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권석천 논설위원이 간다

수많은 구하라들, 지워달라는데…영상은 촬영자 소유물?

중앙일보

입력 2020.01.06 00:34

지면보기

종합 26면

이별 후 촬영물 공포, 어떻게 할 것인가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 일대에서 열린 페미사이드(여성 살해) 규탄 집회 참가자들이 푯말을 들고 ’여성 혐오 범죄를 근절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참가자들은 설리·구하라씨에 대한 추모의 뜻으로 검은색 옷과 모자 등을 착용했다. [연합뉴스]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마로니에공원 일대에서 열린 페미사이드(여성 살해) 규탄 집회 참가자들이 푯말을 들고 ’여성 혐오 범죄를 근절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참가자들은 설리·구하라씨에 대한 추모의 뜻으로 검은색 옷과 모자 등을 착용했다. [연합뉴스]

‘이것부터 시작한다.’

‘의사에 반해 촬영’ 입증 못하면
언제 폭탄 터질지 불안에 떨어야
삭제 요구할 수있는 장치 마련해
안전하게 헤어질 권리 보장해야

30대 여성 A씨가 연인이었던 B씨에게 “헤어지자”고 통보한 직후였다. B씨로부터 문자메시지와 함께 A씨의 나체 사진 세 장이 전송됐다. A씨는 B씨를 찾아가 휴대전화를 보여 달라고 했다. A씨가 B씨 휴대전화에서 사진을 삭제하자 B씨는 욕설과 함께 A씨를 폭행했다.

지난해 8월 울산지방법원 형사6단독 황보승혁 판사는 B씨에게 상해와 성폭력 처벌 특례법 위반(카메라 등 이용 촬영) 혐의 등으로 징역형을 선고했다. 특례법을 적용할 수 있었던 것은 “A씨 의사에 반하여 촬영했다”는 판단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법원은 휴대전화와 함께 전자정보 30개를 몰수했다.

문제는 A씨 사건처럼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여’란 법적 기준을 통과하기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가수 구하라씨 사건을 보자. 전 남자친구 최모씨는 인터넷 매체에 ‘제보 드릴 테니 전화 달라’고 메일을 보낸 뒤 구씨에게 카톡으로 동영상을 보냈다. “영상을 유포하지 말아 달라.” 구씨는 최씨 앞에 무릎을 꿇고 사정해야 했다.

하지만 1심 법원은 최씨의 협박 혐의를 인정하면서도 성폭력 처벌 특례법 위반은 인정하지 않았다. “피고인과 피해자의 관계 등을 종합하면, 명시적 동의를 받지 않았으나 의사에 반하여 촬영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의사에 반해 촬영했다는 것을 대체 어떻게 입증해야 하는 걸까.

디지털 성범죄

디지털 성범죄

영상물로 고통받았거나 받고 있는 이는 구하라씨만이 아니다. 지난해 1월부터 11월 30일까지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산하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에서 영상물 삭제 등 지원을 받은 사람은 모두 1936명에 달했다. 이들이 받은 성범죄 피해를 유형별로 보면 ‘불법 촬영물 유포’가 1001건(29.7%)으로 가장 많았고, ‘불법 촬영’이 875건(26.0%), ‘유포 불안’이 414건(12.3%)으로 그 뒤를 이었다. 또, 피해자 중 24.0%는 전·현 배우자나 연인 등 친밀한 관계였던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보았다.

지원센터 박성혜 삭제지원팀장은 “자신의 영상물이 어디에선가 유통되고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호소하는 상담이 계속해서 늘고 있다”고 말했다. 헤어진 남자친구 등으로부터 협박을 받는 사례도 많지만, 과거에 촬영했던 영상물이 온라인에 돌아다니고 있지 않은지 우려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실제로 디지털 성범죄가 남성 이용 사이트를 중심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여성들은 영상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알기 힘듭니다. 여성들이 피해 상담을 해오시면 이름과 인상착의, 경위 같은 것을 물어봐서 온라인에 유포됐는지 검색을 합니다. 자신의 영상이 검색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위안을 갖는 분들이 많습니다.”(박성혜 팀장)

이렇게 공포가 만연해 있음에도 ‘의사에 반하여’ 촬영했음이 입증되거나 영상물이 유포되지 않은 경우엔 과거의 연인 등이 가지고 있는 촬영물을 어쩌지 못한다. 영상물의 소유권이 촬영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아동·청소년 이용 음란물의 경우 소지만 하고 있어도 처벌이 가능한 것과 다른 점이다.

전 남자친구와의 재판 과정에서 영상물의 존재를 알게 된 한 여성은 변호사를 통해 검사에게 “영상을 지우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검사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고 한다. “아시잖아요. 영상 소유권이 촬영자에게 있다는 거. 몰래 촬영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셔야….”

사귀는 동안에는 촬영하더라도 지워달라고 하기가 쉽지 않다. 어떤 남성들은 영상 일부를 캡처한 사진을 아무 말 없이 보내 공황 상태에 빠뜨리기도 한다. 수사기관에 고소해도 “정면 샷(shot)인데 무슨 몰카냐?”는 핀잔을 듣기 일쑤다. 성범죄 사건을 많이 다뤄온 이은의 변호사는 “이별한 후 촬영물 삭제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수많은 구하라들이 수많은 최○○들에게 지워달라고 호소하고, 최○○들은 그럴 수 없다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성적 수치심이 들 수 있는 촬영물이 있을 때는 삭제를 요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형사처벌은 하지 못하더라도 과태료를 부과한다든지. 촬영 당시 찍지 말라고 거부한 게 아니면 지울 길이 없다는 게, 브레이크 장치가 하나도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소유권에 맞선다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른다. 고통이 실제로 존재하고 그 고통을 당하는 이들이 많다면 대책을 마련하는 게 정상 아닌가. 소유권이 누군가를 괴롭히고 불행하게 할 권리는 아니지 않은가. “소유권”을 주장하면 항변 한마디 못 하는 사회는 인간의 사회가 아니다. 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촬영 당시 동의를 했더라도 계약 철회를 주장할 수 있는 만큼 민사소송을 통해 영상물을 없애는 방법도 검토해볼 만하다”고 했다.

지난해 7월 최씨 결심 공판에서 구하라씨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피해자는 자신의 성관계 영상이 있다고 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이를 볼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지옥으로 몰아넣고도 전혀 반성하지 않는 사정을 고려해주시길 바랍니다.”

구하라씨에게 최씨의 촬영물은 언젠가 터질 시한폭탄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그런데도 구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숨진 당일 밤, 최씨를 호명하는 댓글이 올라왔다. ‘○○아. 이제 영상 풀자. 고소할 사람도 없잖아 ㅋㅋㅋㅋㅋㅋㅋ.’

한국 사회의 구하라들이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지 않도록, 영상물이 인격을 살인하는 흉기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안전하게 헤어질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을 존중하는 방식이며, 사람에 대한 예의다.

"지인능욕·온라인 그루밍…디지털 성범죄 일상화되고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 일어나는 디지털성범죄는 얼마나 심각한 피해를 낳고 있을까.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대응은 어떻게 이뤄지고 있을까.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 박성혜 삭제지원팀장을 만나 실태를 들어봤다.

먼저 지원센터의 영상물 삭제 지원 건수가 지난해 8213건으로 두 배 이상늘어난 이유부터 물었다.

“삭제지원 인력이 9명에서 16명으로 늘어난 데다 경험과 노하우가 쌓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씩 삭제하던 것을 어떻게 하면 한꺼번에 삭제할 수 있을지 연구해서 새로운 방식들을 개발했다. 경찰과 실무자 핫라인을 뚫으면서 수사를 통해 영상물 유통 사이트들을 폐쇄하도록 지원하고 있다.”

당사자가 받는 심리적 피해는 얼마나 심각한가.
“물리적 성범죄보다 심각한 측면이 있다. 디지털의 특성상 피해자들은 영상물이 언제 어디에 어떻게 유포됐는지, 또 어떤 사람이 봤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거리를 다닐 수도 없다고 호소한다. 일상생활을 하기 힘들 정도다.”
촬영물과 함께 개인정보까지 유출된 경우가 23.8%(지원 건수 대비)에 달하는데.
“개인정보 중 이름이 유출된 경우가 73%로 가장 많았다. 최초 유포 후 피해자 이름으로 검색이 이뤄지다 보니 어디에 살고, 무슨 일을 하는지까지 나오게 된다. 영상물에 개인정보가 남아 있기 때문에 온라인에서 사라졌다가도 다시 살아나곤 한다. 우리 센터에서도 구글 검색결과까지 완벽하게 삭제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일상사진도 피해 영상물이 된다는데.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 같은 걸 다운받아서 음란물과 합성하는 식이다. 지인을 대상으로 한다고 해서 ‘지인 능욕’이라고도 하는데, 디지털성범죄가 얼마나 일상화돼 있는지 보여준다. 10대들,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단톡방 등에서 놀이처럼 하는가 하면 돈을 받고 합성 사진을 제작해주는 사람들도 있다.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최근 나타난 새로운 양상이 있다면.
“온라인 그루밍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미성년자와 채팅을 하면서 신뢰관계를 쌓아 신체 부위 사진을 받은 뒤 ‘너희 학교에 뿌리겠다’고 협박한다. 더 높은 수위를 요구하고, 실제로 유포하기도 한다. 최근엔 개인 방송 BJ들의 신체를 캡처해서 상업적으로 유포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권석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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