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낀 세대’ 2020년 임원들을 위하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김창규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김창규 경제디렉터

김창규 경제디렉터

최근 두 명의 대기업 간부와 식사할 기회가 있었다. 회사는 달랐지만 둘 다 오랜 세월 부장을 하며 ‘별(임원)’을 달기만 고대했다. 하지만 지난해 말 정기인사에서 둘의 운명은 갈렸다. 한 명은 ‘꿈에 그리던’  임원에 올랐고 다른 한 명은 또다시 고배를 마셨다.

‘불황형 감원’ 임원 30% 줄어 #경제성장 게걸음에 규제 여파 #60년대 후반생, 동료·상사에 치여 #경제 이끄는 밀알 … 포기 말아야

# 우선, 임원을 쟁취한 사람. 축하한다는 덕담을 건넸다. 그의 입가엔 미소가 감돌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이내 굳어졌다. 그는 “걱정이 많다”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렇게 원하던 임원이 됐는데 요즘처럼 기쁜 때가 어디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임원이 되는 순간부터 앞뒤로 치이고 있어 언제 잘릴지 모를 불안감이 마구 밀려온다”고 말했다. 2~4년 후배와 함께 임원에 오른 그는 임원 사이에선 이미 고참인데다 최고경영자(CEO)와도 나이 차이가 거의 나지 않아 사내에서 ‘옛날 사람’ 취급받는 느낌이라고 했다.

# 임원에 오르지 못한 부장을 만난 건 며칠 뒤였다. 식사 장소로 가는 동안 내내 고민했다. “어떤 말을 해야 하나, 인사 얘기는 하지 말까.”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치다 보니 어느새 그가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짓다가 첫 마디부터 인사 얘기가 튀어나왔다. “지난해는 잊어버리고… 올해 좋은 일 있겠지요.” 그러자 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 만년 부장으로 몇 년 있다가 은퇴의 길을 걷겠지요.”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심초사하며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마음을 내려놓으니 오히려 편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은퇴 준비를 하려니 막막하다고 했다.

서소문 포럼 1/8

서소문 포럼 1/8

연말연시 인사철이다. 인사는 어떤 이에겐 희망과 기쁨을 주지만 다른 이에겐 좌절과 슬픔을 안기기도 한다. 요즘 재계 인사 소식을 전할 때마다 희망과 활기보다는 걱정과 불안이 앞선다. 웃는 사람보다는 가슴 졸이는 사람이 눈에 띄게 늘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사상 최대의 승진’ ‘차세대 발탁 인사’ 등의 표현이 인사 관련 기사의 제목을 장식했다. 하지만 요즘엔  ‘임원승진 작년 절반 그쳐’ ‘재계 슬림화 확산’ 등이 헤드라인에 오른다.

실제로 아직 인사를 하지 않은 삼성을 제외한 10대 그룹의 임원 승진자는 전년보다 30%가량 줄었다. 대부분의 그룹에서 임원 승진자가 줄었고 어떤 그룹은 임원 승진자가 전년의 절반 수준으로 쪼그라들기도 했다. 각 그룹은 조직의 ‘효율화’ ‘슬림화’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전문가는 이를 불황형 감원으로 진단한다.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2% 수준으로 게걸음을 하는 데다 대외환경 악화와 각종 규제 등으로 기업인의 경제하려는 의지가 크게 꺾였기 때문이다. 올해 한국 경제 전망도 여전히 안갯속이니 기업이 허리띠 졸라매는 건 당연하다.

임원을 유지하거나 쟁취한 사람의 표정도 그리 밝지만은 않다. 지난해 말 인사에서 유임된 한 대기업 임원은 “유임 통보를 받기 전까지 거의 일을 하지 못했다”며 “곳곳에서 임원이 잘려나가니 회사가 쑥대밭이 됐다”고 전했다. 또 다른 임원은 “한 1년차 임원은 인사 전날에 해임 통보를 받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최근 재계 인사의 특징은 젊은 오너의 경영 참여와 30~40대 임원의 약진이다. 주요 기업은 미래 산업에 대응한다며 1960년대생 CEO를 속속 전진 배치하고 70~80년대생 임원을 발탁했다. 이러다 보니 60년대 후반이나 70년대 초에 태어난 임원은 동료 임원엔 치이고 젊은(?) 상사에게는 밀리는 낀 세대가 됐다. 이들은 “어디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느낌”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고 한다. 최근엔 임원 1~2년차에 물러나는 경우도 많아 이래저래 항상 쫓기고 불안하다. 3~4년 선배인 86세대(1980년대 학번, 1960년대생)가 짧게는 3~5년, 길게는 6~8년 임원 자리를 지킨 것을 봤던 그들에겐 세월이 야속하다. 그렇다고 마냥 움츠러들고 있기엔 낀 세대 임원의 역할이 막중하다.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하는 크고 작은 결정은 밀알이 돼 나중에 한국 경제를 이끄는 큰 줄기가 될 것임이 분명해서다. 낀 세대 임원이여! 가슴을 활짝 펴자.

김창규 경제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