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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균 빠진 김용균법…시행령 만드는데 1년 끌다 힘빠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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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제2의 김용균 막자 〈상〉 

“요즘은 작업하러 들어갈 때 불안감이나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지난달 30일 충남 태안에서 만난 이준석 한국발전기술㈜ 노조위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16일 시행 산업안전보건법 허점 #건설장비 원청업자 책임 묻는 조항 #사망사고 20% 차지 굴착기는 빠져 #위험성 평가 주체에 근로자 제외

한밤중 고 김용균씨의 사고 소식을 듣고 가슴을 진정시키며 달려갔던 2018년 12월 10일. 스물네 살의 청년은 떠났지만 남은 동료에게 선물 같은 시설을 남겼다. 캄캄한 어둠이 드리워졌던 작업장은 밝은 LED 조명으로 대체됐다. 안전 펜스와 안전 커버도 설치됐다. 그다지 큰 비용이 투입되는 시설도 아니다. 1인 근무도 2인 1조로 바뀌었다.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다. 컨베이어 벨트가 멈춘 상태에서만 낙탄(벨트 밖으로 떨어진 석탄)을 치우도록 규정도 개정됐다. 돈도 안 드는 일이다. 이런 사소한 것에 소홀한 탓에 꽃다운 청춘이 졌다. 이 위원장은 “요즘은 우리가 개선안을 내면 원청(서부발전)의 감독관이 상의해서 조치를 취한다”며 “1년 전에 이런 태도를 보였다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년도 안 돼 … 또 나홀로 작업자 사고

서부발전의 이런 개선은 정부가 강력한 규제를 가하자 이뤄졌다. 근로자 생명을 정부가 눈을 부라릴 때까지 경시했던 셈이다. 더욱이 근로자를 지켜야 할 법적 안전장치 마련은 사고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오는 16일에야 시행된다. 이 법은 하청업체에 떠넘기던 책임을 원청에 지우는 등 진일보했다. 그러나 법을 집행하는 가이드라인이 되는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개정되면서 “개정법 이전으로 돌려놨다. 법을 무력화한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건설현장 사망 사고 주요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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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이렇다. 산업안전보건법에는 건설기계장비에 대한 원청 책임조항이 있다. 한데 시행령은 적용 대상을 3개 기종으로 제한했다. 건설업 사망사고의 20%가 넘는 굴착기·지게차·이동식 크레인, 덤프트럭 같은 사고 다발 장비를 제외했다. 컨베이어, 인양설비와 같은 위험기계기구를 사용하는 데 따른 도급인의 안전보건조치에 대한 의무내용도 쏙 빠졌다. 여기에다 5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에서 안전사고의 80%가 발생하는데, 이들 기업은 안전관리자 선임의무 적용에서 제외된다. “사각지대를 시행령으로 정당화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근거다. 또 산재예방제도의 핵심인 위험성 평가의 주체를 사업주와 관리감독자로 제한했다. 정작 현장에서 일하는 당사자인 근로자는 제외됐다.

김용균씨가 숨진 그해에만 일터에서 10만2305명이 다쳤다. 이 가운데 971명은 출근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질병으로 숨진 근로자까지 합치면 2142명에 달한다. 대부분 서부발전에서처럼 큰돈 들어가지 않는 안전설비만 갖췄어도, 근무 수칙만 제대로 만들고 지켰다면 일어나지 않을 불행이었다.

심지어 김용균씨가 숨진 것과 똑같은 사고 상황이 1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재연되기도 했다. 지난해 9월 전남 담양군의 콘크리트 생산 작업장에서다. 콘크리트 혼합기 하부에 설치된 컨베이어의 벨트가 손상되자 이를 정비하던 근로자가 고무벨트 사이에 오른팔이 말려 들어가 숨졌다. 컨베이어 주변에는 안전 펜스나 커버가 없었다. 작업도 혼자 했다. 석탄 이송 컨베이어 벨트의 설비 이상을 점검하다 벨트에 끼여 숨진 김용균씨 사례와 판박이다.

지난해 12월 21일 경기도 포천시 한 리조트에서 근로자 A씨(52세)가 숨진 사건도 사소한 안전장치를 소홀히 한 탓에 일어났다. 당시 A씨는 2층 높이의 엘리베이터 교체작업 중이었다. 기계의 균형추를 조립하다 중심을 잃고 15m 아래로 떨어져 숨졌다.

경찰 조사 결과 공사 현장엔 관리자가 없었다. 아르바이트생이 작업을 돕고 있을 뿐이었다. 숨진 A씨의 머리에 안전모는 보이지 않았다. 고공작업 때 추락을 방지하는 안전고리도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산재사망률, 독일의 5배에 달해

지난해 11월 5일 전남 장성군 산업단지 내 한 기업에선 비닐 불량품을 재생하기 위해 분쇄기에 투입하던 근로자 B씨(22)가 숨졌다. 불량품을 담은 포대에 부딪히는 바람에 손이 분쇄기로 빨려 들어가더니 순식간에 상반신이 쓸려 들어갔다. 광주지방고용노동청 김인태 근로감독관은 재해조사 의견서에 “분쇄기에 덮개만 설치했어도 일어나지 않을 사고였다”고 적었다.

이렇게 산업현장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은 근로자는 지난해 855명에 달했다. 정부는 전년보다 116명이나 줄었다고 홍보한다. 하지만 ‘하루에 두 명 넘는 근로자가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나라’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안전은 국민 누구나 누려야 하는 권리인데, 아직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산업 현장을 등져 안타깝다”고 말했다.

선진국과 비교하면 산업안전 실태는 심각하다. 지난해 사고사망만인율(근로자 1만 명당 사고로 숨지는 근로자 비율)은 0.45~0.46‱(추정치)이었다. 근로자 2만 명에 한 명꼴로 일터에서 사고를 당해 유명을 달리한다는 얘기다. 네덜란드(0.05‱), 독일(0.1‱), 노르웨이(0.15‱), 호주(0.17‱) 등 주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에 비하면 사고로 목숨을 잃는 근로자 비율이 최대 9배나 된다. 폴란드(0.19‱)보다도 2.4배 높다.

이로 인한 손실은 막대하다. 2018년 기준으로 산업재해로 인한 피해액이 25조1695억원이었다. 올해 일자리 예산(25조5000억원)을 사고로 날린 셈이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 교수는 “일하는 사람의 목숨조차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은 국가의 위신 문제”라며 “정부와 근로자는 물론 경영계도 산업안전 자체가 국가의 성장동력이란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정용환·전익진·최현주·신진호·이병준 기자 wol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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