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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다시 이어진 사랑, 오페라 '노르마'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한형철의 운동화 신고 오페라 산책(14)

한때 세간에 떠돌던 ‘드루킹’이란 인물이 있었지요. 이는 온라인 게임 인물 ‘드루이드’의 킹이란 뜻인데, ‘드루이드’는 원래 갈리아 지방에 퍼져있던 고대 켈트족 중 드루이드교를 믿는 부족 또는 드루이드교도 중에서 지식과 지혜를 가진 계급, 즉 제사장을 뜻하기도 했습니다.

1831년 벨리니가 발표한 '노르마'는 바로 이러한 드루이드교도와 관련된 오페라랍니다. 로마전성기의 갈리아 지방을 배경으로, 신성하고 순결을 지켜야만 하는 여제사장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허나 마냥 아름답지는 않답니다. 로마제국의 총독 폴리오네와 사랑에 빠짐으로써 그녀 스스로 계율을 어겼기 때문이지요. 운명은 때론 잔인한 장난을 치곤 합니다. 그 남자가 그녀를 믿고 따르는 여사제 아달지사를 사랑하게 되었으니까요.

로마 전성기의 갈리아 지방을 배경으로, 신성하고 순결을 지켜야만 하는 여제사장의 사랑 이야기. 오페라 '노르마'. [사진 Wikimedia Commons]

로마 전성기의 갈리아 지방을 배경으로, 신성하고 순결을 지켜야만 하는 여제사장의 사랑 이야기. 오페라 '노르마'. [사진 Wikimedia Commons]

격정과 증오가 불타오르는 인생극장의 현장. 인간의 감정을 최대한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해, 목소리로 화려한 기교를 뽐내는 벨칸토 오페라인 '노르마'. 우리는 인간의 본능, 사랑과 증오 그리고 마침내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의 장면을 만나게 된답니다.

비극적인 결말과는 달리, 다소 경쾌하다고 할 서곡이 흐른 뒤 막이 오릅니다. 폴리오네가 친구에게 젊은 여사제를 사랑하게 되었다며, 노르마에게 양심의 가책으로 괴롭다고 털어놓습니다. 그럼에도 곧 총독 임기가 끝나면 아달지사와 함께 로마로 가서 살 계획이라고 말하지요.

신임 총독의 포악함을 전해 들은 드루이드교도들이 로마에 대항할 신의 계시를 원하는 가운데, 여사제들을 거느리고 노르마가 등장합니다. 그녀는 ‘아직 전쟁의 계시는 없으며 로마는 안으로부터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는 신탁을 전하지요.

달이 떠오르자 신탁의 기도 '정결한 여신'을 부른답니다. 이 장엄한 아리아는 벨칸토 오페라 중 대표적인 아리아랍니다. 어려운 성악적 기교는 물론, 넓은 음역을 오르내려야 하며, 로마에 항전을 원하는 자신의 교도와 연인인 폴리오네를 위해 평화를 기원하는 심정을 표현해야 하는 등 복잡미묘한 노래인 것이지요.

혼자 있는 아달지사는 계율을 어기고 폴리오네와 사랑에 빠진 사실에 괴로워하는데, 폴리오네가 나타납니다. 그는 아달지사에게 로마로 귀향할 때 같이 떠나자고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다며 거절하지요. 허나 말과 달리 몸은 사랑하는 그의 품에 안기게 되고, 결국 다음날 같이 떠나기로 합니다.

여전히 고통스러운 아달지사는 믿고 존경하는 노르마에게 계율을 어긴 사실을 털어놓습니다. 자신도 같은 처지였으므로 노르마는 아달지사의 고백을 들으며 그녀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노르마는 그녀를 용서함은 물론 더 나아가 사랑하는 이와의 행복을 축복까지 해줍니다. 허나 그 상대가 폴리오네임을 알게 되자 큰 충격에 빠집니다.

배신당한 사랑, 내게로 다시 돌아오세요. [사진 Flickr]

배신당한 사랑, 내게로 다시 돌아오세요. [사진 Flickr]

노르마는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여성을 탐하는 폴리오네를 힐난하면서, 아달지사도 자신처럼 비참한 희생물이며 언젠가는 또 버림을 받으리라며 경고하지요. 눈치 없는 총독은 아달지사에게 약속대로 같이 떠나자고 하나, 잔인하고 치명적인 사실을 모두 알게 된 그녀는 도저히 그럴 수 없답니다.

불경스러움에 두려워하는 아달지사, 그녀를 걱정하는 폴리오네 그리고 그런 그를 저주하는 노르마, 각자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노래하는 3중창이 극적으로 울려 퍼집니다.

배신당한 사랑의 충격에, 노르마는 잠든 아이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자신도 죽으려고 하나 차마 그러지 못합니다. 아달지사를 불러 자신은 죽을 것이니 아이들은 로마에 갈 때 데려가라고 부탁하지요.

배신당한 사랑의 충격으로 자식들에게 나쁜 마음을 먹은노르마. [사진 Flickr]

배신당한 사랑의 충격으로 자식들에게 나쁜 마음을 먹은노르마. [사진 Flickr]

그 말에 아달지사는 오히려 폴리오네를 설득하여 아이들의 아버지로 돌아오도록 하겠다고 합니다. 연적이 된 여사제들이 서로 신뢰하며 승화시키는 사랑의 2중창 ‘오, 노르마여 보세요’가 감동적으로 울려 퍼집니다. “오 노르마, 당신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주셔야지요…”라고 서로 다른 처지를 이해하며, 서로를 위하는 두 마음이 하나 되는 아름다운 명곡이랍니다. 노르마는 폴리오네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답니다.

허나, 폴리오네는 변함없었고, 아달지사의 노력도 허사였습니다. 이에 분노한 노르마는 성징을 세 번 울려 로마군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군사를 소집합니다.

노르마는 군중들 앞에서, 여사제가 계율을 어기고 신성을 더럽혀 신이 노했다며 그녀를 처형 할 화형대를 준비하라고 지시합니다. 폴리오네는 아달지사를 살리기 위해 그녀에게 호소합니다. 허나, 노르마는 그의 변심이 서러울 뿐 아달지사의 순수한 사랑을 처벌할 수는 없었답니다. 마침내 처형할 여사제가 바로 “노르마”라고 선언하자 부족장인 아버지는 물론 모든 군중들이 기절초풍합니다.

폴리오네는 그녀의 죽음을 떠안는 사랑에 감동하여 같이 죽기를 각오합니다. 그녀는 아버지에게는 아이들을 지켜달라고 당부하는데, 딸이 성전을 더럽혔다는 분노에 휩싸인 그는 답을 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그 아이들은 당신의 핏줄”이라며 거듭 요청하자 결국 눈물을 보이게 되지요. 마침내 노르마는 불길이 치솟는 화형대로 뛰어들고, 폴리오네도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함께 몸을 던지며 막이 내려집니다.

일반적으로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을 흔히들 합니다. 허나, 아달지사는 존경하는 노르마에게 자신의 사랑을 양보합니다. 노르마는 최후의 순간에 연적 아달지사가 아닌 본인 스스로를 처단합니다. 폴리오네는 죽음으로 자신을 택한 그녀와 함께 불구덩이에 몸을 던집니다. 그에게 사랑은 책임지는 희생이었습니다. 벨리니는 아름다운 선율로, 죽음으로 다시 이어진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답니다.

오페라 해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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