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오디세이] 도쿄 올림픽 앞둔 신치용 진천선수촌장
국가대표 종합훈련원인 진천선수촌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2020 도쿄 올림픽(7월 24∼8월 9일)이 200일도 남지 않았다. ‘금메달 못 따면 어때. 최선을 다하면 되지’ 라는 쿨한 정서와 ‘그래도 일본에는 지면 안 된다’는 압박이 공존한다. 게다가 최근 몇몇 종목 대표팀 내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국가대표를 보는 시선도 곱지만은 않다.
불미스런 일 재발 안 되게 인성 교육 #선수들 자부심 높여주는 게 내 역할 #컵라면·피자·치킨 몰래 먹지 않도록 #다이어트 식단, 몸에 좋은 야식 제공 #후쿠시마산 식자재엔 국제 공조 #‘못 먹겠다’는 선수에겐 한식 줄 것 #지도자는 솔선수범, 욕도 먹어야 #‘기본이 서면 길 생긴다’ 이치 절감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엘리트 스포츠의 요람’을 지켜야 할 촌장(村長)이 있다. 지난해 2월 부임한 신치용(65) 진천선수촌장이다. 그는 프로배구 삼성화재의 초대 감독으로서 20년간 숱한 우승을 이끌어 낸 ‘코트의 제갈공명’이다. 누구보다 선수와 훈련을 잘 알고, 성과를 만들어낼 줄 아는 지도자다. 신 촌장이 온 이후 선수촌의 분위기는 밝아졌고, 규율이 잡혔다는 평가가 많다.
충북 진천군 광혜원면에 자리잡은 진천선수촌을 찾았다. 특유의 푸근한 웃음으로 기자를 맞은 신 촌장은 “선수들의 자신감과 자존심을 높여주는 게 내 역할”이라고 말했다.
# 진천 영양사ㆍ조리사 30명 도쿄 동행
- 요즘 하루 일과는.
-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5시 반에 운동장으로 나가 운동 환경을 살핀다. 오전에는 훈련을 지켜보고 오후에는 지도자들을 만난다. 선수촌의 주인은 선수고, 선수촌의 목적은 훈련이다. 선수들이 잘 먹고 편하게 지내고 훈련 잘할 수 있게 도와주면 된다. 예를 들어 체급 경기 선수들을 위한 다이어트 식단을 만들고, 몸에 좋은 야식을 제공하는 것 등이다. 예전에는 새벽에 쓰레기통을 뒤져 보면 컵라면 용기가 수북하게 나왔다. 컵라면·피자·치킨 등을 야식으로 먹으면 안 된다는 걸 선수들이 모르는 거다. 그걸 가르쳐주고 대신 먹을 수 있는 걸 제공해야 한다.”
- 가장 신경 쓰는 건 뭔가.
- “잘 먹이고 잘 입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존중이고 선수들의 마음을 얻는 거다. 자부심을 느끼고 책임감을 갖게 하려면 존중·이해·격려해 줘야 한다. ‘나를 챙겨주는구나’고 느낄 때 진심에서 우러나서 운동을 하게 되고 그래야 마지막 승부처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 수영·쇼트트랙 등에서 선수촌 내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재발 방지책은.
- “존중과 교육이다. 한 달에 두 번 소양교육과 인성교육을 한다. 유도·레슬링처럼 상대를 잡고 하는 종목에서는 애매한 장면이 나올 수 있다. 쇼트트랙 혼성 계주는 남자 선수가 여자 선수 엉덩이를 밀어줘야 한다. 그런 걸 장난처럼 하면 이상하게 된다. 결국 교육이 중요하고, 교육의 기본은 사람존중이다.”
- 일본이 방사능 누출 지역인 후쿠시마산 식자재를 올림픽 때 쓰겠다는 입장이다.
- “선수촌 차원에서 대비하고 있다. 도쿄의 객실 80개짜리 호텔을 통째로 빌려 선수지원센터를 운영한다. 진천선수촌 영양사와 조리사 등 30여 명이 훈련 파트너나 일부 지도자의 숙식을 해결하는 동시에 선수촌에 묵는 선수들의 영양 지원을 맡는다. 스트레스로 식욕이 떨어지거나 선수촌 음식이 안 맞는 선수들에게 갈비찜 같은 한식을 제공한다. 일본 측에서 끝까지 후쿠시마산 식자재를 고집한다면 다른 나라 선수단과 공조해서 대처하겠다. 선수단 전체 급식을 조달하기는 어렵겠지만 ‘도저히 이건 못 먹겠다’ 하는 선수는 챙겨야 한다.”
- 일본은 금 30개-종합 3위 목표를 내놨다. 우리는 금 10개도 힘겨운데.
- “일본은 준비를 많이 했고 홈 이점도 당연히 있을 거다. 일본의 성적보다는 우리 선수들이 정정당당하고 멋진 경기를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하다. 금 7개도 어렵다, 판정에서 불리할 거라는 얘기도 나온다. 나는 반대로 우리 선수들이 일본 가서 하거나 일본과 맞붙으면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나올 거라고 믿는다. 강세종목에서 평년작만 해 주면 금 10개로 10위 안에 들 수 있다고 본다. 모든 종목이 중요하지만 특별히 야구·축구(최종예선 진행 중)·마라톤(케냐 출신 귀화선수 오주한 출전)은 일본보다 잘했으면 한다.”
경남 거제 출신인 신치용은 초등학교 5학년 때 부산으로 유학을 가 배구를 만났다. 중학교 때는 키가 작아 세터를 했고, 키가 크면서 세터와 레프트 공격수를 겸했다. 성균관대에 진학한 신치용은 스케이트를 배우다가 허리를 크게 다치게 된다. 4학년 때 배구를 그만두고 현대 계열사에 입사한다. 허리 때문에 군 면제를 받을 줄 알았는데 현역 입영 대상자가 됐고, 보안사 배구단에 끌려가 ‘컴퓨터 세터’ 김호철과 함께 뛰었다. 전역 무렵 한국전력에서 파격적인 조건으로 그를 데려갔다. 한전 코치-청소년대표 코치-국가대표 코치를 경험했고, 95년 삼성화재 창단 감독으로 전격 발탁된다.
- 지도자로서 철학은 무언가.
- “첫째가 솔선수범이다. 나는 술을 좋아하고 과음할 일도 많지만 한 번도 새벽 운동에 빠진 적이 없다. 선수촌에서도 ‘촌장님이 새벽에 한 번도 안 빠지니까 무섭다’는 말을 듣는다. 선수한테 책잡힐 짓을 하면 안 된다. 그리고 선수는 절대 스스로 뛰어넘을 수가 없다. 내가 늘 ‘동네배구 하려면 60, 아마추어 하려면 80, 프로 하려면 100, 우승하려면 120은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선수는 혼자서 90이상 못 간다. 100을 넘길 수 있도록 자극을 주는 게 지도자다.”
- 외국인 공격수에게 지나치게 의존한다며 ‘몰빵배구 원조’라는 욕도 들었는데.
- “감독은 주어진 상황에서 승리하기 위해 방법을 찾고, 욕 먹는 게 숙명인 사람이다. 팀 전체 기본기가 안 되면 몰빵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삼성화재를 거쳐간 가빈·레오·안젤코 등은 나를 ‘동양의 아버지’ ‘둘째 아버지’라고 하는데, 그들을 결코 편하게 해주지 않았다. 기본기 훈련을 혹독하게 시켰지만 왜 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설명해 줬다.”
#사위 박철우에게 "기본 안해?” 불호령
- ‘코트의 제갈공명’ 별명도 얻었는데.
- “그 별명을 지어주신 기자님께 지금도 감사하다(웃음). 상대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알면 내가 뭘 해야 하는지가 딱 나온다. 마지막 포인트가 다가오면 지시가 들어가야 한다. ‘이번에 상대가 이거 할 확률이 높아. 내가 책임질 테니까 너희는 이렇게 해’ 라고. 상대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공격 루트를 선택했는지, 그때 성공률이 몇 퍼센트였는지 머릿속에 입력이 돼 있어야 한다.”
- 요즘 삼성화재도 성적이 안 좋고, 삼성 스포츠단이 전체적으로 무기력해 보인다.
- “삼성이 국내 최고 기업으로서 사회적 책임이 있는데 안타깝다. 최순실 사태를 거치면서 스포츠에 대한 지원을 확 줄였다. 지금 삼성은 스포츠를 할 생각이 없고 마지못해 끌고가는 것 같다. 오너가 정확한 사인을 안 주는데 실무 책임자가 스포츠를 안 좋아하면 참 힘든 상황이 된다.”
신 촌장은 태릉선수촌에서 만난 농구 대표 전미애씨와 결혼했다. 둘째딸은 ‘얼짱 농구선수’로 유명한 신혜인이고, 사위는 현대캐피탈에서 뛰다 라이벌 삼성화재로 이적한 박철우다.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는 ‘코트의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회자됐다. 지금은 딸 둘을 낳고 잘 살고 있다.
삼성화재로 옮긴 뒤 박철우는 ‘장인 감독’에게 “너는 기본은 안 하냐? 그걸 배구라고 해?”라는 욕을 엄청나게 먹었다고 한다. “철우는 설렁설렁 뛰다가 공격만 하는 스타일이고, 나는 기본기 훈련을 철저히 시키는 지도자 아닌가. 철우가 초반에는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하더라. 다행히 잘 적응했고, 남편과 아빠로서도 좋은 점이 많은 것 같다”며 신 촌장은 미소를 머금었다.
나이를 먹어 갈수록 ‘본립도생’(本立道生·기본이 서면 나아갈 길이 생긴다) 문구가 가슴에 와 닿는다고 그는 말했다. “기본만 지키면 절대 실패 안 하고 보람 있게 살 수 있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솔선수범하는 습관이 발전의 원동력이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jerry@joongang.co.kr
※ 신치용 촌장 인터뷰 전문은 월간중앙 2월호 ‘정영재 전문기자의 레전드를 찾아서’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