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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차라리 수사 잘못했다 말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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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권석천
권석천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석천 논설위원

권석천 논설위원

“우리가 정치적 중립성, 이 부분을 너무 나이브하게 생각했는지 몰라요. 정권이 검찰을 정권의 목적에 맞춰 장악하려는 시도만 버린다면 검찰 민주화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저절로 따라온다고….”

‘거역’ 프레임이 검찰 개혁인가 #개혁은 당당하고 개혁적이어야 #“나이브했다” 함정 빠지지 말기를

『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2011년 출간)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의 검찰 개혁이 절반의 성공에 그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민주적 통제를 간과한 채/ 검찰의 선의에 기대어/ 정치적 중립만 보장해 주면/ 나머지는 알아서 개혁할 것’이란 낙관적인 전망이 개혁을 그르쳤다는 반성이 책 전반에 반복된다.

이 책이 나온 계기는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었다. 검찰이 중계방송하듯 피의사실을 언론에 흘려 여론재판이 이뤄지게 함으로써 인간적인 모멸을 주고 정신적 고통을 가했다고 지적한다. ‘본질적으로 노 대통령 수사는 정치권력과 검찰의 복수극이었다.’(393쪽)

끝없는 압수수색과 검찰 소환, 언론 보도…. 지난해 8월 시작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 수사는 현 정부 인사들에게 2009년의 악몽이 되살아난 것이었다. 누구보다 낭패감을 느낀 이는 문 대통령 자신이었을 것이다.

결정적인 패착은 ‘적폐 청산’을 전적으로 검찰 손에 맡긴 데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출범한 새 정부의 과제는 대화와 타협으로 정치를 복원하고, 권력기관을 정상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특검 수사의 연장선에서 ‘쉽고 편한’ 검찰 수사에 기댔다. 제도 개혁으로 풀어야 할 문제까지 과거 정부 인사들을 구속시키고 법정에 세우는 것으로 대체했다.

그 밑바닥엔 ‘검사 윤석열’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를 서울중앙지검장에 발탁했고, 다시 검찰총장에 앉혔다. ‘서울중앙지검장→총장 직행’을 깨겠다는 원칙까지 허물었다. 불과 반년 전 검찰 핵심 요직을 모두 ‘윤석열 사단’에게 내준 것도 그의 선의를 신뢰했기 때문이었다.

문 대통령이 조국 장관 임명을 강행하면서 사태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정치가 실종된 자리는 검찰의 독무대가 됐다. 윤 총장은 “대통령에 대한 충심(忠心)에는 변화가 없다”고 했다. 그의 ‘충심’에 계속 변함이 없자 문 대통령은 ‘민주적 통제’를 강조했다. 이번 검찰 인사는 정확히 그 지점에 있다.

‘법무부 장관은 검찰총장의 의견을 들어 검사의 보직을 제청한다.’ 검찰청법 제34조에 대해 『검찰을 생각한다』는 ‘대통령의 권한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검찰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하는 것은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159쪽) 해당 법 조항이 단순 청취를 넘어 협의 절차임을 인정하면서 ‘문민 통제의 원칙이 흔들려선 안 된다’고 지적한 것이다.

답은 조사 하나 손댈 곳이 없다. ‘민주주의가 확대돼야 검찰을 막을 수 있다. 정치가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되지 않도록 정상화·선진화돼야 한다. 정치권 스스로 검찰에 의존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고쳐야 한다.’(185, 186쪽)

정확한 진단이다. 문제는 이제라도 그 진단을 제대로 실현시킬 수 있느냐다. 정치를 복원하지 않고는 검찰 수사가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검찰공화국’은 사라지지 않는다.

중요한 건 “총장이 저의 명(命)을 거역했다”는 식의 구시대적 권위주의에 기대지 않는 것이다. 검찰이 수사를 잘못했다면 ‘항명’ 대신 수사에 관해 말하라. “수사권 남용을 인사권으로 바로잡았다”고 선언하라. “관례”를 방패 삼지 말고 차라리 "잘못된 관례는 깨겠다”고 하라. 당당하지 못한 심리전으론 누구의 마음도 움직이지 못한다.

“우리가 너무 나이브했다”는 자각이 정반대의 함정에 빠지지 않길 바란다. 민주적 통제에서 ‘민주적’이 생략되면

‘통제’만 남을 뿐이다. 청와대와 가깝다는 서울중앙지검장이 차기 총장이 되는 ‘관례’가 되풀이돼서도 안 된다. 개혁은 개혁적이어야 하고, 진보는 진보다워야 한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