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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손님, 강아지 생각…팔로워가 주문하면 그려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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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엄마 바쁘다”란 문구와 함께 하늘에서 내려온 손 두 개가 소낙비를 막고 있다. 그 아래론 어느 부녀가 아무것도 모른 채 다정하게 웃고 있다. 이는 일상만화 작가 ‘키크니’의 인스타그램(@keykney) 연재 코너 ‘무엇이든 그려드립니닷! ’의 한 장면. “아버지랑 부녀끼리 여행 다니는 모습을 보고 하늘에서 엄마가 어떤 생각 하실지 그려” 달란 독자 주문에 뭉클한 상상을 보탰다.

인스타 37만 팔로워 작가 키크니 #가족·갑질·다이어트 등 소재 다양 #대학 시절 돈벌이, 번아웃 경험 #어려움 겪으며 공감하는 힘 키워

처음 출근하는 막내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엄마의 마음은 어떨까, 하는 독자 댓글은 초등학교 시절 등교하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엄마 모습으로, 치킨집에서 반말하는 진상 손님을 대하는 모습을 그려달란 요청은, 치킨을 반 마리만 주며 “댁도 반말이니까” 속 시원하게 응수하는 사이다 장면으로 재탄생했다.

독자 입장에선 자신의 이야기가 만화로 그려지는 신기함에, 심리 상담하듯 위로를 주는 답변까지 얻으니 1석 2조다. 이런 주문 제작 만화로, 키크니의 인스타그램 팔로 수는 무려 37만에 이르렀다. 2017년 계정을 열고 이듬해 7월 연재를 시작한 지 2년 만이다.

지난해 11월 일상 만화 작가 키크니의 『일상, 다~반사』 출간 북토크에 참석한 팬들. [사진 샘터]

지난해 11월 일상 만화 작가 키크니의 『일상, 다~반사』 출간 북토크에 참석한 팬들. [사진 샘터]

◆해결책보단 공감대=“솔직해서 좋아해 주시는 것 같아요.” 지난해 11월 서울 동선동 독립서점 부비프에서 새 에세이집  『일상, 다~ 반사』(샘터·사진)  북토크로 만난 키크니의 말이다. 그는 “내가 (사연자의 고민을) 해결해줄 거란 생각보단 출퇴근길에 ‘훗’ 웃을 수 있게 그려보잔 생각으로 임하고 있다”고 했다. “주위에서 알게 되면 솔직하게 그릴 수 없을 것 같다”며 가족에게도 자신의 정체를 알리지 않고 익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발상의 전환에 웃음·공감을 버무린 만화엔 바로 그 자신이 마음의 병을 앓은 경험이 자양분이 됐다.

일상툰 작가 키크니의 첫 에세이집 『일상, 다~ 반사』. [사진 샘터]

일상툰 작가 키크니의 첫 에세이집 『일상, 다~ 반사』. [사진 샘터]

올해 11년 차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인 그는 원래 어린이책 등 삽화를 주로 그렸다. “대학 시절 부모님 몸이 편찮으셔서 돈을 벌어야 했죠. 일이 많지 않을 땐 기업체에 다양한 그림체로 어필해서 일을 따냈어요. 7~8년을 하루 2~3시간씩 자며 막일하듯, 기계처럼 그림을 그렸죠.”

성실하단 평판이 쌓여 일은 늘었지만, 갑작스레 병이 찾아왔다. ‘번아웃’ 증후군으로 인한 공황장애였다.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길 줄 몰랐다. 나는 늘 긍정적인 사람이고, 건강하게 사는 줄만 알았다.” 이번 에세이집에 털어놓은 속내다. “잠을 못 잤고 밥도 먹을 수 없었어요. 2주 만에 체중이 7~8㎏ 빠졌죠. 약 먹을 병에 걸렸단 게 무서웠어요.”

산책이 좋다는 얘기에, 친구 열네 명을 단체 대화방에 초대했다. “각자 2주에 한 번 나를 산책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본명 대신 대학 선배와 ‘코크니키크니’(선배는 코가, 그는 키가 큰 데서 따왔다)란 필명을 지어, 마음 가는 대로 낙서처럼 솔직하게 일상만화를 올렸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인스타그램에 달린 주문 댓글을 일일이 출력해 고심해서 골랐다. “다이어트 중인데 너무 배고파요. 한밤중에 냉장고 뒤지는 그림 그려주세요” “7년 넘게 함께해온 강아지가 오늘 암 진단을 받았는데 몇 시간째 펑펑 우는 저를 보며 우리 집 강아지가 무슨 생각하는지 그려주세요”…. 다이어트부터 직장생활, 친구와 가족, 반려동물까지 소재는 무궁무진했다.

◆아픈 가족사를 가족애로=이번 에세이집엔 대학 때 등록금을 벌기 위해 두 달여 막노동했던 기억 등 그의 실제 이야기도 많이 담겼다. 가족에 관해 고백한 대목은 뜻밖에 무겁다. IMF 외환위기 때 집이 파산했고 그 충격에 뇌경색으로 쓰러졌던 어머니는 당뇨합병증으로 시력을 잃었다. 아버지는 택시 운전을 하며 어머니를 돌본다.

그러나 그런 가족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따뜻하고 단단하다. 추석 때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 레시피로 형이 떡국, 자신은 육회, 아버지는 반찬을 준비해 세 부자가 경연을 벌인 일화, 군대 가던 자신을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 옥상에서 끝까지 지켜봤던 할머니를 향한 그의 애틋한 기억이 읽는 이의 가슴까지 덥힌다.

키크니 캐릭터를 활용한 기업·관공서 광고 의뢰가 메일을 다 확인하기 힘들 만큼 많이 오면서, 1년여 전부턴 본업인 일러스트레이터를 만화가 일이 앞질렀다. 생전 처음 기부도 해봤다. “들쑥날쑥 인기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 TV 출연 제안은 거절했다. 인스타그램에 광고성 만화를 올려도, 기존 독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삼행시 경품 이벤트 등을 반드시 병행한다. 힘겨웠던 시절, 호응과 응원 댓글로 자신을 우울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 준 독자들에 지키는 그만의 의리다.

요즘은 온라인 만화 잡지 ‘만화경’에 ‘별일 없이 산다’란 고양이 일상만화를 연재 중이다. “일단 해보겠습니다. 안 되면 안 해보겠습니다.” 번아웃 후 얻은 그의 새 좌우명이다.

“순리대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고꾸라지고 나니까 내가 나를 돌봐야지, 생각하게 됐죠. 엄청 가벼웠던 사람인데 우스갯소리를 해도 한 사람이라도 기분 나쁘게 하면 안 되겠단 법칙이 생겼고요. 제가 엎어져 보고 알게 된 소중함을 간과하지 말자고 다짐했죠.”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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