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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2020년의 자화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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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정제원 기자 중앙일보 문화스포츠디렉터
정제원 중앙일보플러스 스포츠본부장

정제원 중앙일보플러스 스포츠본부장

경기도 분당에서 서울역을 오가는 9401 광역버스는 분당 주민의 발이다. 출퇴근 시간엔 40대가 넘는 빨간 버스가 한꺼번에 거리를 누빈다. 배차 간격도 3~4분 정도다. 간발의 차로 버스를 놓쳐도 큰 걱정이 없다. 곧 다음 버스가 오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거의 동시에 두 대가 나란히 운행하는 경우도 있다. 버스가 텅텅 빌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두 대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란히 달려도 좌석이 꽉 차는 건 물론이요, 서서 가는 승객도 적잖다. 그만큼 수도권 위성도시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일 터다.

집과 직장 가까워야만 행복할까 #빨간 버스는 수도권 주민의 발 #오늘도 희망 싣고 싱싱 달린다

기자도 그 승객 중 한 명이다. 외곽 도시에서 서울 중심부의 직장을 오가려면 출·퇴근 시간이 만만찮다. 편도 1시간 30분은 족히 잡아야 한다. 왕복 3시간을 길바닥에서 보내는 셈이다. 그런데 옆자리에 앉은 동료 부장은 회사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산다. 가끔은 자전거를 타고 출근한 뒤 이렇게 말하면서 경기도 주민의 속을 뒤집는다. “직장과 집이 가까운 ‘직주근접’이야말로 행복지수를 높이는 지름길이라니까요. 허허허….”

나는 서울특별시민의 말에 일정 부분 동의하면서도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항변한다. 왜냐하면 출퇴근길 빨간 버스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꽤 많기 때문이다. 음악을 듣고, 신문을 본다. 넷플릭스로 영화를 볼 수도 있다. (빨간 버스에선 퍼블릭 와이파이가 잘 터진다) 요즘 같은 때는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면 사방이 깜깜하다. 그래도 멀리서 빨간 버스가 달려오는 걸 발견하면 무척 반갑다.

서소문 포럼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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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 오른 뒤 뒷좌석에 앉자마자 이어폰을 귀에 꽂고 라디오를 듣는다. 이른 아침 회사로 향하는 길, FM라디오 DJ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밝고 경쾌하다. 나는 얼마 전까지 방송인 전현무가 진행하던 프로그램을 들으며 ‘이 사람 참 대단하다’고 느꼈다. 이른 아침에 갈라진 목소리를 쥐어짜면서까지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모습을 접하면서 그를 다시 보게 됐다. 요즘엔 박은영의 FM대행진을 주로 듣는데 이 프로그램의 진행자인 여자 아나운서 역시 놀라운 건 마찬가지다. 오전 7시부터 어떻게 그렇게 경쾌하고 발랄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경이롭기까지 하다. 때로는 프로그램 중에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춘다. (보이는 라디오로 본다) 매일 아침 8시 정각엔 진행자가 청취자에게 전화를 걸어 노래를 시킨다. 하루는 어떤 청취자가 지하철 안에서 전화를 받더니 주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세상엔 참 대단한 사람이 많다)

빨간 버스를 타고 다니다 보면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생긴다. 이른 아침 버스를 탄 승객들은 눈을 감고 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드르렁드르렁 코까지 곤다. 이런 승객이 한두 명이 아니여서 종종 코 고는 소리가 하모니를 이룬다. 앞머리에 헤어롤을 감고 버스에 오른 뒤 천연덕스럽게 메이크업을 하는 여자 승객도 있다. 만원 버스 안에서 선 채로 화장을 하는 신공을 선보이는 승객을 본 적도 있다. (그런데 왜 민망함은 보는 사람의 몫이던가) 술 한 잔 걸친 퇴근길엔 깜빡 잠이 들어 종점까지 가는 경우도 왕왕 있다.

삭막한 세상이라지만 우리 주변엔 마음이 따뜻한 사람도 제법 많다. 하루는 퇴근길 만원버스에 할머니 한 분이 올라타셨다. 언뜻 보아도 거동이 불편할 정도로 연세가 지긋한 분이었다. 빈자리가 없어서 할머니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던 찰나,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회사원이 번쩍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다. 할머니는 “아이고, 미안해서 어떡하나”를 연발하면서 자리에 앉으셨다. 빨간 버스를 타본 사람은 안다. 광역 버스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게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지를. 그런데도 그는 1시간 가까이 서서 가면서도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나는 자리를 선뜻 내준 그 젊은 회사원을 보면서 부끄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다.

새해가 밝았다. 어렸을 때는 2020년이 되면 하늘에 차가 붕붕 떠다닐 거라고 믿었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직도 우리는 이른 아침 만원버스를 타고 졸린 눈을 비비며 일터로 향한다. 서울의 아파트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나라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시끄럽지만, 승객을 가득 태운 빨간 버스는 오늘도 희망을 싣고 달린다. 경자년 한 해, 대한민국에 좋은 일만 가득하길.

정제원 중앙일보플러스 스포츠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