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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글로브상 탄 래퍼 출신 한국계 “난 존재 자체가 도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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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는 아콰피나. [골든글로브 SNS]

트로피를 들고 기뻐하는 아콰피나. [골든글로브 SNS]

“그전까진 유튜브에서 어떤 아시아계 여자애도 저처럼 뻔뻔한 캐릭터를 보여준 적이 없었죠. 제 존재 자체가 도발적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아요.”

아시아계 첫 여우주연상 아콰피나 #코미디 가족영화 ‘더 페어웰’ 열연 #수상소감은 “아빠, 일자리 구했어” #여성 성기 노래하다 직장서 잘려 #액션영화 ‘오션스 8’서 개성 폭발

2017년 말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아콰피나(32·본명 노라 럼)가 한 말이다. 아시아계 래퍼 출신인 그가 대중의 인기를 등에 업고 범죄 액션 영화 ‘오션스8’에 캐스팅된 배경을 두고서다. 실제로 그는 등장부터 대담하고 자유분방했다.

‘더 페어웰’은 죽음을 앞둔 할머니를 만나러 중국으로 향한 손녀 이야기다. [AP=연합뉴스]

‘더 페어웰’은 죽음을 앞둔 할머니를 만나러 중국으로 향한 손녀 이야기다. [AP=연합뉴스]

2012년 말 유튜브를 통해 처음 공개한 노래가 여성의 질을 자랑삼아 ‘썰’ 푸는 도발적인 랩 ‘마이 배지(My Vag)’이다. 여성 성기를 가리키는 비속어(vag)만 총 53번 등장하는 이 노래가 빌미가 돼 직장에서 잘렸을 정도다. 영화 ‘오션스8’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등에서 그가 맡은 캐릭터도 아시아계 여성 이미지를 깨부수는, 뻔뻔한 ‘신스틸러’들이었다.

스스로 “존재 자체가 도발”이라고 말한 아시아계 여배우 아콰피나가 지난 5일(현지시간) 열린 제7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또 하나의 역사를 썼다. 뮤지컬·코미디 부문 후보에 오른 중국계 미국 여성의 가족영화 ‘더 페어웰’로 아시아계 첫 여우주연상을 탄 것이다. TV 부문에선 한국계 할리우드 배우 산드라 오가 지난해 여우주연상(‘킬링 이브’)을 탄 적 있지만 영화에선 아콰피나가 처음이다. 아시아계가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것도 1956년 쿄 마치코 이래 아콰피나까지 6명에 불과했다고 CNN은 전했다. 이날 ‘기생충’으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봉준호 감독과 함께 외신의 관심이 쏠린 이유다. “아콰피나와 봉준호가 골든글로브의 역사를 만들었다”(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는 반응이 쏟아졌다.

“굉장하다. 감사하다. 행여나, 내가 곤궁에 처하면 이걸(트로피를) 팔 수 있을테니, 좋은 일이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시상식 무대에 오른 그는 이렇게 허를 찌르는 농담으로 수상 소감을 시작했다. 뉴욕에서 한국계 어머니와 중국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네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는 감격을 억누르며 “일생의 기회를 준 룰루 왕 감독에게 감사한 마음”이라고 한 뒤 “아버지와 나를 길러주신 할머니, 더불어 저 위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어머니께도 감사드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빠, 제가 일자리를 구할 거라 했죠?”라는 익살을 잊지 않아 좌중의 폭소를 자아냈다.

아콰피나(Awkwafina)라는 이름은 고등학생 때 생수 상표(아쿠아피나)에서 따서 지은 예명이다. ‘멋있는 어색함’ 정도의 의미라고 스스로 밝혔다. 열세 살 때부터 붐박스에 자작 랩을 녹음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홈페이지에 식료품점 배경의 웹 토크쇼 ‘터크(Tawk)’를 진행하기도 했다. 몸에 문신이 많은데 왼팔에는 사나운 집고양이가, 오른팔에는 트럼펫이 새겨져 있다. 트럼펫 관련해선 이렇게 밝힌 바 있다. “트럼펫은 밴드에서 가장 시끄러운 악기예요. 고등학교에서 트럼펫을 불었는데 아무도 이 악기를 선택하지 않았어요. 저는 트럼펫 같은 사람이에요. 어느 곳에서도 요란한 목소리를 내죠.”

‘마이 배지’로 출판사에서 해고당한 이후 일식점, 비건 음식점 등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했다. 2014년에는 타이틀곡 ‘옐로 레인저(Yellow ranger)’가 수록된 데뷔 앨범을 냈다. 이듬해엔 자신이 나고 자란 뉴욕을 소개하는 『아콰피나의 NYC』라는 책도 냈다. 2013년 단편영화 ‘섀도우 맨’과 2015년 코미디물 ‘나쁜 녀석들 2’를 통해 연기자로 나섰다.

대형 영화사의 블록버스터 주연은 ‘오션스 8’이 처음이었다. 전 세계적인 흥행작이었던 ‘오션스’ 시리즈의 스핀오프로 주요 멤버가 모두 여성이라 화제가 됐다. 뉴욕 최대 패션 행사에서 1500억원짜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훔치려고 뭉친 여성 범죄조직 이야기로 아콰피나는 저잣거리에서 야바위로 한몫 챙겨온 천부적인 소매치기를 맡았다. 아콰피나는 당시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기상천외한 얘기를 꾸며대는 모든 장면이 재밌었다”면서 “실제 제 성격도 많이 반영됐다”고 귀띔했다.

이번 골든글로브 수상 후 무대 뒤에서 취재진과 만났을 때 그는 “마음이 터질 것 같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이것이 (앞으로 아시아 여성 배우 수상기록의) 시작이길 바랍니다.”

오늘날 그를 있게 한 문제의 유튜브 뮤직비디오 ‘마이 배지(My Vag)’ 조회수는 7일 오후 현재 500만 회를 앞두고 있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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