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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는 여성 많은 일본…『김지영』 잘 팔리지만 ‘미투’는 잠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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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9호 27면

전 아사히신문 기자의 ‘일본 뚫어보기’

일본어판 『82년생 김지영』.[사진 지쿠마서방]

일본어판 『82년생 김지영』.[사진 지쿠마서방]

2018년 한국에서 미투운동이 한창일 때 “일본은 사정이 어때?”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일본은 한국과는 달랐다. ‘피해자가 용기를 내 봤자 자기만 손해’라는 분위기가 있어서다.

‘성폭행 피해자만 손해’란 분위기 #이토 사건 민사 승소, 형사 불기소 #시댁과의 관계 진해 보이는 한국 #일본선 결정권은 부부 본인에게

그 대표 사례가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이토 시오리(伊藤詩織)의 사건이었다. 지난해 12월 이토가 민사소송에서 승소한 뉴스는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이토가 야마구치 노리유키(山口敬之) 전 TBS 기자한테 성폭행을 당했다고 손해배상을 요구한 재판에서 도쿄지방재판소는 합의 없는 성행위였음을 인정하고 야마구치 기자에게 330만 엔(약 36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같은 사건에 대해 형사로는 불기소됐기 때문에 서로 다른 결과도 주목받았다.

‘일본에서는 왜 미투운동이 확산되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가지면서 나도 이토 사건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토가 자신의 피해 경험에 대해 쓴 책 『블랙박스』도 읽었다. 읽기만 해도 괴로울 정도로 그 피해와 후유증은 중대한 것이었다.

전 TBS 기자, 아베와 친분 덕 불기소?

일본의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이토 시오리가 지난해 12월 18일 성폭행 가해자를 상대로 낸 손해 배상 청구 소송에서 이긴 뒤 법원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일본의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이토 시오리가 지난해 12월 18일 성폭행 가해자를 상대로 낸 손해 배상 청구 소송에서 이긴 뒤 법원 앞에서 발언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 정도 증거가 있는 사건도 불기소된다면 아무도 피해를 호소하지 않겠다고도 생각했다. ‘일본은 과연 법치국가가 맞나?’라고 물어보고 싶을 만한 내용이었다. 특히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수사가 진행됐다 싶을 때 갑자기 멈춰 버린 부분이다. 그 배경에는 야마구치 기자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친한 사이라는 것도 있는지 모르겠다. 야마구치 기자는 아베 총리 스토리를 담은『총리』라는 책을 썼다. 이런 이유로 ‘아베 정권이 형사처분에 개입한 것이 아닐까’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민사소송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신문이나 방송에서 이 사건에 대해 적극적으로 보도하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서지현 검사가 성추행에 대해 폭로했을 때처럼 피해자를 응원하는 분위기는 일본에서 별로 없었다.

나 또한 아사히신문사에 근무했을 당시 성폭행 관련 보도에 관해서 납득이 안 간 일이 있었다. 아버지한테 어렸을 때 성폭행을 당했다는 여성이 그 경험을 책으로 출판했을 때였다. 나는 그 여성과 다른 취재 관계로 전에 만난 적이 있었던 인연으로 인터뷰할 수 있었다. ‘성폭행을 당했다’고 쓰는 건 판결이 나온 사건이 아니면 어려운 면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성폭행을 당한 경험을 책에 썼다’는 기사를 쓰는 건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일정한 조사의 결과가 나오기 전에 ‘서지현 검사가 성추행을 당했다’라고는 쓰기 어려워도 ‘서지현 검사가 자신이 당한 성추행에 대해 폭로했다’고 쓰는 건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인터뷰하고 기사도 썼는데 상사가 “정말 아버지가 그랬는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신문에 실어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성적 피해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본인한테 용기도 필요하고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인터뷰하는 동안 그렇게 보였다. 그런데 그 내용이 실리지 않아 너무 죄송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이토는 『블랙박스』에서 이렇게 썼다. “무슨 말을 하든 결국은 뉴스로 보도할 가치가 있는지를 판단하는 건 미디어다. 거기엔 여러 사정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수사기관에 이어 언론사에 호소해도 눈앞에서 잇달아 외면당하는 것에 할 말을 잃었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포스터.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82년생 김지영’ 포스터. [롯데엔터테인먼트]

2018년 12월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일본에서 번역 출판되자마자 히트를 쳤다. 지난해 10월에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올해 일본에서도 개봉한다고 한다. 일본에서의 이런 큰 반응에 대해 한국 지인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왜 미투는 퍼지지 않는데 『82년생 김지영』은 팔리는 거야?” 일본에서 성폭행이나 성추행이 적은 것도 아니고, 남녀 성 격차라는 점에서도 문제가 많은데 그것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않고 참고 있는 여성이 많다는 것이 아닐까.

실제로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19년 ‘남녀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 대상국 153개국 중 일본이 121위로 선진국 중에서 최하위 수준이었다. 일본은 2018년 110위에서 121위로 떨어진 반면 한국은 115위에서 108위로 올랐다. 이 보고서는 경제·교육·건강·정치 등의 분야에서 남녀 격차를 조사한 것이다. 이 뉴스는 일본에서 매년 보도되지만 이번이 역대 최하위였던 것은 충격적이었다.

나는 김지영과 같은 1982년생이다. 그런데 나는 학교나 가정에서의 남녀 성 격차로 김지영만큼 불합리한 대우를 받은 일은 별로 없었다. “공감했다”고 하는 일본 여성들은 대개 나보다 10살 이상 나이가 많았다. 한·일 간의 갭이 10년 정도 차이가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위의 순위가 역전했듯이 최근엔 그 10년의 차이가 없어진 느낌이다.

일본에서는 나를 포함해서 주변 친구를 봐도 학교나 가정에서의 성 격차를 겪는 것보다 직장인이 된 다음에 성추행의 피해를 입는 경우가 적지 않은 듯하다. 신문사를 초기에 그만둔 나의 동기 중에도 피해자가 있다. 한국에서는 2018년 미투운동이 퍼진 다음 성추행은 급격히 적어진 듯 보인다. 주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된 영향으로 직장 관련 술자리가 줄어든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 회식에 가면 여성이 불쾌하게 느낄 만한 발언을 누가 하면 바로 누군가가 그 말이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심한 말도 많이 들었지만 그걸 막아 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일본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내가 느끼기로 한국이 훨씬 빠른 속도로 개선되는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봤을 때 가정에서의 성 격차 부분은 일본과 한국이 조금 다르다고 느꼈다. 특히 시댁과의 관계에서 그렇다.

김지영은 여성으로서 경험해 온 여러 스트레스로 정신적으로 견디지 못해 타인에 빙의하는 증상을 앓게 된다. 영화 속에서 그 증상이 나타난 첫 장면은 설날 때 시댁 주방에서였다. 지영은 아침 일찍부터 설날 음식 준비로 지쳤다. 시댁 식구들은 앉아서 즐겁게 수다를 떠는데 지영이 혼자 주방에 서 있다. 눈치를 보며 슬슬 친정으로 가려던 참에 남편 누나의 식구들이 와서 타이밍을 놓쳐버렸을 때였다. 지영은 친정 어머니 말투로 시어머니에게 자기 딸이 왔으면 지영도 친정에 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일본 성 격차 121위 … 한국은 108위

영화 ‘82년생 김지영’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82년생 김지영’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일본 여성도 내 주변에 많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추석이나 설날 때 음식 준비가 힘들다고 한다. 일본도 신정 때 대부분 양쪽 부모님 집으로 인사하러 가지만 음식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이야기는 별로 없다. 한국에선 추석이나 설날 때마다 집에 돌아오면 1주일 정도 누워 있는 친구를 가끔씩 본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겠냐는 생각이 든다.

영화 속에서 지영이 가장 괴로워하는 장면도 시어머니와 전화하는 장면이었다. 남편이 육아 휴직을 받고 자기가 일할 수 있게 됐다고 이야기하자 시어머니는 아들이 일을 못 하고 지영이가 일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화를 내서다.

아이를 낳는 일은 여성밖에 못 하지만 키우는 건 남성도 할 수 있다. 지영이 출산과 육아로 일을 중단해야 했는데 그다음에 남편이 일을 쉬고 아이를 보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 아니냐고 하고 싶지만 일본도 한국도 아직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회가 아니긴 하다.

다만 여기서 한국과 일본의 차이가 있다면 일본에서는 부부가 결정한 일에 대해 시댁에서 뭐라고 해도 그건 참고할 정도일 것이다. 결정권은 기본적으로 부부 본인들에게 있다. 그런데 지영은 도저히 시어머니 의견에 안 따를 수가 없는 듯했다. 물론 일본도 한국도 가정마다 다르겠지만 한국이 훨씬 시댁과의 관계가 진해 보인다. 그건 그만큼 관심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주 연락하고 아프지 않은지, 밥은 잘 먹고 지내는지 서로 걱정해 주는 따뜻한 관계이기도 하다.

최근 “한국과 일본 여성의 지위는 어느 쪽이 높은 것 같아요?”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위와 같은 가정에서의 여성의 입장을 생각하면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다만 사회적으로 여성이 발언하기 편한 환경이 갖춰진 건 일본보다 한국인 것 같다. 이토의 민사소송 승소가 조금이라도 일본의 분위기를 바꾸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나리카와 아야 전 아사히신문 기자
나리카와 아야(成川彩) 2008~2017년 일본 아사히신문에서 주로 문화부 기자로 활동한 후,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석사과정에 유학. 한국영화에 빠져서 한국에서 영화를 배우면서 프리랜서로 일본(아사히신문 GLOBE+ 등)의 여러 매체에 영화 관련 칼럼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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