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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 가르치는 '디자인 씽킹의 전설'이 말했다 "AI 믿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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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혁신(Innovation). '혁신해야 미래가 있다'고 입에 달고 살긴 쉽지만, '혁신에 성공했다'고 자신하기란 어렵다. 혁신,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일까. 혁신에도 정답이 있을까.

‘디자인 씽킹’의 전설적 원로학자 #래리 라이퍼 美 스탠퍼드 교수 인터뷰

글로벌 혁신기업이 밀집한 미국 실리콘밸리 스탠퍼드대에는 '혁신의 방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 2005년 설립된 스탠퍼드 디자인스쿨(디스쿨·d.School)이다. 디스쿨은 '디자인 씽킹'을 강조한다. 생각을 다르게 디자인하는 데서 혁신이 시작된다는 것.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고 외친 스티브 잡스의 애플이나 구글·에어비앤비 같은 혁신기업들은 디자인씽킹을 실제 업무에 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 15일 스탠퍼드 디스쿨의 디자인씽킹 석학을 만났다. 래리 라이퍼(Larry Leifer·80) 스탠퍼드대 디자인 연구소장 겸 기계공학과 교수다.

래리 라이퍼 스탠퍼드 대학교 디자인리서치센터장 겸 기계공학과 교수가 15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GS홈쇼핑 본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래리 라이퍼 스탠퍼드 대학교 디자인리서치센터장 겸 기계공학과 교수가 15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GS홈쇼핑 본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이날 라이퍼 교수는 서울 문래동 GS홈쇼핑 본사에서 이 회사 임원들과 세미나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올해 여든살인 라이퍼 교수는 인터뷰 내내 직접 메모지에 그림을 그리며 열정적으로 설명하는가 하면, 자주 소리 내어 웃었다. 완전히 사라졌다는 그의 청력은, 이 천진한 석학의 삶에 찰나의 걸림돌도 되지 않는 듯 했다.

혁신엔 무엇이 필요한가.
'모호성과 함께 춤을(Dancing with Ambiguity)' 춰야 한다. 처음 만난 상대와 춤을 춘다고 생각해보자. 상대가 어떻게 움직일지, 어떤 음악이 나올지 알 수 없다. 어떤 변수가 있는지 모르는 상태, 그것을 우리는 '모호성' 또는 '미래'라고 한다. 우리는 미래를 대비(prepare)할 순 있지만 예측(predict)할 순 없다. 너무 많은 변수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를 내다보려면 '선견(Foresight Innovation)'이 필요하다. 스탠퍼드의 '선견 워크숍'은 학생들에게 10년 앞을 보기 위해선 20년 전을 돌아봐야 한다고 가르친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어떤 문제가 점점 감소하고 어떤 문제가 점점 커지는지 보인다. 바다를 뒤덮고 있는 플라스틱처럼 말이다.
래리 라이퍼 교수가 인터뷰 도중 그린 '선견적 혁명'의 구조. 그림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기자가 색깔과 설명을 넣었다. 김정민 기자

래리 라이퍼 교수가 인터뷰 도중 그린 '선견적 혁명'의 구조. 그림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기자가 색깔과 설명을 넣었다. 김정민 기자

한국 기업의 혁신은 어떤가.
별로 달갑게 들리진 않겠지만, 한국 기업들은 "애플을 베끼는 것"에 아주 능하다. (한국 기업들의) 어떤 혁신은 표절(copy)이지만, 어떤 혁신은 독창적(original)이기도 하다. 한국처럼 협조(Cooperation) 문화가 강한 곳에선 이제부터 협력(Collaboration)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협력과 협조는 뭐가 다른가.
(인류의 진화를 메모지에 그리며) 인간은 사냥을 위해 '협력'했을 때 가장 키가 컸다. 산업혁명, 즉 자본주의와 기술이 나타나면서 인간은 서로 '협조'하기 시작했다. 협조는 사실 "시키는 대로 해(Do what's expected)" 혹은 "효율적으로 해"라는 뜻이다. 협력은 "나는 동의할 수 없는데?"라고 자신의 감정을 말하는 것이다. 협력의 관계에선 서로 감정도 오가고 논쟁적인 대화도 하게 된다. 인류는 '협력'을 통해 진화했고, '협조' 때문에 퇴화 중이다.
래리 라이퍼 교수가 인터뷰 도중 그린 '인류의 진화 과정'에 기자가 이해를 돕기 위해 이모티콘을 넣은 것. 순서대로 원숭이-원시 인류-사냥 시절-산업혁명기-AI 시대. 라이퍼 교수는 "인류는 협력과 함께 진화했고, 협조와 함께 퇴화 중"이라고 말했다. 그림의 마지막엔 사람은 사라지고 컴퓨터(AI)만 남아있었다. 김정민 기자

래리 라이퍼 교수가 인터뷰 도중 그린 '인류의 진화 과정'에 기자가 이해를 돕기 위해 이모티콘을 넣은 것. 순서대로 원숭이-원시 인류-사냥 시절-산업혁명기-AI 시대. 라이퍼 교수는 "인류는 협력과 함께 진화했고, 협조와 함께 퇴화 중"이라고 말했다. 그림의 마지막엔 사람은 사라지고 컴퓨터(AI)만 남아있었다. 김정민 기자

라이퍼 교수의 방한은 15년 전과 10년 전에 이어 세 번째다. 이번엔 스탠퍼드 혁신&디자인 연구소 주최로 지난 13~14일 서울 강남에서 열린 '스탠퍼드 디자인씽킹 심포지엄 2020' 참석차 방한했다.

혁신&디자인 연구소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뭔가.
리서치의 're(다시)'다. 우리는 흔히 디자인이 뭔지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연구자(researcher)라면 다시 찾고, 다시 측정하고, 다시 평가해야 한다. 그러려면 '왜?'가 중요하다. 매년 10개 이상의 기업과 일하는데, 기업의 연구자들은 대상(what)·방법(how)·시점(when)·주체(who)·얼마(how much)는 물어봐도 왜(why)는 절대 묻지 않는다. '왜'를 물어야 한다.
많은 기업과 함께 일했다. 어떤 산업이 디자인 씽킹에 가장 취약하던가.
모든 산업이 그렇다. 모두 자본주의에 종속돼있기 때문이다. 디자인 씽킹은 싸고 효율적인 제품 대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라고 한다.
래리 라이퍼 스탠퍼드 대학교 디자인리서치센터장 겸 기계공학과 교수가 15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GS홈쇼핑 본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래리 라이퍼 스탠퍼드 대학교 디자인리서치센터장 겸 기계공학과 교수가 15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GS홈쇼핑 본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전통 산업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하고 싶어한다.
빅데이터를 믿지 마라. 인공지능(AI)도 믿지 마라. AI는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 기자와 로봇 기자가 날 인터뷰한다고 생각해보자. 인간 기자는 '맥락'을 활용해 훨씬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기자의 맥락, 나의 맥락, (기자가 속한) 문화권의 맥락 등은 커다란 변수가 되어 새로운 반응을 이끌어낸다. 인간 하나가 움직이는 것은 원형 피질, 감정 피질, 운동 피질 등 수십만 개의 병렬 컴퓨터가 움직이는 것과 같다. 하지만 AI와 빅데이터는 그걸 이해하는 법을 모르고, 우리 연구에 따르면 앞으로도 배울 수 없을 것이다. AI에게 인간의 감정을 읽게 하는 연구들도 해봤지만 모두 포기했다. 치명적인 과오들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래리 라이퍼 스탠퍼드 대학교 디자인리서치센터장 겸 기계공학과 교수가 15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GS홈쇼핑 본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래리 라이퍼 스탠퍼드 대학교 디자인리서치센터장 겸 기계공학과 교수가 15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GS홈쇼핑 본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AI와 빅데이터에 미래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디자인이 그들의 '탈출'을 도와줄 수 있다. 지난 100년간 기술은 자본주의를 위해 조절돼왔다. 이 사실은 기업 경영진에게 "앞으로 AI와 빅데이터 같은 새로운 기술은 필수"라는 아주 큰 착각을 심어줬다. 나 같은 신경과학자들은 본질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라고 본다. 중요한 것은 기술력이 아니라 감정(emotion)이다. 우리 연구에 따르면 신뢰는 감정적 신호에서 온다. 훌륭한 디자인팀의 조건은 '기술력'이 아니다. 팀워크, 그리고 감정을 표현하는 기술이 더 중요하다.

유쾌한 원로학자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래리 라이퍼 스탠퍼드 대학교 디자인리서치센터장 겸 기계공학과 교수가 15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GS홈쇼핑 본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래리 라이퍼 스탠퍼드 대학교 디자인리서치센터장 겸 기계공학과 교수가 15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GS홈쇼핑 본사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귀가 전혀 들리지 않는데 계속 강의하고, 연구하고, 여행할 수 있는 열정의 동력이 뭔가.
남은 생만 보면 나는 당신보다 운이 좋다. 이 세상 모든 소음을 안 들어도 되니까. 도시는 점점 더 시끄러워질 거다. 난 전철역에서 잠도 잘 수 있고, 언제 어디서나 명상도 할 수 있다. 아주 좋은 점이다(It's a benef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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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민 기자 kim.jungmin4@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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