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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영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목숨 걸고 찍었다…경주마서 떨어지고, 실탄 피해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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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중앙일보 기자
만주를 배경으로 한 액션 활극 ‘무숙자’(1968)에서 주연한 신영균. 신상옥 감독은 할리우드 서부극 분위기를 재연했다. [사진 노기흘]

만주를 배경으로 한 액션 활극 ‘무숙자’(1968)에서 주연한 신영균. 신상옥 감독은 할리우드 서부극 분위기를 재연했다. [사진 노기흘]

“예전 대한민국 배우 중 누가 말을 가장 잘 탔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감히 “신영균”이라고 말하겠다. 1960년대만 해도 영화를 찍을 만한 말이 드물었다. 경마장에서 말을 빌려 오거나, 급하면 마차 모는 말을 동원했다. 그런 위험한 말을 나만큼 타 본 배우가 없을 것 같다.

빨간 마후라, 후회 없이 살았다 - 제132화(7645) #<16> 1960년대 열악한 제작환경 #훈련 안 받은 말 타다 낙상 잇따라 #얼음판, 내리막길 달릴 땐 식은땀 #김기덕 감독은 진짜 폭탄 터뜨려 #비닐옷 입고 물 들어갔다 죽을 뻔

지금도 내 오른손 새끼손가락은 조금 굽어 있다. 생활에 불편한 정도는 아니지만 영화가 남겨준 영광의 상처쯤 된다. ‘무숙자’(1968)를 찍을 때 말에서 떨어져 손가락이 골절됐는데 바로 치료하지 못했다. 그 후 한동안 방치했더니 아예 굳어서 곧게 펴지질 않는다.

사극 전문배우 타이틀은 그냥 얻어진 게 아니다. 난 “배우라면 가리지 않고 도전해야 한다”고 믿었다. 촬영장에서 죽으면 영광으로 생각했다. 말을 처음 타 본 건 ‘의적 일지매’(1961)에서다. 그때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말타기가 뭐 별겁니까? 이래 봬도 레슬링으로 다진 몸입니다.”

오른쪽 새끼손가락은 아직도 안 펴져

영화 무숙자에 함께 나온 최은희와 김정훈.

영화 무숙자에 함께 나온 최은희와 김정훈.

혈기왕성한 나는 운동신경만 믿고 무작정 말에 올라탔다. 그런데 놀란 말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바람에 아수라장이 됐다. 하필 장소도 경복궁이었다. 고궁에는 말 한 마리가 겨우 통과할 만한 작은 문이 많다. 이 녀석이 나를 떨어뜨리고 싶었는지 갑자기 좁은 문간으로 뛰어들었다.

“이러다 사람 잡겠네. 미스터 신 조심해요!”

스태프들은 혼비백산이 됐다. 발만 동동 굴렀다. 순간적으로 말 등에 납작 엎드리지 않았으면 아마 목이 부러져서 반신불수가 됐을 거다. 지금 돌아봐도 아찔하기만 하다.

한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니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틈틈이 서울 뚝섬 경마장을 찾아가 승마 훈련을 받았다. 조금씩 자신감이 붙었다. 그래도 얼음판을 달리거나 내리막길을 뛰어 내려가는 장면을 찍을 때는 식은땀이 흘렀다.

여배우도 예외가 없었다. 문정숙씨는 나와 함께 ‘정복자’(1963)를 촬영할 때 낙마해 중상을 입었다. 사흘 전에도 떨어질 뻔하다 말 목을 안고 겨우 위기를 모면했는데 결국 화를 당한 것이다. 그보다 1년 전 ‘화랑도’ 촬영 때도 문씨를 태운 말이 돌연 놀라 질주했다. 내가 말을 몰고 10리쯤 뒤쫓아가서 겨우 고삐를 잡아 세운 일이 있다. 스크린에서 질릴 만큼 달리고 달려서인지 영화계를 떠난 뒤로는 취미로도 말을 타지 않았다.

위험한 것이 어디 말뿐이랴. ‘나그네’(1961) 때는 까딱하면 익사할 뻔했다. 아버지(김승호)가 노름만 아는 불효한 아들(나)을 정신 차리게 한다고 배에 태워 한겨울 팔당호에 빠뜨리는 장면이었다. 아내는 내가 감기라도 들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여보, 내가 밤새 바느질을 해서 비닐옷을 만들었어요. 한복 안에 비닐옷을 겹쳐 입으면 좀 따뜻하지 않겠어요?”

아내의 마음은 고마웠지만, 막상 물에 빠지고 나니 아차 싶었다. 비닐 안으로 물이 가득 들어 차서 되레 몸이 천근만근이 됐다. 몸이 얼어붙어 헤엄을 칠 수도 없고 그냥 그대로 죽는 줄만 알았다. 어떻게든 배를 부여잡은 덕에 목숨을 건졌다.

입김 나오지 않게 입속에 얼음 물기도

영화 ‘무숙자’를 찍을 때 다친 신영균의 오른손 새끼손가락. 지금도 살짝 굽어 있다. 김경희 기자

영화 ‘무숙자’를 찍을 때 다친 신영균의 오른손 새끼손가락. 지금도 살짝 굽어 있다. 김경희 기자

위험하기는 전쟁영화가 더했다. ‘빨간 마후라’(1964) 엔딩 장면은 특등 사수가 10m 뒤에서 실탄을 쏴 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신상옥 감독은 목숨이 아까운 줄 모르고 야생마처럼 활주로를 뛰어다녔다. 아이모·미첼 같은 육중한 카메라를 들고 비행기에 올라가 공중 장면을 직접 촬영하기도 했다. 한번 몰입하면 끼니를 거를 때도 많았다. 새벽같이 나온 배우들도 추위와 굶주림에 함께 떨었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솔직히 그를 말릴 사람이 없었다.

‘5인의 해병’(1961) 김기덕 감독도 대단했다. 전투 장면을 실감 나게 찍겠다며 진짜 폭탄을 터뜨렸다. 병사들이 후퇴하는 장면이었다. 강변 모래사장에서 배우들을 뛰게 한 다음 뒤에서 실탄 사격을 했다. 총알이 박히면서 모래가 펑펑 튀어 올랐다. 그때 함께 죽어라 뛰었던 곽규석·최무룡·황해·박노식 모두 세상을 떠나고 이제 나만 남아 있다.

그 당시는 지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제작 환경이 열악했다. 촬영 스튜디오가 거의 없다 보니 허허벌판에 세트를 세우고 찍는 일은 예사였다. 눈·비를 맞는 것까지는 감수하면 그만인데, 문제는 실내 장면이었다. 배우들 입에서 허연 입김이 나오면 이상하지 않은가. 그럴 땐 응급 처치로 감독이 ‘레디 고’를 외치기 전까지 입에 얼음을 물고 있다가 뱉었다. 입 안과 바깥의 온도가 같아져서 입김이 안 나오기 때문이다. 한 장면 한 장면 그런 식으로 찍다 보면 온몸이 동태처럼 얼어붙었다.

촬영 소품도 엉성한 게 많았다. 임권택 감독의 데뷔작 ‘두만강아 잘 있거라’(1962)에서는 상대 배우를 해칠 뻔했다. 소품용 총으로 엑스트라 배우의 머리를 쏘는 장면이었는데,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왠지 좀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임 감독, 혹시 모르니 소품용 총이어도 테스트 한번 해봅시다.”

두꺼운 골판지를 구해서 방아쇠를 당겨 봤더니 퍽하고 구멍이 뚫렸다. 바쁘다고 그냥 진행했다면 상대 배우가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

컬러 시네마스코프 시대를 연 ‘연산군’(1962), 특수촬영 기법을 동원해 한국영화의 수준을 높인 ‘빨간 마후라’ 등 그 시대 영화들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해운대’ ‘백두산’처럼 스펙터클한 영화에 익숙한 요즘 세대에게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얘기겠지만 말이다.

박정호 논설위원,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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