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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품이 그리울 때 읽으면 아늑해지는 시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전새벽의 시집읽기(51)

‘좋은 일만 가득한 한 해 되시길.’

단골 새해 인사말이다. 이것은 ‘다사다난했던 작년’ 따위의 말과 한 쌍이 되어 정초마다 범람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말에는 현실성이 결여돼 있다. 어차피 일어날 수 없는 일을 희망하는 말은 낭만적이지만 동시에 공허하다. 그리하여 이렇게 새해 인사말을 올리기로 한다. ‘좋은 일과 더불어 나쁜 일도 생기겠지만, 언제나 그랬듯 능히 헤쳐나가시길.’

나쁜 일이 닥쳤을 때 잘 헤쳐나가려면 대비가 필요하다. 대표적인 방법은 힘이 되는 사람들을 곁에 두는 것이다. 가족, 친구, 연인…. 대상은 누구든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들을 우리 곁에 머물게 하는 가다. 나는 고민 끝에 요리하기로 했다. 나쁜 일을 겪고 난 뒤 탈진한 상태가 되면 언제든지 그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주말에 맛있는 거 해 줄 테니 집으로 놀러 와.”

새해에 새롭게 결심한 두 가지가 있다. 따뜻한 음식을 만들 수 있는 '프라이팬 새로 장만하기'와 몹시 고단한 날을 대비한 '온기를 가진 시 외우기'이다. [사진 pixabay]

새해에 새롭게 결심한 두 가지가 있다. 따뜻한 음식을 만들 수 있는 '프라이팬 새로 장만하기'와 몹시 고단한 날을 대비한 '온기를 가진 시 외우기'이다. [사진 pixabay]

그리하여 내가 새해 첫날부터 한 일은 ‘프라이팬 새로 장만하기’가 되었다. 듣자 하니 요리를 하려면 불을 잘 써야 하고, 불을 잘 쓰려면 프라이팬이 중요하다고 한다. 코팅 팬보다 훨씬 고기 굽는 데 좋다는 이 스테인리스 팬으로 사람들에게 맛있는 스테이크를 구워줄 것이다. 그렇게 함께 따뜻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깔깔 웃다가 보면 나쁜 일은 잊혔거나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프라이팬 하나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사람들을 불러 고기를 굽는 것도 어지간한 체력이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저 혼자 누워 있고 싶은, 몹시 고단한 날들을 대비해 한 가지의 일을 더 하기로 했다. 바로 온기를 가진 시 한 편을 외는 것이다.

쫓겨 온 곳은 아늑했지, 폭설 쏟아지던 밤
깜깜해서 더 절실했던 우리가
어린아이 이마 짚으며 살던 해안(海岸) 단칸방
코앞까지 밀려온 파도에 겁먹은 당신과
이불을 뒤집어쓰고 속삭이던,
함께 있어 좋았던 그런 쓸쓸한 아늑

아늑이 당신의 늑골 어느 안쪽일 거란 생각에
이름 모를 따뜻한 나라가
아늑인 것 같고, 혹은 아늑이라는 곳에서
더 멀고 싶은 곳이 아늑일 것 같은데
갑골에도 지도에도 없는 아늑이라는 지명이
꼭 있을 것 같아
도망 온 사람들 모두가
아늑에 산다는, 그런 말이 있어도 좋을 것 같았던

당신의 갈비뼈 사이로 폭폭 폭설이 내리고
눈이 쌓일수록 털실로 아늑을 짜
아이에게 입히던
그런 내밀이 전부였던 시절
당신과 내가 고요히 누워 서로의 곁을 만져보면
간간한, 간간한 온기로
사람의 속 같던 밤 물결칠 것 같았지

포구의 삭은 그물들을 만지고 돌아와 곤히 눕던 그 밤
한쪽 눈으로 흘린 눈물이
다른 쪽 눈에 잔잔히 고이던 참 따스했던 단칸방
아늑에서는 모두 따뜻한 꿈을 꾸고
우리가 서로의 아늑이 되어 아픈 줄 몰랐지
아니 아플 수 없었지
-민왕기, 「아늑」 전문. 동명의 시집(달아실, 2017)에 수록.

누군가의 품에 안길 수 없을 때, 민왕기의 시를 읽으면 아늑함에 젖어든다. 민왕기「아늑」표지.

누군가의 품에 안길 수 없을 때, 민왕기의 시를 읽으면 아늑함에 젖어든다. 민왕기「아늑」표지.

읽고 있자면 포근한 기운이 전해지는 이 시의 묘미는 말장난에 있다. ‘아늑하다’와 ‘늑골’이라는 말에서 작은 공통분모를 발견한 시인. 과감히 ‘아늑’이 신체의 일부는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아늑의 위치는 사람의 가슴께라는 구체적인 설정이 가미되는 순간, 이것은 단순히 엉뚱한 상상에서 거대한 온기를 가진 위로로 변신한다.

시는 본래 함축적이되, 어떤 시는 이미 단순한 명제를 굳이 부연해 설명하겠다고 자처해 나서기도 한다. 민왕기의 시는 ‘당신의 품이 너무도 아늑하다’라는 말에 대한 긴 부연설명이다. 덕분에 그의 시를 읽는 독자들, 누군가의 품에 안길 수 없을 때면 그의 시를 읽으면서 아늑함에 젖어 들 수 있게 됐다.

시를 쓴 민왕기는 1978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훗날 부산에 정착했다. 신문기자로 활동했고, 2017년에 첫 시집 『아늑』을 출간했다. 지난해 3월에는 두 번째 시집 『내 바다가 되어줄 수 있나요』를 내고 한층 더 짙어진 감수성으로 독자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그는 요새 어디서 아늑함을 찾을까. 반갑게도 이 원고를 쓰는 도중에 민 시인과 인연이 닿게 되었으니, 곧 직접 만나서 물어볼 일이다.

새해가 밝자마자 주문한 민왕기의 시집들은 금세 집으로 배달왔다. 한편 프라이팬은 아직 오지 않았다. 부디 프라이팬은 천천히 오라. 그때까지 민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나는 조금 더 아늑할 참이다.

회사원·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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