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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입찰 무효 당하고도…건설업계 맏형 '돈 전쟁' 수주전 또다시 꼼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요즘 주택건설업계가 어느 때보다 냉랭하다. 정부가 잇달아 각종 규제를 내걸며 시장을 위축시키는 데다 먹거리도 많지 않아서다. 주택산업연구원에 따르면 주택사업경기실사지수(HBSI)가 75.7로 전달보다 7.8포인트 하락해 10개월 만에 최저수준이다. 주택건설업체들이 체감하는 경기가 좋지 않다는 의미다.

2000년대만 해도 수도권뿐 아니라 지방 곳곳에 크고 작은 택지지구가 조성돼 주택사업을 할 땅이 많았다. 최근엔 재개발‧재건축 같은 정비사업 외에 마땅한 사업장이 별로 없다. 서울 주요 정비사업 수주전의 과열 양상이 쉽게 식지 않는 이유다.

하지만 정부가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제, 안전진단 강화, 이주비 대출 규제에 이어 민간택지 분양가 상한제까지 정비사업 규제안을 쏟아내고 있다.

집안에 큰일이 생기면 으레 맏형이 나서게 마련이다. 집안 내부도 다독이고 외부의 눈치도 살피며 돌파구를 모색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건설업계 맏형인 현대건설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업계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맏형으로서 본을 보여주지는 못할 망정 되레 곳곳에서 잡음을 일으키며 정부 규제를 불러들이는 셈이어서다.

현대건설이 지난 3월 25일 리뉴얼한 ‘힐스테이트’ BI [사진 현대건설]

현대건설이 지난 3월 25일 리뉴얼한 ‘힐스테이트’ BI [사진 현대건설]

올해 첫 정비사업 수주전이 열린 곳은 서울 성동구 옥수동 한남 하이츠 재건축이다. 이달 18일 시공사 선정에 나서는 한남 하이츠에 입찰한 현대건설은 그간 꾸준히 논란이 됐던 ‘금융 지원’ 카드를 또 빼 들었다.

사업촉진비로 2000억원 이상을 약속한 것이다. 사업촉진비는 법률상 용어가 아니다. 그간 업계에서 조합원들이 아파트나 상가 세입자 보증금 처리, 각종 금융대출 등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사업촉진비라고 지칭했다.

시공사가 사업촉진비를 지원하면 조합원이 감당해야 할 자금 부담이 줄어든다. 사실상 이주비 초과 지원이나 이사비 지원과 비슷한 효과다.

한남 하이츠 조합원은 550여 명이다. 단순하게 계산하면 조합원 1인당 3억6000만원이 넘는 자금 지원이다. 함께 입찰에 참여한 GS건설도 550억원 약속했다.

사업촉진비는 법적인 용어가 아니다. 정비사업 계약업무처리기준에 따르면 시공과 관련된 자금 외에 금융 지원은 이주비(유이자)만 인정한다. 국토부 관계자는 "사업촉진비는 시공에 관련된 자금은 아니기 때문에 재산상 이득에 해당되는지 따졌을 때 현행 규정에 위배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현대건설은 조합원이 내야 할 추가 분담금을 100% 입주 1년 후에 받겠다고 제시했다. 추가 분담금을 늦게 될수록 조합원은 금융 비용 등을 아낄 수 있게 된다.

앞서 현대건설은 지난해 11월 서울 용산구 한남3구역 재개발 수주전에 참여하며 가구당 최저 5억원의 이주비를 지원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예컨대 조합원이 보유한 주택의 감정평가액이 2억원이어도 이주비로 5억원을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조합원 추가 분담금도 100% 입주 1년 후 받겠다는 조건도 내걸었다.

국토부와 서울시는 현행 규정에 위배될 소지가 있다며 합동점검에 나섰고 재산상 이익, 혁신설계 등이 문제가 돼 입찰이 무효가 됐다. 한남3구역은 시공사 선정을 위한 재입찰을 해야 한다.

서울 대표적 재개발 구역인 용산구 한남뉴타운 3구역. [연합뉴스]

서울 대표적 재개발 구역인 용산구 한남뉴타운 3구역. [연합뉴스]

현대건설은 지난해 10월엔 서울 은평구 갈현1구역 재개발 수주전에 참가했다가 입찰 자격을 박탈당했다. 이번엔 조합이 초과 이주비 제안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현대건설은 투기과열지구의 담보인정비율(LTV) 40%를 초과하는 이주비(최저 2억원)를 제안했다.

조합은 이어 현대건설이 낸 입찰보증금 1000억원을 몰수하겠다고 나섰고 현재 소송이 진행 중이다.

현대건설은 앞서 2017년 서울 서초구 반포1단지 1‧2‧4주구 재건축 수주전에서 이사비 7000만원을 제시하며 정비사업 수주전에 본격적인 '돈 전쟁'을 시작하기도 했다.

최현주 기자

최현주 기자

연초부터 시공사 선정에 나서는 정비사업이 적지 않다. 이달에만 10여 곳이 시공사 선정을 위한 입찰에 나서거나 설명회를 연다. 정부는 언제든지 추가 규제안을 내놓을 수 있다며 시퍼렇게 날이 선 칼을 뽑아 들고 있다.

당장 눈앞의 먹거리를 위해 논란을 일으킬 제안에 급급할 때가 아니다. 더구나 이런 논란의 뒷감당은 이제나저제나 새집 입주를 고대하는 해당 조합원들이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맏형을 비롯해 업계가 똘똘 뭉쳐야 매서운 외풍도 막고 내실도 다질 수 있지 않을까.
최현주 기자 chj80@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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