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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랭귀지" 외친 봉준호, 101년 만에 美에 깃발 꽂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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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한국 영화 최초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시상대에서 트로피를 들고 무언가 손짓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제7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한국 영화 최초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시상대에서 트로피를 들고 무언가 손짓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우리는 단 하나의 언어를 쓴다고 생각합니다. 그 언어는 영화입니다(I think we use only one language, Cinema.)”

제77회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첫 수상 #레드카펫에선 "한국 산업에 역사적인 날" #"1인치 자막 장벽 넘으면 더 즐길 수 있어"

시상대에서 내내 만면에 미소를 잃지 않던 봉준호 감독의 표정이 일순간 차분해졌다. 그가 트로피를 들고 있는 왼손의 검지까지 치켜 올리며 영어로 ‘원 랭귀지(one language)’를 강조할 때 카메라는 시상대 아래 앉아 있는 르네 젤 위거 등 할리우드 배우‧감독들을 비추었다. 1919년 일제강점기 중 상영된 ‘의리적 구토’를 시작으로 달려온 한국영화가 101년 만에 전 세계 영화산업의 중심지인 미국에 역사적 깃발을 꽂은 순간이다.

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베버리힐튼 호텔에서 열린 제7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기생충’은 한국 영화 최초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비록 함께 노미네이트됐던 감독상과 각본상 수상은 이루지 못했지만 외국어영화상 수상 자체만으로 한국영화사의 쾌거다. 시상식장에는 출연배우인 송강호‧이정은과 제작사인 바른손이앤에이의 곽신애 대표 등이 참석해 행사를 지켜봤다. 함께 미국에 간 출연배우 이선균은 같은 시각 아카데미시상식 관련 행사에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 군더더기 없이 요점을 말하면서 특유의 넉살을 잊지 않는 봉 감독의 입담은 할리우드에서도 여전했다. 이날 시상식이 열리기 전 레드카펫 행사에서 봉 감독은 참석 소감을 묻는 진행자에게 “아주 잘 잤다. 지난밤에 매우 피곤했기 때문에, 아침에 기분 좋게 일어났다”고 말했다. ‘골든글로브가 어떤 의미냐’는 질문에는 “개인적으로는 오늘의 즐거운 이벤트를, 여러 스타들을 보며 즐기고 싶지만 한국은 (영화) 산업 입장에서 역사적인 날”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다른 현지 매체와의 인터뷰에선 “제가 골든글로브에 와 있긴 하지만 BTS(방탄소년단)가 누리는 파워는 저의 3000배는 넘을 것”이라고 말하며 한국문화의 저력을 상기시켰다. 또 “그런 멋진 아티스트들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나라, 감정적으로 매우 격렬하고 다이나믹한 나라”라는 말로 '기생충'에 잠재된 한국적 DNA를 강조했다.

마침내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수상이 호명됐을 땐 상기된 표정으로 “놀라운 일이다. 믿을 수 없다”면서 “나는 외국어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어서, 통역이 여기 함께 있다. 이해 부탁드린다”고 영어로 운을 뗐다. 이어서 한국어로 이어간 수상 소감은 ‘언어 장벽’을 허물고 영화라는 언어로 하나가 되자는 메시지를 담았다.

“자막의 장벽, 장벽도 아니죠. 1인치 정도 되는 장벽을 뛰어 넘으면 여러분들이 훨씬 더 많은 영화를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함께 후보에 오른 페드로 알모도바르 그리고 멋진 세계 영화 감독님들과 함께 후보에 오를 수 있어서 그 자체가 이미 영광입니다.”

제7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이 열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베버리힐튼 호텔 레드카펫 행사장에서 포착된 봉준호 감독. [사진 골든글로브 홈페이지 캡처]

제7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이 열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베버리힐튼 호텔 레드카펫 행사장에서 포착된 봉준호 감독. [사진 골든글로브 홈페이지 캡처]

영화라는 하나의 언어를 겨냥해서 만들어진 ‘기생충’은 북미 흥행 기록도 연일 갈아치우고 있다. 박스오피스 모조에 따르면 지난 주말인 5일까지 ‘기생충’(영어제목 Parasite)은 2390만 달러(약 279억원)를 벌어들였다. 외국어영화 역대 흥행작 8위에 해당하는 기록으로 ‘일 포스티노’(1995, 2180만 달러)를 무난히 제쳤다. 연예매체 ‘데드라인’은 ‘기생충’이 역대 외국어영화 흥행 7위인 ‘무인 곽원갑’(Fearless, 2006, 2460만 달러) 자리를 넘볼 것으로 내다본다.

아카데미 전초전인 골든글로브를 수상하면서 ‘기생충’의 오스카 수상 가능성도 더욱 커졌다. 내달 9일 열리는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기생충’은 외국어영화상 외에 주제가상(‘소주 한 잔’) 등 2개 부문 예비후보명단(쇼트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최종 후보 및 작품상‧감독상 등 본상 노미네이트 여부는 오는 13일 발표된다.

앞서 봉 감독은 “오스카(아카데미)는 국제영화제가 아니지 않나. 매우 ‘로컬’(지역적)이니까("The Oscars are not 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They’re very local”)”라고 말한 바 있다. 출품 자체가 수상 조건인 여느 국제영화제와 달리 미국 내 개봉을 기준으로 하는 아카데미 시상식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럼에도 할리우드의 미국 중심주의를 가볍게 누른 ‘사이다 발언’이라 소셜미디어에서 화제가 됐다. 봉 감독이 오스카 시상대에 오를 경우 수상소감이 어느때보다 기대되는 이유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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