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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무덤 마을’에서 만난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허호의 꿈을 찍는 사진관(5)

2005년 처음 가본 컴패션 현지. 필리핀의 한 관광지 인근에 무덤들 사이로 슬럼이 형성되어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무덤마을보다 충격이었던 것은 그곳에서 들려온 어린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였다. [사진 허호]

2005년 처음 가본 컴패션 현지. 필리핀의 한 관광지 인근에 무덤들 사이로 슬럼이 형성되어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무덤마을보다 충격이었던 것은 그곳에서 들려온 어린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였다. [사진 허호]

혹시 ‘그린 파파야 향기’라는 오랜 영화를 아시나요? 내용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여자 주인공이 햇빛 잘 드는 창가에서 개미가 줄지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던 눈빛이 기억나요. 며칠 전 필리핀 컴패션 어린이의 가정 방문 중이었는데 아이가 밖에 나가는 거예요. 따라 나갔지요. 아이가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가 보니까, 전선이 보이는데 꼬물꼬물해요. 개미들이 일렬로 전선을 타고 가더라고요.

최대한 클로즈업을 해서 찍었는데, 생태 사진과는 다른 아이의 시선에 따른 감성이 담기게 되었죠. 이런 뜻밖의 발견을 할 때가 사진가에게 재미있는 순간일 거예요. 사진이라는 것은 극적인 장면만 담을 것 같은데 의외의 엉뚱한 이미지를 남기기도 한다는 거지요. 이런 거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보는 훈련’이에요. 현장에서 보고 느끼며 어떤 떨림이 있는지를 사진에 담기 위해 최대한 민감하게 감성의 각을 세우는 거죠.

아이가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가 보니, 개미가 일렬로 전선을 타고간다. 이런 거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보는 훈련'이다.

아이가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가 보니, 개미가 일렬로 전선을 타고간다. 이런 거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것이 '보는 훈련'이다.

보는 훈련에 관해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저는 클래식 음악을 예로 들어요. 클래식을 많이 안 들어본 사람이 클래식을 좋다고 하는 경우는 드물죠. 대중가요는 직접적으로 감성을 때리고 바로 좋다고 말할 수 있는데, 클래식은 많이 듣고 하면서 학습과 훈련이 필요하더라고요. 그게 되면 클래식 음악의 깊은 울림을 알고 역시 클래식이구나 감탄하게 되고 귀가 열리죠. 귀가 열렸을 때 마침내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잖아요. 그림이든, 사진이든 바로 이런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찍은 사람의 의도와 깊이를 보는 사람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거죠. 찍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보는 훈련’이 필요한 거죠.

사진가도 운동선수처럼 보는 훈련을 할 수 있어요. 훈련으로 몸이 반응하게 하는 거죠. 저는 대학 때 친구와 이런 놀이를 종종 했어요. 어느 지점에서부터 어느 지점까지 걸어간다 쳐요. 친구랑 같이 걸을 때 무엇을 보자고 약속을 하지 않죠. 1㎞ 정도 걸어서 만난 뒤에 골목에 뭐 있는지 봤냐며 서로 이야기를 나눠요. 쇼윈도에 뭐가 있었고 간판이 어땠고, 주인 표정이 어떠했다는 등…. 우리끼리 그냥 그러고 많이 놀았어요. 그것도 일종의 보는 능력을 키우는 훈련이었던 거죠.

셜록 홈즈를 보세요. 셜록 홈즈는 자기 집에 처음 온 방문자가 자기소개를 하지도 않았는데도 설명을 하잖아요. 그 사람의 양복의 주름이 어땠고, 주머니에 티켓이 보였고, 구두가 어떻고 등등 이야기해주죠. 그런 게 그냥 보이는 이미지가 아니고, 결국은 다 의미가 있었던 거잖아요. 바로 그렇게 훈련을 하는 거지요.

비석 사이에서 아이들이 벌거벗고 뛰어놀았고, 무덤 사이로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비석 사이에서 아이들이 벌거벗고 뛰어놀았고, 무덤 사이로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2005년 11월 한창 광고 사진 촬영으로 바쁠 때였어요. 아내로부터 해외 어린이를 돕는 컴패션이라는 단체에 재능기부로 사진을 찍어 달라는 권유를 받았죠. 아내가 워낙 강하게 권하는 통에 마지못해 가겠다고 했어요.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있는데, 옆에 앉은 처음 본 사람이 말을 걸었어요. 이 사람이 사진을 좋아해서 저를 알아본 거예요. 컴패션 후원자여서 컴패션에 대해 자세히 듣게 되었죠. 덕분에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그냥 한 번 가볼까’에서 ‘가서 열심히, 잘 찍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도시 인근의 슬럼가. 무덤 근처에 움막 같은 것을 짓고 사람들이 마을을 만들어 사는 곳이다.

도시 인근의 슬럼가. 무덤 근처에 움막 같은 것을 짓고 사람들이 마을을 만들어 사는 곳이다.

그렇게 해서 가게 된 곳이 필리핀의 관광지 근처 ‘무덤 마을’이었어요. 인솔 책임자인 서정인 한국컴패션 대표에게 물었죠. “어떻게 찍어 드릴까요?”

광고 사진을 찍던 습관 때문이었어요. 광고사진을 찍을 때는 광고주의 의중이 제일 중요하니까요. 그런데 서 대표의 이야기가 저를 당황하게 했습니다.“그냥 보세요.” 비슷한 업종에 있는 사람들은 알 거예요. 이런 주문이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뭘 어떻게 찍으라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죠.

‘무덤 마을’은 한마디로 도시 인근의 슬럼인데, 무덤 근처에 움막 같은 것을 짓고 마을을 만들어 사는 곳이었어요. 방 한 칸 얻을 돈이 없어 무덤에 모여 살기 시작해 마을이 된 곳으로 범죄자들의 살벌한 위협과 마약, 질병이 가득했죠. 저녁이면 외부인들은 통행금지가 되는 그런 지역이었습니다. 웬만한 한인들은 출입금지로 도시 인근에 이런 슬럼가가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지요. 우리는 필리핀 컴패션 직원들의 안내를 받고 나서야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이 있었습니다. 비석 사이에서 아이들이 벌거벗고 뛰어놀았고 무덤 사이로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어요. 웃음소리에 끌려 가보니, 환하게 웃는 아이들의 모습이 씩씩하고 해맑았어요. 충격이었죠. 정말 사랑스러웠어요. 아이들과 뒤엉켜 공을 차고 뛰어놀다 또 부지런히 그들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이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일 년에 서너 차례, 많게는 매달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어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그 이상으로 불쌍하다거나 우리와 다른 부류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그 이상으로 불쌍하다거나 우리와 다른 부류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서 대표는 저에게 ‘그냥 보세요’라고 했어요. 이 부담스러웠던 말이 이 어린이들도 나와 똑같은 사람이구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건 정말 사실이지만 그 이상으로 불쌍하다거나 우리와 다른 부류라고 생각하지 않고 볼 수 있게 됐습니다. 이때 비로소 ‘그냥 보세요’는 제게 진짜 편안하고 자유로운 말이 되었습니다. 컴패션과 함께 전 세계를 다니며 어린이들을 보는 눈은 물론 마음의 눈까지도 넓어짐을 매 순간 경험하고 있어요.

사진으로 서로의 마음까지 깊이 볼 수 있게 되다니, 정말 근사하죠?

사진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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