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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소국 핀란드의 영리한 역공···보드카 취한 소련은 아군 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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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단독 강화한 뒤 연합군 대열에서 이탈한 데다 공산주의 전파를 우려한 서구가 배척하면서, 소련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승전국 대접을 받지 못했다. 패전국은 아니었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동유럽의 거대한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다. 혁명과 내전의 혼란기를 수습하고 국력을 회복한 1930년대가 되자 소련은 자신의 땅이라고 생각하던 폴란드ㆍ발트 3국ㆍ핀란드를 노골적으로 노렸다.

소련군, 보드카 취해 무방비 노출 #영하 40도 추위·아군끼리 총질 #약소국 핀란드 보다 5배 큰 피해

겨울전쟁 당시 기관총으로 무장한 핀란드 병사들이 전방의 소련군 진지를 응시하고 있다.[사진 핀란드 군사박물관]

겨울전쟁 당시 기관총으로 무장한 핀란드 병사들이 전방의 소련군 진지를 응시하고 있다.[사진 핀란드 군사박물관]

마침내 1939년 9월, 발트 3국을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독일과 폴란드를 분할하는 데 성공한 소련의 눈엔 다음으로 핀란드가 들어왔다. 레닌그라드의 방위를 위해 일부 영토를 달라는 명분을 내세워 협박을 가했지만, 1917년에 처음으로 독립한 핀란드는 저항을 선택했다. 이미 국제 사회에서 침략자로 낙인이 찍힌 소련은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11월 30일, 침공을 개시했다. 약소국 항전사의 전설로 유명한 ‘겨울전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공격 준비 중인 소련군. 이들은 겨울에 전쟁을 시작했지만 설상복이 없어 핀란드 저격병에게 쉽게 노출되면서 엄청난 곤혹을 치렀다. [사진 wikimedia]

공격 준비 중인 소련군. 이들은 겨울에 전쟁을 시작했지만 설상복이 없어 핀란드 저격병에게 쉽게 노출되면서 엄청난 곤혹을 치렀다. [사진 wikimedia]

당시 핀란드 성인 남성의 절반 정도인 55만명을 동원한 소련군은 전차 2500여대ㆍ항공기 1500여기의 지원을 받았다. 반면 핀란드는 총동원령을 내렸어도 병력이 15만에 불과했다. 보유한 중화기는 구닥다리 전차 32대ㆍ항공기 114기 뿐이었다. 이 정도 차이라면 전쟁의 결과를 예측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 당연히 모두의 예상대로 소련이 승리했다. 하지만 이는 핀란드가 강화 조약에 서명했기에 승자와 패자나 나뉜 결과였을 뿐이었다.

소련은 35만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고 전쟁에 투입한 대부분의 전차와 항공기를 상실한 반면 핀란드의 손실은 전사상자 7만명ㆍ전차 30대ㆍ항공기 62기에 불과했다. 숫자로만 따졌을 때 핀란드가 승자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결과는 전쟁에 임한 자세의 차이 때문에 벌어졌다. 핀란드는 소련의 침공이 확실하자 침략자가 반드시 지나야 할 곳을 선별해 방어선을 구축하고 보급품도 충분히 비축했다.

라테 가도에서 전멸된 소련군의 잔해. 이처럼 준비도 없이 도발을 벌인 대가는 혹독했다. [사진 wikimedia]

라테 가도에서 전멸된 소련군의 잔해. 이처럼 준비도 없이 도발을 벌인 대가는 혹독했다. [사진 wikimedia]

반면 소련은 중요하지 않은 곳까지 전력을 분산해 그냥 전진하는 단순한 전술을 구사했다. 하지만 길이 없어 회군한 부대들이 몇 안 되는 통로로 몰려들었다. 이동은 급속도로 정체했고, 길이 막히자 보급에 문제가 발생했다. 그 사이 겨울철 추위가 맹위를 떨치며 기온은 영하 40도까지 곤두박질쳤다. 결국 앞으로 나갈 수 없자 소련군은 사방이 뚫린 평원에 숙영하면서 귀찮다고 경계병도 세우지 않고 추위를 물리친다며 보드카를 마셨다.

스키와 설상복을 착용하고 교전 중인 핀란드군. 지형지물을 이용한 유격전으로 뛰어난 전과를 올렸다. [사진 wikimedia]

스키와 설상복을 착용하고 교전 중인 핀란드군. 지형지물을 이용한 유격전으로 뛰어난 전과를 올렸다. [사진 wikimedia]

그렇게 밤이 깊어가고 군기가 무너진 틈을 타 핀란드군이 역공을 시작했다. 스키를 탄 소부대가 소련군 숙영지를 가로지르며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했다. 어둠 속에서 술에 취한 소련군은 아무 곳이나 총질을 하다 아군끼리 교전을 벌였다. 날이 밝은 뒤 전의를 상실한 소련군은 하나하나 저격당했다. 작전을 마친 핀란드군은 따듯한 거점으로 복귀해 전력을 회복했지만, 혹한 속 소련군에게선 동사자가 속출했다.

겨울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 핀란드 전선 참호에서 경계 근무를 서다 동사한 소련군 병사들.

겨울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 핀란드 전선 참호에서 경계 근무를 서다 동사한 소련군 병사들.

이는 겨울전쟁의 일반적 패턴이었다. 톨바야르비, 수오무살미를 비롯한 곳곳에 소련군의 시신과 파괴된 장비가 산을 이루었다. 그렇게 호된 경험을 겪은 소련은 두 달 후 날씨가 풀리고 50여만명의 병력과 장비를 추가 투입하고 나서야 간신히 주도권을 잡았다. 장기간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던 핀란드가 강화를 제의하자 즉시 응했을 정도로 매운맛을 본 소련은 핀란드의 일부 영토를 빼앗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요충지에 구축된 핀란드군 벙커. 이런 시설을 이용해 효과적인 방어전을 펼쳤다. [사진 wikimedia]

요충지에 구축된 핀란드군 벙커. 이런 시설을 이용해 효과적인 방어전을 펼쳤다. [사진 wikimedia]

핀란드는 1941년 나치 독일 편을 들며 추축국에 가담해 소련과 다시 싸웠으나, 실지를 회복하지 못하고 종전을 맞았다. 격렬한 저항에 진절머리가 난 소련은 중립을 조건으로 핀란드의 독립을 인정했다. 덕분에 핀란드는 소련에 편입되거나 위성국이 되는 화를 면했다. 만일 겨울전쟁 당시에 소련군의 준비가 충분했거나 반대로 핀란드가 쉽게 굴복했다면, 현재 핀란드는 러시아의 영토로 남거나 발트 3국처럼 소련 해체 후인 1991년에서야 독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겨울전쟁 개전 전 일부 영토만 요구했던 명분과 달리 소련은 핀란드를 병합할 생각을 굳이 감추지 않았던 점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예측이다. 이처럼 굴복 대신 저항을 택한 핀란드의 선택은 마치 고슴도치에 놀란 곰처럼,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초강대국 반열에 올라간 소련을 움츠리게 만들었다. 1939년 겨울에 있었던 약소국의 처절한 항전은 어느덧 과거사가 되었지만, 두고두고 교훈으로 삼을만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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