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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세’된 대학로 배우…강렬한 ‘여옥의 눈동자’ 기대하세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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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9호 19면

[아티스트 라운지]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 주연 김지현

‘뮤지컬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무대 연출’. 지난해 3월 보기드문 런웨이 형태의 무대에서 초연한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에 쏟아진 찬사였다. 그런데 그 ‘혁신’은 위기에서 나왔다. 개막 직전 제작사가 투자사기를 당한 것이다. 공연이 취소될 위기에서 제작사는 규모를 줄이고 개막을 3주 늦춰 공연을 강행했다. 완성도에 대한 우려가 컸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텅 빈 무대를 배우들의 에너지로 꽉 채우며 큰 호응을 얻었고, 10개월 만에 국내 최대 규모 극장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입성을 앞두고 있다(1월 23일~ 2월 27일).

투자 사기 딛고 뜨거운 무대 입소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입성 앞둬 #원작은 높은 시청률의 국민 드라마 #채시라가 맡았던 여옥의 주체성 부각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에서 위안부 윤여옥 역 배우 김지현씨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경빈 기자

뮤지컬 '여명의 눈동자'에서 위안부 윤여옥 역 배우 김지현씨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경빈 기자

여주인공 ‘여옥’을 다시 맡은 김지현(38) 배우는 “그땐 사고 없이 잘 끝나기만 바랬는데, 이번엔 많은 분들이 보셨으면 하는 욕심이 생긴다”고 했다. “초연 때 사실 내부적으로 공연이 두 번 미뤄지면서 가다서다 했어요. 개막 한 달 전에 연출님이 무대를 싹 바꾼다며 시간을 달라시는데, 정말 흥미진진했달까요. 연습기간이 딱 3주 남는 건데,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몰랐죠. 다행히 잘 정리가 되고 일사천리로 진행됐어요. 짧고 굵게, 정말 밀도있는 작업이었죠.”

어떻게든 공연을 올리기 위해 출연료 수령을 자진해서 미루는 등 배우들에게도 일정 부분 희생이 따랐지만, 그럼에도 스스로에게 ‘완벽한 작품’으로 각인됐다. “사실은 부족한 게 많은 상황이었죠. 눈에 보이는 세트나 기술적인 요소가 거의 없으니 관객이 보기에 비어보일 수 있잖아요. 배우들이 채우는 수밖에 없더라고요. 관객이 사방을 감싸는 공간에서 하다보니 어디 도망칠 곳도 없고, 치열하게 움직여 감동을 끌어내는 수밖에 없었어요. 문득 돌아보니 저뿐 아니라 모든 배우가 그러고 있더군요.”

주변에서 ‘힘들겠다’고 걱정했지만, 그에겐 오히려 편안했단다. 팀웍은 끈끈해지고, 공연은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막상 해보니 배우로서 이보다 좋은 컨디션이 없을 정도였어요. 대도구나 신경 쓸 부분이 없으니 연기에만 집중하면 됐죠. 연기하는 내내 너무 편안하게 무대에서 다 쏟아부을 수 있었어요. 배우들이 서로 다독이면서 작품으로 똘똘 뭉쳐진 느낌을 받았는데, 물론 상황이 만들어줬지만 이렇게 뜨거운 공연은 오랜만이었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배우에게 완벽한 공연이었죠.”

비어 있어서 더욱 완벽한 무대

1991년 방영된 원작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는 당시 청춘스타였던 채시라·최재성·박상원이 주연을 맡아 최고 시청률 58%를 기록한 ‘국민드라마’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사람들의 비극을 그려 지난해 3·1운동 100주년 기념 뮤지컬로 제작됐다. “초등학교 시절 재미있게 본 기억이 생생해요. 그 당시 보지 못했던 영상미에 신세계를 만난 느낌이었죠. 워낙 연출이 충격적이고 명장면이 많았잖아요. 뱀 뜯어먹는 장면은 생략됐지만, 철조망 키스는 무대에서도 보실 수 있을 거예요.(웃음)”

30년 전 드라마지만 ‘여옥’의 캐릭터는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다. 거대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건을 겪으며 강력한 생존의지로 그 시대를 살아냈을 뿐이지만 결국 이념으로 재단당해야 했던 한 여인의 비극은 지금 시대에도 짙은 공감을 부른다. “그 당시 채시라씨 이미지 때문인지 몰라도 원작 소설보다 드라마에서 여옥이 캐릭터가 더 주체적이고 당차게 그려졌어요. 공연은 그런 면이 더 강하게 부각됐죠. 방대한 분량을 압축하면서 여옥이 나오는 순간은 좀 더 주체적인 목소리를 내는 장면들로 편집됐어요. 드라마에서 어쩔 수 없이 헤어졌다면 공연에선 스스로 이별을 택하는 식으로, 자기가 선택하는 여성으로 진화한 거죠.”

‘여명의 눈동자’는 격랑의 시대 운명에 휘둘렸던 한국인의 비극을 그린다. [사진 수키컴퍼니]

‘여명의 눈동자’는 격랑의 시대 운명에 휘둘렸던 한국인의 비극을 그린다. [사진 수키컴퍼니]

김지현은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배우는 아니다. 하지만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 ‘러브레터’, 연극 ‘프라이드’ ‘카포네트릴로지’ 등 매니어를 몰고 다니는 무대에서 15년 이상 잔뼈가 굵은 ‘대학로 배우’였다. 그런데 지난해 ‘여명의 눈동자’ 이후 ‘대세 배우’로 도약했다. 대극장 라이선스 뮤지컬 ‘스위니토드’에서 조승우의 상대 역인 러빗 부인 역까지 꿰찼다. “이제 은퇴해도 여한이 없겠다는 얘기를 들어요.(웃음) 조승우·홍광호·박은태 같은 최고의 파트너를 한꺼번에 만났으니까. 큰 공연장을 끌고 가는 주인공으로서 최고의 프로들에게 많이 배우고 있어요.”

스스로 재미 찾아내는 게 공연의 매력

스스로 “노래로 감동 주는 배우는 아니다”라고 겸손해 하지만, 사실 그는 2006년부터 롱런 기록을 세우고 있는 창작뮤지컬의 신화 ‘김종욱 찾기’의 원조 배우다. 2004년 한예종 졸업작품으로 발표될 때 주연을 맡았는데, 그는 또 “원조는 오나라 배우”라며 손사래를 친다. “제가 처음 하긴 했지만, 2006년 상업 프로덕션으로 제작됐을 때 오나라 언니가 하는 걸 보고 저런 게 바로 뮤지컬 배우구나 싶었거든요. 제가 어려워했던 역할을 그 자체가 돼서 하더군요. 그 인상이 너무나 강렬했어요.”

하지만 ‘여명의 눈동자’의 여옥만큼은 ‘내 역할’이라고 자신있게 말한다. “어렵게 올린 작품의 초연배우로서 애착도 크지만, 제가 가진 감성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요. 관객들도 제가 ‘처연하다’‘사연있어 보인다’고들 하시는데, 여옥의 슬픔과 쓸쓸함은 굳이 많이 만들지 않아도 되거든요.”

팬들은 ‘대세 배우’로 꼽히는 그가 어디 갈까봐 걱정이다. 하지만 15년 이상 대학로를 지켜온 건 “공연이 제일 재미있어서”란다. “작년에 2인극 ‘오만과 편견’에서 1인 9역을 했어요. 무대에 아무 것도 없이 배우가 손수건 하나 들고 다른 사람이 되는데, 관객은 그 이야기를 믿고 따라오잖아요. 보여주는 대로 보는 게 아니라 상상하면서 스스로 재미를 찾아서 보는, 그게 바로 관객과의 적극적인 소통이죠. 무대에서 줄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이 그런 것 아닐까요. 그런 생동감이 좋아서 무대를 못떠날 것 같아요.”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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