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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사태 흐지부지됐지만, 새삼 부각된 ‘트럼프 리스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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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호 10면

최익재의 글로벌 이슈 되짚기

이란의 한 여학생이 14일 우크라이나 민항기 희생자를 추모하며 초에 불을 붙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란의 한 여학생이 14일 우크라이나 민항기 희생자를 추모하며 초에 불을 붙이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란이 바짝 엎드렸다. 지난 3일 군부 실세인 거셈 솔레이마니가 암살된 직후 천명했던 대미 항전 의지는 자취를 감췄다. 중동에서 반미 전선의 최선봉에 서 있던 기존의 이란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슬람 시아파 맹주라는 위상마저 손상을 입을 처지다. 이란은 솔레이마니 암살에 대한 응징은커녕 핵합의(JCPOA·포괄적 공동행동계획) 문제에서도 한 발 물러서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란 군사력 열세로 맞불엔 한계 #민항기 격추로 사태 초점 급반전 #충동적인 솔레이마니 제거 작전 #3차 대전 운운할 만큼 혼란 불러 #북한, 핵·미사일 더 집착 가능성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지난 16일(현지시간) TV 연설에서 “정부는 매일 군사적 대립과 전쟁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 국제사회와 대화는 어렵지만 가능한 상태”라고 밝혔다. 같은 날 중앙은행 간부들과의 회의에선 “핵합의 전면 철회를 검토하고 있지 않다”며 “그럴 경우 우리는 다시 문제들을 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지난 5일 “우라늄 농축 능력과 농도에 제한을 두지 않겠다”며 사실상 핵합의에서 탈퇴하려던 입장에서 후퇴한 것이다. 유화적 메시지를 국제사회에 보내면서 대화로 현 난국을 풀어가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분석된다.

이처럼 솔레이마니 사태가 빠르게 진정된 이유는 뭘까. 대미 강경파인 이란이 강력한 대미 보복을 접은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이란의 군사적 열세다. 핵탄두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 결정적인 비대칭 전략을 보유하지 못한 이란으로서는 보복 공격에 따른 미국의 재반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시아파 좌장으로 이라크 내 시아파 민병대와 레바논 헤즈볼라, 팔레스타인 하마스, 예멘 반군 등을 사주해 중동 내 미군을 타격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에 따른 비용도 결국 이란이 치러야 한다. 미국의 경제 제재로 인한 경제난도 이란 정부의 보복 의지를 꺾는데 한몫했다.

둘째, 176명이 숨진 우크라이나 민항기 격추라는 돌발 사건의 발생이다. 지난 8일 이란 혁명수비대 실수로 발생한 이 사건으로 솔레이마니 사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양상으로 방향을 틀었다. 초점이 이란-미국 대립 구도에서 우크라이나 민항기 격추 진상 규명으로 옮겨간 것이다. 이란 정부 은폐 시도까지 맞물려 현재 로하니 정부는 국내외적으로 큰 난관에 봉착해 있다.

셋째, 이란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반정부 세력이다. 솔레이마니 사태 전 이란은 지난해 11월부터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인해 수백 명이 숨지는 등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무능한 정부로 인한 경제난이 가장 큰 이슈였다. 이란 정부는 솔레이마니가 미군 드론의 폭격으로 숨지자 국민의 분노를 미국으로 돌리려다 오히려 역풍을 맞는 꼴이 됐다. 격추 은폐 시도로 이란 정부의 도덕성마저 지탄을 받게 된 것이다. 반정부 시위는 현재 테헤란·타브리즈 등 이란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다.

AP통신 등은 “전반적인 상황을 감안할 때 이란 정부가 미국과 군사적 전면 충돌을 선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며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불균형적인 방식’으로 대응하겠다고 경고했던 만큼 자칫 이란 정부가 붕괴되는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반면 트럼프 대통령에겐 행운이 따랐다. 솔레이마니 암살은 자칫 중동에 발목을 잡힐 수 있는 악수(惡手)였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민항기 격추라는 변수가 생기는 등 상황이 트럼프식 강공에 유리한 방식으로 전개됐다. 결과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재선을 앞두고 국내외적으로 자신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솔레이마니 제거 작전은 ‘트럼프 리스크’가 얼마나 우려할 만한 것인지도 분명히 보여줬다. 불과 며칠 동안이었지만 국제사회는 제3차 세계대전을 운운할 만큼 큰 혼란에 빠졌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암살과 관련해 협의한 국가는 이스라엘뿐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우방국은 물론 유럽 주요국과도 일절 논의가 없었다고 한다.

로이터 통신 등은 “솔레이마니 사태는 미 대통령의 선택이 세계를 원치 않는 전쟁과 혼란에 휘말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며 “군사적 행동에 관련해 미 대통령에 대한 의회의 견제가 더욱 강화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북한에 주는 시사점도 작지 않다고 말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장거리 핵미사일에 더욱 집착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군사적 억지력 차원에서라도 이란이 보유하지 못한 비대칭 전략 확보에 박차를 가할 것이란 관측이다. 일각에선 이로 인해 북·미 비핵화 협상이 장기간 표류할 것이란 우려도 제기된다.

중국의 개입이 필요한 시점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중국은 2002년 2차 북핵 위기로 북·미 협상이 중단됐을 때 6자회담으로 돌파구를 마련했었다.

최익재 기자 ijcho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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