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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순교자 생기면 그랬다···"美에 죽음을" 막오른 피의 보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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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채인택 기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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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에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라고 했다. 하지만 미국은 중동의 대국인 이란의 문화와 전통, 그리고 종교와 국민 기질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지난 3일 이라크 바그다드의 국제공항에서 미군 드론이 이란 군부 요인인 거셈 솔레이마니를 표적 암살한 사건은 이러한 의문을 던져준다.

지난 6일 테헤란에서 열린 거셈 솔레이마니 장군 장례식에서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가 오열하고 있다. 이 장면은 이란 국영방송을 통해 전국에 생방송됐다. 주권국가인 이란의 현역 장성이 이웃 이라크의 국제공항 근처 도로에서 드론의 미사일 공격으로 폭사한 사건으로 이란 국민이 받은 큰 충격과 깊은 슬픔을 잘 보여준다. [AP=연합뉴스]

지난 6일 테헤란에서 열린 거셈 솔레이마니 장군 장례식에서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가 오열하고 있다. 이 장면은 이란 국영방송을 통해 전국에 생방송됐다. 주권국가인 이란의 현역 장성이 이웃 이라크의 국제공항 근처 도로에서 드론의 미사일 공격으로 폭사한 사건으로 이란 국민이 받은 큰 충격과 깊은 슬픔을 잘 보여준다. [AP=연합뉴스]

이란, 저항과 순교의 전통문화 보존  

잠시 이란인의 정체성을 살펴보자. 이란의 국교라고 할 수 있는 이슬람 시아파는 저항과 순교의 종파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아파는 이슬람 창시자인 예언자 무함마드의 외손자인 후세인이 기원 680년 지금의 이라크 남부 카르발라에서 우마이야 왕조에 저항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살해된 사건을 134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고 반추한다.
시아파 무슬림(이슬람 신자)은 그런 후세인을 추모하며 매년 이슬람 달력 첫 달(무하람)의 10번째 날에 ‘아슈라’라는 종교 의식을 치른다. 죽음을 애통해 하며 통곡하거나 가슴을 쥐어뜯고, 심지어 채찍으로 등을 쳐서 피를 내기도 한다. 예언자의 후손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한을 대대손손 물려서 간직하게 하는 것이 시아파 신앙의 핵심이다.
이란을 방문했을 때 인상적이었던 경험 중의 하나가 현수막 문화다. 동네마다, 모스크(이슬람 사원)마다 이란·이라크 전쟁 희생자의 사진을 담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저항과 순교(또는 희생), 그리고 추모가 하나의 생활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또 다른 하나는 이슬람 혁명이었다. 수도 테헤란에서 현지인 가이드가 가장 먼저 데리고 간 곳이 ‘아저디(자유) 탑’이었다. 1979년 이슬람 혁명 당시 시민들의 시위 현장이다.
87년 7월 왕정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슬람 성지 메카에 순례를 갔던 이란인들이 “아저디”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 이란인 275명, 사우디 경찰 75명, 다른 나라 순례자 42명 등 402명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건 뒤 이란과 사우디는 단교했으며 이란인들은 90년까지 메카 순례를 보이콧했다. 외교관계와 순례는 91년에야 복구됐다. 이처럼 이슬람 시아파 신앙과 이슬람 혁명은 저항과 순교, 그리고 추모의 전통과 어우러져 이란의 국가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 6일 테헤란에서 열린 거셈 솔레이마니 장군의 장례식과 운구 행렬을 보기 위해 아저디(자유) 탑 근처 도로에 군중들이 몰려있다. 이곳은 1979년 이슬람혁명 당시 군중이 모여 시위를 벌이던 곳으로 현재 테헤란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AP=연합뉴스]

지난 6일 테헤란에서 열린 거셈 솔레이마니 장군의 장례식과 운구 행렬을 보기 위해 아저디(자유) 탑 근처 도로에 군중들이 몰려있다. 이곳은 1979년 이슬람혁명 당시 군중이 모여 시위를 벌이던 곳으로 현재 테헤란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AP=연합뉴스]

솔레이마니, 순교자 되고 복수가 '국정 과제'로

미 드론 암살, 솔레이마니 순교자로 #이란 복수 다짐하면서 중동 위기감 #트럼프, 이란의 순교문화 이해 못해 #소프트파워 버린 미국, 힘에만 의존 #협상 물 건너 간 이란, 절박감 강해 #바레인·카타르·사우디에 미군 주둔해 #지정학 급소 석유수송로 공격은 부담 #이라크·예멘·레바논서 대리전 가능성

그런 이란에서 또 한 명의 인물이 순교자 반열에 올랐다. 지난 3일 이라크 바그다드 국제공항에서 미국의 드론 공격으로 사망한 솔레이마니다. 6일 테헤란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선 당국 추산 수백만 명의 군중이 모여 “미국에 죽음을” “우리가 술레이마니”를 외쳤다고 유로뉴스가 보도했다. 아저디 탑으로 이어지는 도로에는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몰렸다.
이날 이란 신정체제의 최상부에 있는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가 통곡하는 모습이 국영방송을 통해 전국에 생방송됐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과 국회의원도 갈아 치울 수 있는 막강한 권력자 하메네이의 원한과 슬픔이 고스란히 표출됐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지난 3일 “누가 복수를 하느냐”는 솔레이마니의 딸에게 “이란의 모든 국민이 복수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프랑스 르몽드가 전했다. 솔레이마니는 이렇게 이란의 저항과 분노, 그리고 희생을 상징하는 순교자가 됐다. 그의 죽음에 대한 복수는 이란의 국가적 책무가 됐다. 7일 그의 고향인 이란 동남부 케르만주에서 열린 또 한 번의 장례식에선 사람들이 몰리면서 최소 35명이 압사하고 50여 명이 부상했다.

거셈 술레이마니 장군(가운데)이 2016년 9월 테헤란에서 열린 군 수뇌부 회의에 참석한 모습. 이란의 최고 지도자실 웹사이트가 제공한 사진이다. [AP=연합뉴스]

거셈 술레이마니 장군(가운데)이 2016년 9월 테헤란에서 열린 군 수뇌부 회의에 참석한 모습. 이란의 최고 지도자실 웹사이트가 제공한 사진이다. [AP=연합뉴스]

혁명수비대 ‘예루살렘군’ 사령관으로 특수전

술레이마니의 공식 직함은 이란 혁명수비대의 쿠드스군 사령관이었다. 아랍어로 쿠드스, 이란어로 고드스는 성지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쿠드스군은 ‘시오니스트’와 ‘제국주의자’와 싸워 이슬람 성지이기도 한 예루살렘을 유대인·기독교도로부터 되찾는 게 임무임을 암시하는 명칭이다. 이스라엘·미국·서방 대상의 정보전과 공작·해외파병이 주임무다. 미국으로 치면 해외 정보수집과 공작을 담당하는 중앙정보국(CIA)과 신속파병을 담당하는 특수전 사령부를 합쳐 놓은 듯한 막강한 조직이다.
이란 군은 독특하게도 국민이 뽑은 대통령이 아닌 시아파 최고지도자가 통수권자다. 군대도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프랑스5 방송에 따르면 지역방위를 맡은 정규군(아르테슈·병력 35~55만 추정)과 기동전과 보안업무를 맡은 혁명수비대(세파·12~8만 명 추정)로 나뉜다. 쿠드스군은 혁명수비대 산하지만 조직·병력·장비·예산이 모두 비밀이다. 97~98년 사령관에 오른 솔레이마니가 20년 이상 지휘하면서 하메네이에게 직보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정권의 군대로서 중동에서 이란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패권을 추구하는 게 주 임무다.

이란 정부가 웹사이트에 공개한 2015년 3월 거셈 술레이마니 장군의 사진, 이슬람식으로 기도하는 모습이다. 이란은 그를 '순교자'로 부르며 개인 숭배를 할 태세다. [AP=연합뉴스]

이란 정부가 웹사이트에 공개한 2015년 3월 거셈 술레이마니 장군의 사진, 이슬람식으로 기도하는 모습이다. 이란은 그를 '순교자'로 부르며 개인 숭배를 할 태세다. [AP=연합뉴스]

“본드에 롬멜, 레이디 가가 합친 인물”

솔레이마니는 이처럼 이란 혁명수비대의 ‘예루살렘군’ 사령관으로서 이란 혁명의 확산과 시아파 세력의 중동패권 전략을 기획하고 추진해왔다. 영국의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그를 제임스 본드(공작)와 에르빈 롬멜(전략과 작전), 그리고 대중의 화제를 모으는 레이디 가가를 합친 인물이라는 평가를 내놓은 이유다.
AP통신에 따르면 로하니 대통령은 지난 3일 유족들에게 “(솔레이마니는) 시리아·예멘·레바논·아프가니스탄·이라크 등에서 싸웠다”고 말했다. 이처럼 솔레이마니가 이끈 쿠드스군은 중동 곳곳에서 시아파 정부나 세력을 지원하고 반대파와도 싸워왔다. 중동을 뒤흔든 시리아와 이라크, 그리고 예멘의 내전에서 시아파 세력을 지원했다. 서방 정보기관은 그가 이라크에서 숱한 미군과 영국군 등 연합군의 목숨을 앗아간 급조폭발물(IED)을 다량 공급한 장본인으로 의심한다. 그는 이라크에서 시아파 민병대를 육성하고 친이란 정부를 구성하는 데 힘을 기울여왔다.

지난 3일 이라크의 바그다드 국제공항 인근 도로에서 이란 쿠드스(예루살렘)군의 거셈 술레이마니 사령관이 탄 자동차가 미군 드론의 공격을 받아 불타는 모습. 그의 유해를 끼고 있던 루비 반지로 간신히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AP=연합뉴스]

지난 3일 이라크의 바그다드 국제공항 인근 도로에서 이란 쿠드스(예루살렘)군의 거셈 술레이마니 사령관이 탄 자동차가 미군 드론의 공격을 받아 불타는 모습. 그의 유해를 끼고 있던 루비 반지로 간신히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AP=연합뉴스]

시아파 지원하며 이라크에서 미국 공격 부추겨

문제는 이렇게 이란이 조직을 지원한 이라크 민병대가 최근 잇따라 자국 내 미국 시설물을 공격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마크 에스퍼 국방부 장관이 지난달 초순 이라크 당국에 전화를 걸어 협조를 당부했음에도 지난달 27일 이라크 북부 키르쿠크의 미 공군기지가 공격받아 미국 여러 명이 다치고 미국인 민간군사요원 1명이 숨지는 사건이 터졌다. 그러자 미군은 지난달 29일 이라크의 시아파 민병대인 카타이브 헤즈볼라 기지를 공습했으며, 그러자 카타이브 헤즈볼라가 지난달 31일 바그다드의 미국 대사관을 에워쌌으며 일부는 담을 넘으려고 시도했다. 79년 이란 대학생들이 테헤란 미국 대사관에 진입하고 인질극을 시작할 당시와 흡사한 모습이었다. 그 직후인 지난 3일 솔레이마니가 바그다드 공항에 도착해 카타이브 헤즈볼라의 전 사령관이자 이라크 민병대를 그러모아 조직한 인민동원군(PMF)의 아부마흐디 알무한디스 사령관과 만나 이동하다 미군 드론 공격을 받아 숨졌다. 술레이마니는 공격 당시 사실상 미국과 전쟁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지난달 31일 이라크 바그다드의 미국 대사관 주변에서 이라크의 친이란 민병대인 카타이브 헤즈볼라 대원들이 시위와 방화를 하며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앞서 지난달 27일 이라크 북부 키르쿠크 미 공군기지가 습격을 받아 미군 여려 명이 부상하고 미국인 민간군사요원 1명이 사망하자 미군이 29일 카타이브 헤즈볼라 기지 여러 곳을 공습했다. 이 시위가 벌어진 지 사흘 뒤인 지난 3일 바그다드를 방문한 거셈 솔레이마니 이란 쿠드스군 사령관과 그를 영접한 아부마흐디 알무한디스 전 카타이브 사령관 겸 이라크 인민동원군 사령관이 미군 드론 공격으로 숨졌다. [AP=연합뉴스]

지난달 31일 이라크 바그다드의 미국 대사관 주변에서 이라크의 친이란 민병대인 카타이브 헤즈볼라 대원들이 시위와 방화를 하며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앞서 지난달 27일 이라크 북부 키르쿠크 미 공군기지가 습격을 받아 미군 여려 명이 부상하고 미국인 민간군사요원 1명이 사망하자 미군이 29일 카타이브 헤즈볼라 기지 여러 곳을 공습했다. 이 시위가 벌어진 지 사흘 뒤인 지난 3일 바그다드를 방문한 거셈 솔레이마니 이란 쿠드스군 사령관과 그를 영접한 아부마흐디 알무한디스 전 카타이브 사령관 겸 이라크 인민동원군 사령관이 미군 드론 공격으로 숨졌다. [AP=연합뉴스]

솔레이마니, 핵합의 이후 한때 미군에 협력

솔레이마니가 언제나 미국에 저항만 했던 인물은 아니다. 2015년 미국과 이란이 핵합의(JCPOA)에 이른 뒤에는 미국에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목표물 정보를 제공했고, 이라크에선 이슬람국가(IS) 퇴치전에 병력을 보내는 등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하지만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핵합의에서 탈퇴하고 대이란 경제제재를 재개하면서 사이가 틀어졌다. 솔레이마니는 반미의 화신이 아니라 정권과 정부의 결정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통제해온 인물이었다.

미군 중동 주둔 현황. 미국은 여기에 3500명의 병력을 추가로 파병했다. [그래픽 심수휘]

미군 중동 주둔 현황. 미국은 여기에 3500명의 병력을 추가로 파병했다. [그래픽 심수휘]

학생 시위 유혈진압 인물이 순교자로

솔레이마니의 또 다른 임무는 이슬람 혁명정권 유지였다. 그는 사망 직전까지만 해도 민주주의를 원하는 이란 국민에겐 비난의 대상이었다. 국민이 살기도 힘든데 해외 파병과 공작으로 막대한 군비를 지출하는 신정체제에 대한 비난은 쿠드스군의 지휘자이자 강경파인 그에게 주로 쏟아졌다.
1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학생 시위 유혈 진압을 주도한 인물로 비난 받았다. 그런 인물이 미국의 드론 공격으로 숨지면서 이란의 순교자가 된 것이다. 현재 이란에선 반미시위만 격렬하게 벌어질 뿐, 반정부 시위는 자취를 감췄다. 이란 정권엔 의외의 정치적 소득이다.

중동의 지정학적 급소인 호르무즈 해협과 바브엘만데브 해협. [중앙포토]

중동의 지정학적 급소인 호르무즈 해협과 바브엘만데브 해협. [중앙포토]

이란, 석유수송로 목줄 잡기엔 부담  

이란이 공공연하게 복수를 외치면서 전 세계가 심리적인 공포에 사로잡히고 있다. 이란이 미국과 서방을 괴롭힐 수 있는 지정학적인 급소가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이란은 글로벌 석유 수송로의 목줄을 잡고 있다. 잘 알려진 아라비아 반도 동쪽의 호르무즈 해협은 물론 서쪽의 바브엘만데브 해협도 이란이 마음만 먹으면 통제할 수 있다. 호르무즈 해협은 동서 167㎞, 남북 96~39㎞의 좁은 수로로 글로벌 석유수송로의 급소다. 바브엘만데브 해협은 폭이 26~50㎞에 지나지 않는 좁은 바닷길로 수에즈 운하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므로 중동과 유럽,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목줄이다. 호르무즈 해협의 북쪽은 이란 영해와 영토이며, 바브엘반데브는 친이란 세력인 예멘의 후티 반군의 미사일 사정권에 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캠프 브레그에서 지난 4일 미 육군 제82공수사단 소속 병력이 중동 이동을 위해 민간 여객기로 향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캠프 브레그에서 지난 4일 미 육군 제82공수사단 소속 병력이 중동 이동을 위해 민간 여객기로 향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중동 미군기지엔 7만 병력 주둔

중동 주둔 미군도 이란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미국 MSNBC에 따르면 이란 주변에는 현재 아프가니스탄(1만4000명)·카타르(1만3000명)·쿠웨이트(1만3000명)·바레인(7000명)·이라크(5200명)·아랍에미리트(UAE·5000명)·요르단(2795명)·시리아(2000명) 등에 7만 명 가까운 미군이 주둔한다. 중동과 중앙아시아를 담당하는 미군 중부사령부(USCENTCOM) 산하 해외 파병 병력이다. 여기에 드론 암살 뒤 3500명 이상의 병력이 추가로 중동으로 향하고 있다고 MSNBC가 보도했다. 미군 기지가 공격이나 위협을 받을 경우 글로벌 위험은 더욱 증폭될 수밖에 없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4일 “이란이 미국인과 미국 자산을 공격할 경우 이란 문화에 중요한 곳을 포함해 52개 목표물을 타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BBC방송이 보도했다. 트럼프는 52개에 대해 “오래전 이란에 잡혀있던 미국인 포로의 숫자라고 말했지만 1979~81년 테헤란 미국 대사관에 63명, 이란 외교부에 3명의 인질이 각각 잡혀 444일간 억류됐다.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잘못된 기억을 바탕으로 한 타격 목표물 설정과  탈레반이나 이슬람국가(IS)나 하던 반달리즘(문화 파괴 행위)을 미국 대통령이 공언했다는 점에서 트럼프의 발언은 전 세계의 비난을 자초했다. 20세기 후반부터 미국이 위력을 떨쳤던 ‘소프트 파워’가 사라지고 힘을 앞세운 함포 외교의 시대가 다시 시작되고 있다.

2015년 1월 이란 남부 부셰르의 원자력 시설을 돌아보는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 거셈 술레이마니 장군의 드론 피습 사망으로 이란 핵합의가 새로운 기로에 처했다. [EPA=연합뉴스]

2015년 1월 이란 남부 부셰르의 원자력 시설을 돌아보는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 거셈 술레이마니 장군의 드론 피습 사망으로 이란 핵합의가 새로운 기로에 처했다. [EPA=연합뉴스]

소프트파워 대신 무력 의존 시대 생존법 찾아야
소프트파워를 버린 미국이 무력에 의존한다면, 협상 대신 복수의 길을 찾아야 하는 이란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란이 석유 수송로를 막거나 미군 기지를 노리기에는 아무래도 부담이 크다. 자칫 자충수가 될 수도 있다. 대신 오랫동안 지원해온 레바논의 무장 정파 헤즈볼라, 시리아의 알아사드 정부군, 예멘의 후티 반군, 이라크의 시아파 민병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하마스를 앞세워 대리전을 시도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주목할 점은 이란이 중동의 군사 강국으로 탄도 미사일은 물론 상당수 드론도 자체 개발하거나 서구 제품을 역설계해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바탕으로 유사시에는 ‘이에는 이’의 방식으로 미국이나 동맹국을 드론이나 미사일로 위협할 가능성도 있다. 미국과 이란이 중동의 지정학적 급소에서 함부로 격돌하지 못하도록 글로벌 외교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석유 수송로를 스스로 지키는 노력도 필요해 보인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