근디 인자는 안 그래요. 손이 이라고 생겼응게 명인이 된 거제. 오히려 자랑스럽제. 인자는 당당하게 내놓고 다니제.”

김순옥(64)씨는 지난 16일 전남 순천시 주암면 구산마을에 있는 자택을 찾은 기자에게 고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두 손을 내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70살이 되믄 요리책을 낼 건디 책에 얼굴 대신 손을 넣을라고 해요”라면서다.

500년째 전수받은 조청·내림반찬 솜씨

김순옥 명인의 토하젓. 토하젓에 참깨와 참기름, 매운고추를 넣으면 토하양념장이 된다. [사진 롯데쇼핑]

김순옥 명인의 토하젓. 토하젓에 참깨와 참기름, 매운고추를 넣으면 토하양념장이 된다. [사진 롯데쇼핑]

김씨는 옥천조씨 절민공파 종갓집 23대 맏며느리다. 1979년 시집온 뒤 문중 시제를 지내며 500년째 내려오는 조청과 내림반찬 솜씨를 전수받았다. 전통 제조법을 복원하면서도 현대적으로 해석해 조청의 표준화·고급화를 이뤄낸 점을 인정받아 지난해 12월 대한민국 85호 ‘찹쌀조이당 조청’ 명인으로 지정됐다.

“아침에 밥맛 없을 때 한 숟가락만 뜨면 배가 안 고프다”며 김씨가 내놓은 건 조청에 으뜸도라지를 넣어 만든 도라지 수제 조청이다. 으뜸도라지는 최근 개발된 신품종으로 인삼의 주요 성분인 사포닌이 인삼의 8배 수준이다. 설탕과 방부제 없이 자연 그대로를 담았다.

1급수에서만 사는 토하로 만든 토하젓은 1년 365일 이 집에서 떨어진 적이 없다. “토하젓에 참기름과 깨, 매운 고추를 넣고 흰 쌀밥에 비벼 먹으면 다른 반찬이 필요 없다”고 김씨는 말했다. 주암 저수지에서 잡은 자연산 토하를 갈지 않고 통째로 먹기 때문에 아삭한 식감이 살아있다. 찹쌀과 고춧가루를 토하와 같은 비율로 넣어 만든 다른 토하젓과는 다르다.

토하양념장과 도라지 수제 조청은 올해 처음 ‘남도명가(名家)’ 브랜드로 상품화돼 지난 6일부터 23일까지 롯데백화점에서 100세트 한정 판매 중이다. 롯데백화점 호남·충청 지역 박성훈(35) 바이어가 우연히 방송을 보고 지난해 10월 직접 찾아가 상품화를 제안했다. 김씨는 여력이 없다며 고사했지만 “다른 건 다 알아서 하겠다”는 바이어의 설득에 승낙했다. 김씨는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란 말이 있잖아요. 내가 포장이나 판매까지 생각하면 음식을 할 수가 없어요”라고 했다. 토하 양념장이 담긴 도자기도 백화점측이 서울 방산시장에서 직접 공수했다.

“음식은 밤 새워서도 해”  

전남 순천시 주암면 구산마을 김순옥(64) 명인의 자택. 추인영 기자

전남 순천시 주암면 구산마을 김순옥(64) 명인의 자택. 추인영 기자

김씨의 친정도 대종손 종갓집이다. 아버지가 3대 독자였다. 1년에 제사만 13번을 지냈다. 식구 11명의 생일과 명절을 치르다 보면 1년 내내 잔칫상을 차리지 않은 날이 드물었다고 한다. “내가 6살 때부터 엄마한테 맞으면서 밥했어요. 부엌 들어오면 고생한다고.” 김 씨는 “도자기, 서예, 규방 공예 다해봤는데 재미가 없었다”면서 “음식은 밤을 새워서도 할 수 있다”고 했다.

김 씨는 딸(40)에게도 똑같이 했다고 한다. 연세대에서 공학을 전공한 딸은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대기업 연구소에서 근무 중이다. 명인으로 지정되면 전수자를 등록해야 한다는 말에 딸이 전수자를 자청했다. “딸한테 부엌일 한 번 가르친 적이 없는데 피는 못 속인갑써요.” 서울에 사는 딸은 매달 고향 집에 내려와 기술을 전수받고 있다.

만학 열정…지난해 대학 졸업  

김순옥(64) 명인이 "이제는 손이 부끄럽지 않다"며 두 손을 내보이고 있다. 추인영 기자

김순옥(64) 명인이 "이제는 손이 부끄럽지 않다"며 두 손을 내보이고 있다. 추인영 기자

김 씨는 지난해 2월 동신대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했다. 딸과 아들을 시집·장가보내고 광양 포스코에 다니던 남편이 퇴직하자 “나 자신을 위해 살 때도 됐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농업인의 날 전시회에서 입상해 정부 지원으로 2009년 사업을 본격 시작하면서 했던 “환갑 때는 학생이 아니라 명인이 돼서 엄마 무덤 앞에 인사드리겠다”던 다짐도 다소 늦었지만 이뤄냈다.

70세까지 전통음식 요리책 내는게 목표

나이 칠십이 되면 요리책을 내는 게 목표다. 조리 환경이나 식자재 등이 옛날과는 바뀐 만큼 현대에 걸맞은 전통 레시피를 남기고 싶어서다. 김 씨는 “내가 지난해 12월 13일에 서울 올라가서 명인 명패를 받는디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이 자리가 얼마나 무겁고 막중하냐. 이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겠다 싶었어요.”라고 했다.

“한국인은 발효 식품을 먹어야 돼. 장독대를 지키는 삶이 국민을 위한 삶이여. 밥상이 약상이잖아. 좋은 음식을 먹어야 국민성도 좋아진당게. 애국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순천=추인영 기자 chu.i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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